[오마이뉴스 하재근(ears) 기자]
한나라당이 사학법을 양보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원내 1당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고 한다. 사학개혁을 추진했던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양보를 환영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 계속된 사학개혁 싸움은 한나라당의 양보로 일단락 된 것인가?
양보의 주체가 한나라당이라고 선전하는 열린우리당의 태도부터가 황당하다. 한나라당은 양보한 적이 없다. 양보한 당사자는 명백히 열린우리당이다. 그 양보의 대가는 민생법안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학법을 주고 받았다는 교육 분야 민생법안은 로스쿨법이다. 그것도 법사위에서 아직 이견이 해소되지 않았다. 이것도 황당하다.
로스쿨의 학비는 연간 수천만 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연간 수천만 원 학비의 교육과정 설치와 민생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로스쿨은 논란의 여지가 매우 크며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공론이 모아지지 않은 부문이다. 열린우리당은 그런 것을 민생법안이라며 우리 사회의 숙원인 사학법과 맞바꾸려 하고 있다.
양극화 문제는 접어두고, 그나마 상식이 통하는 나라를 만들겠다던 현 집권세력이 내세울 유일한 개혁 실적이 사학개혁이다. 열린우리당은 2002년 총선 전엔 이런 개혁을 책임지겠다며 국민에게 호소했고, 총선 후엔 이 싸움으로 몇 년간을 소모했다. 그런데 이제 한나라당의 양보를 이끌어냈다며 사학법을 재개정하려고 한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2004년 열린우리당 애초의 안은 개방형 이사가 이사 중 3분의 1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곧 '양보'했다. 2005년에 이르러 개방형 이사는 4분의 1로 줄었고, 그나마도 학교운영위원회 2배수 추천 후 재단이 임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록 미흡하나마 사학의 제왕적 족벌경영을 견제할 장치의 첫 걸음이라고 평가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거침없는 양보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2006년에 이르러 개방형 이사제를 명목상 유지하는 대신 사학에 다른 출구를 주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이사장 친인척의 학교장 임용 허용, 이사장의 타 학교법인 이사장, 교장 겸직 허용, 대학의 학교장 중임 제한 삭제, 위법 방조 임원승인 취소 조항 삭제 등이다. 교사회-학부모회-학생회 법제화나 인사위원회-징계위원회 교사회-교수회 추천 조항은 2005년도에 이미 삭제했다.
개방형 이사제를 존립시킨다는 그 명분 하나만을 가지고 국민을 현혹하며 실질적으론 지속적으로 사학개혁의 취지를 무력화해 온 것이다.
개방형 이사를 추천하는 주체는 학교운영위원회다. 그런데 학교운영위원회는 불행히도 학교 측 이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학교 운영 구조 개혁의 실질적 주체는 교사회, 학부모회, 학생회 등이다. 하지만 이 주체들은 우리당의 양보로 사학개혁에서 진작에 사라졌다. 또, 이사장의 친인척이 교장이 되고, 중임할 수 있게 되면 족벌경영을 뿌리 뽑을 수 없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2007년 4월엔 임시이사의 임기를 3년으로 제한해 비리재단이 복귀할 장치까지 마련했다. 게다가 이 모든 거침없는 양보의 행진을 감행하며 끝끝내 지키겠다고 표방했던 단 하나의 명분인 개방형 이사제도 무력화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했다.
그것이 개방이사추천위원회다. 이 위원회를 학교운영위원회/대학평의원회와 이사회가 동시에 구성, 개방형 이사를 2배수로 추천하여 이사회의 낙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이사회 자신이 개방형 이사를 추천할 권한을 갖게 되어 개방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된다.
스스로 추천하여 스스로 임명하는 이사가 어떻게 개방형 이사란 말인가? 열린우리당의 거침없는 양보는 급기야는 개방형 이사제라는 단어 하나만 남기고 그 모든 실질적 내용을 스스로 삭제하는 거대한 허무개그의 경지에 다다른 셈이다.
한나라당은 이마저도 받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개방이사추천위원회를 이사회와 학교운영위원회·대학평의원회가 동수로 구성하라고 요구했다. 이번에 한나라당이 양보했다는 것은,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의 양보했던 모든 내용은 다 받으면서, 개방이사추천위원회에 이사회 측 인사가 한 명 적게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학교운영위원회·대학평의원회 측 인사가 위원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한다 해도, 2배수 추천인 이상 이사회가 절반의 추천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추천한 인사를 선임하게 될 것이다.
물론 얻은 것이 있기는 하다. 학교운영위원회는 개방이사추천위원회에서 2배수로 개방형 이사를 추천할 때 과반수의 인원으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추천 당시의 거부권. 이것이 열린우리당의 사학개혁으로 한국사회가 얻은 것이다.
그러나 재단이 거부권의 대상이 될 만큼 결격사유가 분명한 인사를 추천할 리도 없거니와, 학교운영위원회 자체가 기존의 학교장-재단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므로, 학교운영위원회가 개방이사추천위원회에 진입해 행사하는 거부권이 황제경영을 견제할 장치가 될 것이라고 믿기는 힘들다. 그리하여 결국 얻은 것은 허울뿐인 개방형 이사제라는 단어에 불과한 셈이 된다.
지금 한나라당이 마치 큰 양보를 한 것처럼 선전되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열린우리당이 애초에 한나라당이 받을 안을 마련해줬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면 사학재단은 개방형 이사 선임 과정에서의 '약간의 귀찮음'만 감수하면 잃을 것이 크게 없다. 사학재단에게 '약간의 귀찮음'을 안겨주기 위해 국회 과반수가 필요했단 말인가?
한나라당에게 원활한 국정운영과 민생법안을 위해 대승적으로 양보했다는 프리미엄을 안겨주는 대신, 교육부문에서 열린우리당은 로스쿨법안 하나를 챙기려 하는 모양새다. 2007년에 로스쿨법안을 얻기 위해 사학개혁의 큰 칼을 빼들었다? 열린우리당의 기념비적인 허무개그가 놀라울 뿐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원문] 2007-06-30 11:47
ⓒ 2007 OhmyNews
2007년 6월 26일 화요일
한국 정치 ‘아부의 정석 10’
적 만들고 명분은 그럴듯하게…
아부에 면역되면 자기교정 능력 없어져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따져보자고 한다. 좋은 일이지만 더 시급한 게 있다.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어떻게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가? 이게 가장 중요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 김영삼·김대중 정권의 말기가 비참했던 것도 바로 이런 문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그런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
한나라당의 내분이 실감나게 보여준 건 ‘줄서기’와 ‘줄세우기’였다. 한나라당 집권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지도자의 오류를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이는 한나라당만의 문제도 아니고 역대 정권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 정치의 문제다. 대통령제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더욱 근원적인 것이다.
‘당파성’에 대한 엄청난 착각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 동시에 그 힘을 숭배하는 이중성을 잠시 접고, 정치를 정직하게 바라보자. 아니 우리 자신부터 보자. 우리는 공정성에 대단히 취약하거나 서투른 사람들이다. ‘호감’과 ‘반감’이 공정성을 먹어버린다. 공정한 규칙은 모든 집단에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이 진술에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걸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지지하는 집단엔 관대한 반면, 내가 반대하는 집단엔 엄격하다. 이걸 ‘당파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정성이 없거나 약하니, 사회적 갈등은 합리적 해소의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늘 문자 그대로 이전투구(泥田鬪狗)로 갈 수밖에 없다. 이미 갈라진 편의 대세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조율하거나 바꾸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는 자기 편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똑같은 짓이라도 상대편이 하면 타도해야 할 반민주적 작태지만, 우리 편이 하면 개혁을 위한 불가피성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되면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지도자의 비위를 맞추려는 아부꾼만 난무하게 된다. 아무리 같은 편이라도 아부를 지적해 비판할 수 있을 정도의 긴장이 그 집단 내에 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부, 이거 의외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한국 정치의 급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시절 주변의 아부꾼들에 의해 ‘세기의 태양’ ‘구국의 태양’ ‘인류의 등대’ ‘현대의 성자’ 등으로 극찬됐다. 우리는 지금 그걸 보고 어이없어하며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진보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우리는 ‘태양’ ‘등대’ ‘성자’ 같은 언어 구사의 촌스러움에 대해 웃는 것이지, 아부 자체를 멀리할 정도로 진보하진 않았다.
미국 언론인 리처드 스텐겔은 <아부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아부의 정석’으로 “그럴듯하게 하라”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말라” “칭찬과 동시에 부탁하지 말라” “여러 사람에게 같은 칭찬을 되풀이하지 말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 등을 들었다.
다 좋은 말이지만, 아부의 기술이 미국보다 더 발달한 한국에선 한 차원 더 높게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다.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는 ‘기술’이 아니라 기본 조건이다. 인터넷 덕분에 이젠 아부가 주로 공론장에서 행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정교한 이론과 실무가 필요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아부의 정석’은 다음 10가지다.
모든 의견에 무조건 끄덕끄덕하라
첫째, 명분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라. 이건 그냥 “그럴듯하게 하라”는 말과 비슷한 것 같지만,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이다. 한국인은 명분에 약하다. 자신이 아부를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반드시 거창한 명분과 연결해야 한다.
둘째, 신선하게 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않는 걸로는 부족하다.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독창성을 발휘해야 한다. 궤변이라도 파격적인 이설(異說)을 제시하는 아부가 평범한 아부보다 훨씬 더 큰 파괴력이 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한다.
셋째,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는 한국에선 안 통한다. 아부꾼들 사이에도 경쟁이 있기 때문에 보스의 머릿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려면 무조건 동의하는 건 필수다.
넷째, 거대하고 흉악한 적을 창출하라. 보스에 대한 아부를 적에 대한 증오의 그늘에 가려지게 할 수 있는 동시에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최일선에서 그 적과 싸우는 ‘투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면 적어도 보스에 대한 아부로 인해 욕먹을 일은 없다.
다섯째, 보스를 불쌍하게 보이도록 만들어라. 아주 훌륭한 분인데 그 진면목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고 슬픈 표정을 지어라. 이건 아부 효과와 더불어 자신이 보스를 잘 아는 ‘실세’라는 효과를 내는 일석이조(一石二鳥)다.
여섯째, 당당하게 호통치면서 아부하라. 이른바 적반하장(賊反荷杖) 수법이다. 보스를 미화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말고 보스에 대한 비판도 박살내는 호전성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너무도 당당한 자세에 압도돼 그건 아부가 아니라 소신과 양심의 표현일 거라고 믿게 된다.
일곱째, 자신이 아부로 얻은 걸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사람들은 아부꾼의 당당한 자세에 압도되다가도 어느 순간 아부꾼이 아부로 큰 이익을 취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해체하기 위해 자신은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무소유’ 정신의 화신인 양 쇼를 할 필요가 있다.
여덟째, 보스를 ‘싸가지’ 없게 평가하는 쇼맨십을 발휘하라. 기질상 결코 아부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만천하에 과시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아부의 효과도 높아진다. 물론 이 수법은 그런 정도는 암묵적 이해를 해줄 수 있을 정도로 보스의 신뢰를 얻은 다음에 구사해야 한다.
아홉째, 자신도 괴롭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아무리 쇼를 잘해도 아부에 대한 비판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 비판에 과장되게 반응하면서, 왜 자신의 진정성을 이리도 몰라주는지 안타깝고 서글프다고 징징 우는 소리를 하라. 역사가 알아줄지 모르겠다는 등 헛소리를 해대는 것도 좋겠다.
열째, 자신에게도 아부하는 사람들을 키워라. 이는 아부의 힘을 증강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부에 대한 비판을 원천봉쇄하는 효과를 낳는다. 비판자들이 아부꾼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의 집단공격이 무서워 아부꾼을 비판하는 걸 삼가게 된다는 것이다. 명심하라. 아부의 순간은 쓸망정 그 열매는 달고 영원하다.
선거 뒤엔 ‘조폭 공동체 의식’
혹 이야기가 너무 심각해질까봐 잠시 좀 웃자고 과장되게 표현했지만, 이상에서 말한 ‘아부의 정석’은 한국 정치에 자기교정 능력이 없는 이유를 시사해주기엔 족하다. 전 사회 영역에 걸쳐 ‘보스 1극 권력집중 체제’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아부는 생존과 성장의 필수이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러한 아부에 면역돼 있다. 정치 분야에선 상대편 내부의 아부엔 혐오를 드러내지만, 우리 편 내부의 아부엔 열광한다.
왜 그런 정신상태가 가능한가? 무슨 선거든 선거판 현장을 수일간 체험학습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정치는 고립돼 있는 ‘섬’과 같다. 어깨띠를 두르고 시장을 돌아다녀보라. 악수를 자주 거절당하는 건 기본이고 등에 대고 욕하는 소리마저 쉽게 들을 수 있다.
유권자는 냉담하다 못해 살벌하고, 언론은 사사건건 흠만 잡아내 보도하려고 발버둥친다. 경쟁자들은 온갖 인신공격에 흑색선전까지 마다하지 않으니, 이쪽도 앉아서 당할 순 없어 같은 수법으로 맞받아쳐야 한다. 이거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선거에 출마한 적이 없다면 감히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명언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말이지 후보들은 보기에 불쌍하다. 충성할 참모진 구성하랴, 선거자금 마련하랴, 유권자들의 냉대에도 미소 지으랴, 존경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후보들은 당선된 뒤에 유권자들에게 복수한다. 자신을 위해 충성한 사람들에게 ‘낙하산’을 태워주고, 돈 댄 사람들에게 들통나지 않게 특혜를 주고, 자신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한다. 이른바 ‘조폭 공동체 의식’이다. 이 의식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아부’란 단어는 아예 없다. 조직원이 보스에게 무조건 충성과 찬양을 바치는 건 아부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본질이다.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는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고위 공직은 개인적인 ‘코리안드림’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쟁탈해야 할 이권이요, 비즈니스가 된다. 물론 이는 ‘줄서기’와 지도자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이유가 된다.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떤 고난을 겪고 희생을 했는지 알아?” 하는 마음이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오고, 이게 또 정치혐오를 낳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한국 정치는 복수혈전이다. 우리는 고위 공직자들에게 공복(公僕)이 될 걸 요구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과연 그런 요구를 할 자격이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특히 ‘바람 정치’가 문제다. 유권자들이 바람에 휩쓸리는 건 일시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도 있지만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정치 발전엔 치명적이다. 바람만 잘 타면, 바람이 부는 쪽으로 줄만 잘 서면, 길 가다 금배지를 주울 수도 있는 풍토는 유권자들이 만든 것이지 정치인들이 만든 게 아니다. 유권자들이 그렇게 해놓고선 정치인들의 줄서기를 비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그 어떤 바람에 휩쓸리더라도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을 평가해 옥석을 구분해주는 정도의 성의를 보이면 모르겠는데, 그것마저 없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평소 ‘개판’을 쳤더라도 바람과 줄만 잘 타면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공할 수도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누가 ‘줄서기’를 두려워하겠는가? 정당을 장난감처럼 여겨 깨부수고 다시 만들고 또 깨부수고 다시 만드는 작태를 삼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바람정치’의 좋은 점이라는 것도 반독재 투쟁 시절에나 의미가 있었지만, 아직도 그 습속은 계속되고 있다. 반감을 토대로 삼은 ‘역바람정치’도 ‘바람정치’의 일종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지도자 추종주의다. 지도자 추종주의가 계속되는 한,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길이 없다. 한국 정치가 ‘기대와 환멸’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다는 진단은 바로 지도자 추종주의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란 국민 뜯어먹기’라는 역발상
그럼에도 시민사회의 모든 담론은 정치인만 욕하고 유권자들의 성찰을 촉구하는 건 전무하다. 물론 유권자들이 그러는 건 역사와 구조의 그 어떤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보자면 정치인들에겐 면책 사유가 없겠는가? 정치인 못지않게 유권자들도 성찰의 주체가 되어 마땅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의 복수’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역설 같지만, 발상의 전환도 해봄직하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냉소와 혐오를 보내는 이유는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교과서적 원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 전제를 믿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연연해하는가?
반대로 정치란 원래 ‘국민 뜯어먹기’를 주업으로 삼는 고등 사기 행위라는 걸 전제로 삼아보자. 개혁을 내세운 집단들도 반개혁 세력과의 대치 국면을 조성해 ‘증오의 마케팅’ 공세로 자기들이 누리는 기득권과 특권을 계속 독식하려는 사기꾼에 불과하며, 한국엔 여야가 아니라 ‘엘리트 대 비엘리트’ 또는 ‘출세한 사람 대 출세하지 못한 사람’의 구도만 있을 뿐이라는 신념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그런 자세를 가지면 한국 정치에도 아름다운 사람과 장면이 많다는 데 주목하면서 정치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
좀더 현실적인 수준에서 대안을 모색해보자면, 정치 외풍에서 자유로운 ‘중립지대’를 늘려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각급 지도자의 인사·예산권의 상당 부분을 시민사회의 자율체제로 돌려 정치의 영향력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있겠지만, 그건 한국 시민사회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니 인내를 갖고 하나씩 고쳐나가는 게 옳다. ‘정치의 복수’를 피해보고 싶은 마음에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펴보긴 했지만, 어디까지 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출처: 한겨레21 [원본]
아부에 면역되면 자기교정 능력 없어져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따져보자고 한다. 좋은 일이지만 더 시급한 게 있다.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어떻게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가? 이게 가장 중요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 김영삼·김대중 정권의 말기가 비참했던 것도 바로 이런 문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그런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
한나라당의 내분이 실감나게 보여준 건 ‘줄서기’와 ‘줄세우기’였다. 한나라당 집권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지도자의 오류를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이는 한나라당만의 문제도 아니고 역대 정권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 정치의 문제다. 대통령제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더욱 근원적인 것이다.
△ 한국 정치가 지도자의 오류를 통제할 수 없는 근본적 원인 중 하나가 아부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무회의에 앞서 넥타이를 매지 않고 나오면, 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공무원이 따라한다.(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당파성’에 대한 엄청난 착각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 동시에 그 힘을 숭배하는 이중성을 잠시 접고, 정치를 정직하게 바라보자. 아니 우리 자신부터 보자. 우리는 공정성에 대단히 취약하거나 서투른 사람들이다. ‘호감’과 ‘반감’이 공정성을 먹어버린다. 공정한 규칙은 모든 집단에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이 진술에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걸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지지하는 집단엔 관대한 반면, 내가 반대하는 집단엔 엄격하다. 이걸 ‘당파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정성이 없거나 약하니, 사회적 갈등은 합리적 해소의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늘 문자 그대로 이전투구(泥田鬪狗)로 갈 수밖에 없다. 이미 갈라진 편의 대세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조율하거나 바꾸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는 자기 편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똑같은 짓이라도 상대편이 하면 타도해야 할 반민주적 작태지만, 우리 편이 하면 개혁을 위한 불가피성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되면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지도자의 비위를 맞추려는 아부꾼만 난무하게 된다. 아무리 같은 편이라도 아부를 지적해 비판할 수 있을 정도의 긴장이 그 집단 내에 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부, 이거 의외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한국 정치의 급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시절 주변의 아부꾼들에 의해 ‘세기의 태양’ ‘구국의 태양’ ‘인류의 등대’ ‘현대의 성자’ 등으로 극찬됐다. 우리는 지금 그걸 보고 어이없어하며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진보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우리는 ‘태양’ ‘등대’ ‘성자’ 같은 언어 구사의 촌스러움에 대해 웃는 것이지, 아부 자체를 멀리할 정도로 진보하진 않았다.
미국 언론인 리처드 스텐겔은 <아부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아부의 정석’으로 “그럴듯하게 하라”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말라” “칭찬과 동시에 부탁하지 말라” “여러 사람에게 같은 칭찬을 되풀이하지 말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 등을 들었다.
다 좋은 말이지만, 아부의 기술이 미국보다 더 발달한 한국에선 한 차원 더 높게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다.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는 ‘기술’이 아니라 기본 조건이다. 인터넷 덕분에 이젠 아부가 주로 공론장에서 행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정교한 이론과 실무가 필요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아부의 정석’은 다음 10가지다.
모든 의견에 무조건 끄덕끄덕하라
첫째, 명분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라. 이건 그냥 “그럴듯하게 하라”는 말과 비슷한 것 같지만,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이다. 한국인은 명분에 약하다. 자신이 아부를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반드시 거창한 명분과 연결해야 한다.
둘째, 신선하게 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않는 걸로는 부족하다.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독창성을 발휘해야 한다. 궤변이라도 파격적인 이설(異說)을 제시하는 아부가 평범한 아부보다 훨씬 더 큰 파괴력이 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한다.
셋째,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는 한국에선 안 통한다. 아부꾼들 사이에도 경쟁이 있기 때문에 보스의 머릿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려면 무조건 동의하는 건 필수다.
넷째, 거대하고 흉악한 적을 창출하라. 보스에 대한 아부를 적에 대한 증오의 그늘에 가려지게 할 수 있는 동시에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최일선에서 그 적과 싸우는 ‘투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면 적어도 보스에 대한 아부로 인해 욕먹을 일은 없다.
다섯째, 보스를 불쌍하게 보이도록 만들어라. 아주 훌륭한 분인데 그 진면목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고 슬픈 표정을 지어라. 이건 아부 효과와 더불어 자신이 보스를 잘 아는 ‘실세’라는 효과를 내는 일석이조(一石二鳥)다.
여섯째, 당당하게 호통치면서 아부하라. 이른바 적반하장(賊反荷杖) 수법이다. 보스를 미화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말고 보스에 대한 비판도 박살내는 호전성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너무도 당당한 자세에 압도돼 그건 아부가 아니라 소신과 양심의 표현일 거라고 믿게 된다.
일곱째, 자신이 아부로 얻은 걸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사람들은 아부꾼의 당당한 자세에 압도되다가도 어느 순간 아부꾼이 아부로 큰 이익을 취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해체하기 위해 자신은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무소유’ 정신의 화신인 양 쇼를 할 필요가 있다.
여덟째, 보스를 ‘싸가지’ 없게 평가하는 쇼맨십을 발휘하라. 기질상 결코 아부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만천하에 과시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아부의 효과도 높아진다. 물론 이 수법은 그런 정도는 암묵적 이해를 해줄 수 있을 정도로 보스의 신뢰를 얻은 다음에 구사해야 한다.
△ 유권자의 무관심은 자랑이 아니다.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온다. 정치인들이 선거철 시장에 들러 유권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아홉째, 자신도 괴롭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아무리 쇼를 잘해도 아부에 대한 비판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 비판에 과장되게 반응하면서, 왜 자신의 진정성을 이리도 몰라주는지 안타깝고 서글프다고 징징 우는 소리를 하라. 역사가 알아줄지 모르겠다는 등 헛소리를 해대는 것도 좋겠다.
열째, 자신에게도 아부하는 사람들을 키워라. 이는 아부의 힘을 증강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부에 대한 비판을 원천봉쇄하는 효과를 낳는다. 비판자들이 아부꾼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의 집단공격이 무서워 아부꾼을 비판하는 걸 삼가게 된다는 것이다. 명심하라. 아부의 순간은 쓸망정 그 열매는 달고 영원하다.
선거 뒤엔 ‘조폭 공동체 의식’
혹 이야기가 너무 심각해질까봐 잠시 좀 웃자고 과장되게 표현했지만, 이상에서 말한 ‘아부의 정석’은 한국 정치에 자기교정 능력이 없는 이유를 시사해주기엔 족하다. 전 사회 영역에 걸쳐 ‘보스 1극 권력집중 체제’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아부는 생존과 성장의 필수이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러한 아부에 면역돼 있다. 정치 분야에선 상대편 내부의 아부엔 혐오를 드러내지만, 우리 편 내부의 아부엔 열광한다.
왜 그런 정신상태가 가능한가? 무슨 선거든 선거판 현장을 수일간 체험학습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정치는 고립돼 있는 ‘섬’과 같다. 어깨띠를 두르고 시장을 돌아다녀보라. 악수를 자주 거절당하는 건 기본이고 등에 대고 욕하는 소리마저 쉽게 들을 수 있다.
유권자는 냉담하다 못해 살벌하고, 언론은 사사건건 흠만 잡아내 보도하려고 발버둥친다. 경쟁자들은 온갖 인신공격에 흑색선전까지 마다하지 않으니, 이쪽도 앉아서 당할 순 없어 같은 수법으로 맞받아쳐야 한다. 이거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선거에 출마한 적이 없다면 감히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명언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말이지 후보들은 보기에 불쌍하다. 충성할 참모진 구성하랴, 선거자금 마련하랴, 유권자들의 냉대에도 미소 지으랴, 존경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후보들은 당선된 뒤에 유권자들에게 복수한다. 자신을 위해 충성한 사람들에게 ‘낙하산’을 태워주고, 돈 댄 사람들에게 들통나지 않게 특혜를 주고, 자신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한다. 이른바 ‘조폭 공동체 의식’이다. 이 의식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아부’란 단어는 아예 없다. 조직원이 보스에게 무조건 충성과 찬양을 바치는 건 아부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본질이다.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는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고위 공직은 개인적인 ‘코리안드림’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쟁탈해야 할 이권이요, 비즈니스가 된다. 물론 이는 ‘줄서기’와 지도자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이유가 된다.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떤 고난을 겪고 희생을 했는지 알아?” 하는 마음이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오고, 이게 또 정치혐오를 낳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한국 정치는 복수혈전이다. 우리는 고위 공직자들에게 공복(公僕)이 될 걸 요구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과연 그런 요구를 할 자격이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특히 ‘바람 정치’가 문제다. 유권자들이 바람에 휩쓸리는 건 일시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도 있지만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정치 발전엔 치명적이다. 바람만 잘 타면, 바람이 부는 쪽으로 줄만 잘 서면, 길 가다 금배지를 주울 수도 있는 풍토는 유권자들이 만든 것이지 정치인들이 만든 게 아니다. 유권자들이 그렇게 해놓고선 정치인들의 줄서기를 비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그 어떤 바람에 휩쓸리더라도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을 평가해 옥석을 구분해주는 정도의 성의를 보이면 모르겠는데, 그것마저 없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평소 ‘개판’을 쳤더라도 바람과 줄만 잘 타면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공할 수도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누가 ‘줄서기’를 두려워하겠는가? 정당을 장난감처럼 여겨 깨부수고 다시 만들고 또 깨부수고 다시 만드는 작태를 삼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바람정치’의 좋은 점이라는 것도 반독재 투쟁 시절에나 의미가 있었지만, 아직도 그 습속은 계속되고 있다. 반감을 토대로 삼은 ‘역바람정치’도 ‘바람정치’의 일종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지도자 추종주의다. 지도자 추종주의가 계속되는 한,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길이 없다. 한국 정치가 ‘기대와 환멸’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다는 진단은 바로 지도자 추종주의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란 국민 뜯어먹기’라는 역발상
그럼에도 시민사회의 모든 담론은 정치인만 욕하고 유권자들의 성찰을 촉구하는 건 전무하다. 물론 유권자들이 그러는 건 역사와 구조의 그 어떤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보자면 정치인들에겐 면책 사유가 없겠는가? 정치인 못지않게 유권자들도 성찰의 주체가 되어 마땅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의 복수’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역설 같지만, 발상의 전환도 해봄직하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냉소와 혐오를 보내는 이유는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교과서적 원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 전제를 믿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연연해하는가?
반대로 정치란 원래 ‘국민 뜯어먹기’를 주업으로 삼는 고등 사기 행위라는 걸 전제로 삼아보자. 개혁을 내세운 집단들도 반개혁 세력과의 대치 국면을 조성해 ‘증오의 마케팅’ 공세로 자기들이 누리는 기득권과 특권을 계속 독식하려는 사기꾼에 불과하며, 한국엔 여야가 아니라 ‘엘리트 대 비엘리트’ 또는 ‘출세한 사람 대 출세하지 못한 사람’의 구도만 있을 뿐이라는 신념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그런 자세를 가지면 한국 정치에도 아름다운 사람과 장면이 많다는 데 주목하면서 정치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
좀더 현실적인 수준에서 대안을 모색해보자면, 정치 외풍에서 자유로운 ‘중립지대’를 늘려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각급 지도자의 인사·예산권의 상당 부분을 시민사회의 자율체제로 돌려 정치의 영향력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있겠지만, 그건 한국 시민사회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니 인내를 갖고 하나씩 고쳐나가는 게 옳다. ‘정치의 복수’를 피해보고 싶은 마음에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펴보긴 했지만, 어디까지 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출처: 한겨레21 [원본]
2007년 6월 23일 토요일
동양에서의 왕조 교체의 이유
[종횡무진 한국사 (하) pp. 35]
농경문명을 중심으로하는 동양적 왕조가 일정한 패턴을 가지며 계속적으로 교체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토지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위해서는 기존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해야 하는데, 그를 위해서는 왕조의 교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체된 토지제도가 그 효력을 발휘하는 동안에는 왕조도 잘 나가다가, 그 효력이 다하는 중기 무렵에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그 영향이 정치에 영향을 미칠 때 왕조가 교체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예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분석 중의 하나인 것 같다.
농경문명을 중심으로하는 동양적 왕조가 일정한 패턴을 가지며 계속적으로 교체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토지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위해서는 기존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해야 하는데, 그를 위해서는 왕조의 교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체된 토지제도가 그 효력을 발휘하는 동안에는 왕조도 잘 나가다가, 그 효력이 다하는 중기 무렵에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그 영향이 정치에 영향을 미칠 때 왕조가 교체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예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분석 중의 하나인 것 같다.
2007년 6월 21일 목요일
국보법은 미국 가면 돌 맞는다
[한겨레] 수정헌법 제1조를 통해 본 국가보안법의 후진성…
“모든 정치적 의견은 토론의 시장에서 정화된다”
▣ 노트러데임(미국)=박용현/ 한겨레 편집부 기자 piao@hani.co.kr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싼 법리 논쟁이 갈수록 볼만하다. 외국에서 바라보니 더욱 그렇고, 미국 로스쿨에서 법의 잣대를 들고 보자니 더더욱 그렇다. 그 점입가경의 극치는 역시 ‘광화문 인공기’나 ‘주체사상연구소’식의 자극성 상황 설정과,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이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는 호들갑이다.
알카에다도 의견 낼 수 있어
미국 인디애나주 노트러데임대학 로스쿨 교수인 리처드 가넷에게 이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하찮은 논란에 불과한 듯했다. 그는 “미국엔 특정 이념을 선전•선동하거나 적국을 찬양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표현•언론•집회의 자유 등을 규정한 수정헌법 제1조는 일개 헌법 조항인데도 독자적인 법 과목을 이룰 정도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 수정헌법 제1조 아래에선, 9•11 동시다발 테러의 참혹한 악몽에도 불구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거나 알카에다에 단순 가입하는 사람조차 처벌할 수 없다는 게 가넷 교수의 설명이다. “현행법에서는 테러단체를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행위에 이르러서야 처벌이 가능합니다.” 이는 이론상의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 이슬람교도들을 향해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미국인을 살해하라”고 지시하는 빈 라덴의 ‘세계이슬람전선 성명’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녀도 이를 문제 삼은 적이 없다. 인권단체와 일부 로스쿨 교수들은 ‘물질적 지원 금지’에 대해 “테러단체로 지목된 단체들도 각종 합법적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만큼 일괄적으로 기부나 원조 행위를 금지해선 안 된다”며 이마저도 지나친 규제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달 초 미국 캔자스주 항소법원에서는 테러에 대한 공포와 개인의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는 미국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판결이 있었다. 평소 빈 라덴을 찬양하고 “미국인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한 이란인 노동자가 9•11 1주년 직후 미국인 동료들에게 “닷새 뒤 미국 전역에 테러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미국을 비판하고 빈 라덴에 대한 지지를 밝힐 권리는 그야말로 보호된다”며 “그러나 마치 임박한 테러에 자신도 가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로써 여성 동료가 불안해서 울 정도로 만든 것은 정치적 의견 표명이 아닌 폭언에 해당한다”고 유죄 이유를 밝혔다. 재판의 초점은 ‘말의 내용이나 관점’이 아니었다. 이 이란인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 판결은 9•11 이후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테러 공포증의 민감도를 말해주는 한편, 그럼에도 정치적 의견의 표명에 그치는 한 어떤 말도 법적인 제재를 받지 않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9 11 이후 미국 정부는 이른바 ‘애국자법’을 통해 테러수사 기관에 지나친 정보 수집 권한을 줌으로써 개인의 사생활을 위협하는가 하면 아랍계 외국인에 대한 차별 강화, 테러 용의자의 변호인 접견권 불허 등으로 인권 상황을 급속히 악화시켜왔다. 이란•콩고•파키스탄 등과 더불어 미성년자까지 사형에 처하는 8개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은 사실 인권에 관한 한 선진국으로 볼 수도 없다.
브란덴버그 기준… 정부 협박한 KKK 인정
그러나 9•11 이후에도 의견과 그 표현을 처벌하는 법만은 만들지 않고 있다. 이는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처벌해야 할 표현의 범위에 대해 확고한 법적 기준을 형성해왔고, 이 기준을 넘어 법을 만들 경우 연방대법원에 의해 위헌으로 판명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중 국내에도 잘 알려진 것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기준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 대상자들에게 징집 거부를 촉구하는 우편물을 발송한 혐의로 미국 사회당 사무총장이 기소된 사건에서 홈즈 연방대법관은 “어떤 의견 표현이 행해지는 상황이나 그 성질로 보아 실질적인 해악을 가져올 것이라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발생하느냐 여부”를 처벌 기준으로 제시했다.
이 기준은 국내에서도 국가보안법 사건 변호인들에 의해 종종 인용되곤 한다. 국가보안법에 걸리면 명백한 위험을 일으키지 않는 행위도 처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행위조차 처벌해야 한다고 보는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이 이 기준을 받아들일 리 없다. 이들은 거의 1세기 전, 그것도 전쟁의 와중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이 그려놓은 표현의 한계선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기준은 이후 홈즈 대법관을 표현의 자유의 대명사로 만들면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보호막이 되지는 못했다. 1950년대 매카시즘에 휩쓸려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소된 이들에게 대대적인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미국 법원은 다시 표현의 자유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69년에 나온 브란덴버그 사건 판결이다. 무장한 KKK(극우 백인단체) 단원들이 모여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정부 요인에 대한 보복도 불사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집회를 다룬 이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비록 폭력이나 불법적인 수단의 사용을 옹호하는 말일지라도, 즉각적인 불법 행위를 선동해서 그런 사태가 실제로 벌어질 만한 상황이 아닌 한 금지돼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이 정도 기준에 이르면, 한총련을 비롯한 국내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거의 대부분 무죄로 기울 게 분명하다.
예를 들어 폭력에 의한 정부의 전복을 주장하더라도 이른 시일 안에 봉기에 나설 것을 선동하고 그런 결과가 곧 예견되지 않는 한 그런 주장은 허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사상의 자유 시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토론할 시간적 여유만 주어진다면 위험한 생각도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충분히 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질서는 처벌의 공포만으로 지켜지지 않으며, 사회의 안전으로 가는 길은 불만과 대안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의 기회 속에 놓여 있다”라는 게 연방대법원의 철학이다.
브란덴버그 기준은 이후 베트남전 당시의 반전시위 사건을 비롯해 모든 불법 행위 선동 사건의 처벌 기준으로 확고히 유지돼오고 있으며, 수정헌법 제1조 교과서에서 첫 판례로 소개하고 있다.
미국 역사에서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과도하게 침해받아왔는지를 연구한 책 <위험한 시대>를 이달 출간한 조프리 스톤 시카고대학 로스쿨 교수는 “브란덴버그 기준이야말로 의견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기 위해 우리가 감내해야 할 최대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는 “반대쪽 의견에 대해 관용하고 자문해보는 태도를 버린다면, 우리는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싸우는 꼴이 될 것”이라면서 “미국 법원은 과거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었고, 앞으로는 안보상 필요성에 따른 표현의 자유 제한을 더욱더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9 11 테러도 ‘표현의 자유’ 꺾지 못해
미국 내에는 이런 기준을 달갑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다수 여론은 굳건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표현의 자유 침해를 감시하는 시민단체인 퍼스트어멘드먼트센터가 내놓은 올해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 보장이 지나치다”는 대답은 조사 대상자 1002명 중 30%에 그친 반면 65%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9•11 테러의 충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2년 전 조사에서도 안보를 위해 표현의 자유를 더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은 과반을 넘지 못했다.
다시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국가보안법 존치론자들은 안보 불안 심리를 부추기느라 여념이 없고 반대편에선 법을 고쳐도 처벌할 건 다 처벌할 수 있다는 논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침해해온 권리는 무엇이고 앞으로 이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는 정작 전면에 떠오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법원을 비롯한 법조계에서는 형법 대체안의 처벌 기준이 모호하고 또 다른 남용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법이 바뀐 뒤에도 죄명만 바뀐 채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여전히 구속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기준을 찾는 적극적인 논의가 시급한 시점이다.
어쩌면 이는 민주주의의 원형을 회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도 ‘이세고리아’라는 표현의 자유 개념이 확고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이세고리아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체제의 근본적 차이는 아테네에서는 스파르타 체제를 찬양할 자유가 있지만, 스파르타에서는 스파르타 이외의 체제를 찬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2300년이 지난 시대에 살고 있다.
유럽, 아시아, 전세계 어디서나… ‘브란덴버그 기준’ 수준의 표현의 자유 보장이 미국만의 것은 아니다. 지난 1995년 국제법 전문가들이 국가 안보와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면밀히 논의한 결과 채택한 ‘요하네스버그 원칙’도 그와 비슷한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 원칙은 이후 유엔의 공인을 받았다.
이 원칙 제1조는 국가 안보의 필요성에 따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더라도 △그 표현이 심각한 위협을 줄 때 △국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제한만 가해야 하며 △그 제한은 민주적인 원칙에 부합해야 한다는 전제를 규정하고 있다. 특히 표현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선 그 표현이 △즉각적인 불법 행위 선동을 의도했고 △그런 불법 행위를 유발할 것 같으며 △그 표현과 불법 행위의 발생 가능성 사이에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세 가지 사실을 정부가 증명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이런 기준은 단지 이론적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많은 나라에서 이미 법적인 원칙으로 자리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선진국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인도 대법원은 이미 지난 1989년 제한할 수 있는 표현의 범위를 이렇게 판시했다. “표현 행위가 유발할 것으로 예상되는 위험이 시간적으로 먼 일이거나 단지 추측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그 표현과 직접적이고 근접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마치 화약통 속의 스파크처럼, 의도하는 행위를 일으킬 만한 표현이어야 한다.” 나이지리아 대법원의 1983년 판결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폭력에 의한 체제 전복 선동으로부터 우리의 공동체를 지킬 중요성이 커질수록,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 또한 더욱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야만 정부가 국민의 뜻에 책임을 지는 것이고 국민이 바라는 변화를 평화적으로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이 가입해 있는 유럽인권재판소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사건이 자주 다뤄지는데, 역시 엄격한 잣대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고 있다.
쿠르드족이 무장투쟁 등 강력한 분리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는 터키에서, 지난 1989년 정부의 쿠르드족 탄압 중단과 쿠르드족의 자유 의지에 근거한 평화적 해결 등을 주장하며 창당된 공산당이 그 강령을 이유로 해산 명령을 받았다. 공산당 지도자들이 터키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정당의 활동이 헌법적 체제를 훼손한다는 정부의 판단만으로는 결사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 특히 정당은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의 작동을 보장하는 데 본질적 역할을 하는 만큼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더욱 보호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터키 영토의 일부를 쿠르드족의 땅으로 지칭하며 쿠르드노동자당의 무장 활동을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처벌당한 언론인의 제소에 대해서도 이 재판소는 “개인의 의견을 주장했을 뿐이고 즉각 무장저항에 나서도록 설득하려 한 의도도 없는 만큼, 이 기사는 쿠르드족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언론의 자유와 정보 접근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출처: 한겨레21 200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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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치적 의견은 토론의 시장에서 정화된다”
▣ 노트러데임(미국)=박용현/ 한겨레 편집부 기자 piao@hani.co.kr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싼 법리 논쟁이 갈수록 볼만하다. 외국에서 바라보니 더욱 그렇고, 미국 로스쿨에서 법의 잣대를 들고 보자니 더더욱 그렇다. 그 점입가경의 극치는 역시 ‘광화문 인공기’나 ‘주체사상연구소’식의 자극성 상황 설정과,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이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는 호들갑이다.
알카에다도 의견 낼 수 있어
미국 인디애나주 노트러데임대학 로스쿨 교수인 리처드 가넷에게 이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하찮은 논란에 불과한 듯했다. 그는 “미국엔 특정 이념을 선전•선동하거나 적국을 찬양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표현•언론•집회의 자유 등을 규정한 수정헌법 제1조는 일개 헌법 조항인데도 독자적인 법 과목을 이룰 정도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 수정헌법 제1조 아래에선, 9•11 동시다발 테러의 참혹한 악몽에도 불구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거나 알카에다에 단순 가입하는 사람조차 처벌할 수 없다는 게 가넷 교수의 설명이다. “현행법에서는 테러단체를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행위에 이르러서야 처벌이 가능합니다.” 이는 이론상의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 이슬람교도들을 향해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미국인을 살해하라”고 지시하는 빈 라덴의 ‘세계이슬람전선 성명’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녀도 이를 문제 삼은 적이 없다. 인권단체와 일부 로스쿨 교수들은 ‘물질적 지원 금지’에 대해 “테러단체로 지목된 단체들도 각종 합법적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만큼 일괄적으로 기부나 원조 행위를 금지해선 안 된다”며 이마저도 지나친 규제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달 초 미국 캔자스주 항소법원에서는 테러에 대한 공포와 개인의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는 미국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판결이 있었다. 평소 빈 라덴을 찬양하고 “미국인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한 이란인 노동자가 9•11 1주년 직후 미국인 동료들에게 “닷새 뒤 미국 전역에 테러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미국을 비판하고 빈 라덴에 대한 지지를 밝힐 권리는 그야말로 보호된다”며 “그러나 마치 임박한 테러에 자신도 가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로써 여성 동료가 불안해서 울 정도로 만든 것은 정치적 의견 표명이 아닌 폭언에 해당한다”고 유죄 이유를 밝혔다. 재판의 초점은 ‘말의 내용이나 관점’이 아니었다. 이 이란인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 판결은 9•11 이후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테러 공포증의 민감도를 말해주는 한편, 그럼에도 정치적 의견의 표명에 그치는 한 어떤 말도 법적인 제재를 받지 않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9 11 이후 미국 정부는 이른바 ‘애국자법’을 통해 테러수사 기관에 지나친 정보 수집 권한을 줌으로써 개인의 사생활을 위협하는가 하면 아랍계 외국인에 대한 차별 강화, 테러 용의자의 변호인 접견권 불허 등으로 인권 상황을 급속히 악화시켜왔다. 이란•콩고•파키스탄 등과 더불어 미성년자까지 사형에 처하는 8개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은 사실 인권에 관한 한 선진국으로 볼 수도 없다.
브란덴버그 기준… 정부 협박한 KKK 인정
그러나 9•11 이후에도 의견과 그 표현을 처벌하는 법만은 만들지 않고 있다. 이는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처벌해야 할 표현의 범위에 대해 확고한 법적 기준을 형성해왔고, 이 기준을 넘어 법을 만들 경우 연방대법원에 의해 위헌으로 판명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중 국내에도 잘 알려진 것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기준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 대상자들에게 징집 거부를 촉구하는 우편물을 발송한 혐의로 미국 사회당 사무총장이 기소된 사건에서 홈즈 연방대법관은 “어떤 의견 표현이 행해지는 상황이나 그 성질로 보아 실질적인 해악을 가져올 것이라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발생하느냐 여부”를 처벌 기준으로 제시했다.
이 기준은 국내에서도 국가보안법 사건 변호인들에 의해 종종 인용되곤 한다. 국가보안법에 걸리면 명백한 위험을 일으키지 않는 행위도 처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행위조차 처벌해야 한다고 보는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이 이 기준을 받아들일 리 없다. 이들은 거의 1세기 전, 그것도 전쟁의 와중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이 그려놓은 표현의 한계선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기준은 이후 홈즈 대법관을 표현의 자유의 대명사로 만들면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보호막이 되지는 못했다. 1950년대 매카시즘에 휩쓸려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소된 이들에게 대대적인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미국 법원은 다시 표현의 자유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69년에 나온 브란덴버그 사건 판결이다. 무장한 KKK(극우 백인단체) 단원들이 모여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정부 요인에 대한 보복도 불사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집회를 다룬 이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비록 폭력이나 불법적인 수단의 사용을 옹호하는 말일지라도, 즉각적인 불법 행위를 선동해서 그런 사태가 실제로 벌어질 만한 상황이 아닌 한 금지돼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이 정도 기준에 이르면, 한총련을 비롯한 국내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거의 대부분 무죄로 기울 게 분명하다.
예를 들어 폭력에 의한 정부의 전복을 주장하더라도 이른 시일 안에 봉기에 나설 것을 선동하고 그런 결과가 곧 예견되지 않는 한 그런 주장은 허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사상의 자유 시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토론할 시간적 여유만 주어진다면 위험한 생각도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충분히 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질서는 처벌의 공포만으로 지켜지지 않으며, 사회의 안전으로 가는 길은 불만과 대안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의 기회 속에 놓여 있다”라는 게 연방대법원의 철학이다.
브란덴버그 기준은 이후 베트남전 당시의 반전시위 사건을 비롯해 모든 불법 행위 선동 사건의 처벌 기준으로 확고히 유지돼오고 있으며, 수정헌법 제1조 교과서에서 첫 판례로 소개하고 있다.
미국 역사에서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과도하게 침해받아왔는지를 연구한 책 <위험한 시대>를 이달 출간한 조프리 스톤 시카고대학 로스쿨 교수는 “브란덴버그 기준이야말로 의견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기 위해 우리가 감내해야 할 최대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는 “반대쪽 의견에 대해 관용하고 자문해보는 태도를 버린다면, 우리는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싸우는 꼴이 될 것”이라면서 “미국 법원은 과거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었고, 앞으로는 안보상 필요성에 따른 표현의 자유 제한을 더욱더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9 11 테러도 ‘표현의 자유’ 꺾지 못해
미국 내에는 이런 기준을 달갑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다수 여론은 굳건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표현의 자유 침해를 감시하는 시민단체인 퍼스트어멘드먼트센터가 내놓은 올해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 보장이 지나치다”는 대답은 조사 대상자 1002명 중 30%에 그친 반면 65%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9•11 테러의 충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2년 전 조사에서도 안보를 위해 표현의 자유를 더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은 과반을 넘지 못했다.
다시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국가보안법 존치론자들은 안보 불안 심리를 부추기느라 여념이 없고 반대편에선 법을 고쳐도 처벌할 건 다 처벌할 수 있다는 논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침해해온 권리는 무엇이고 앞으로 이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는 정작 전면에 떠오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법원을 비롯한 법조계에서는 형법 대체안의 처벌 기준이 모호하고 또 다른 남용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법이 바뀐 뒤에도 죄명만 바뀐 채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여전히 구속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기준을 찾는 적극적인 논의가 시급한 시점이다.
어쩌면 이는 민주주의의 원형을 회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도 ‘이세고리아’라는 표현의 자유 개념이 확고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이세고리아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체제의 근본적 차이는 아테네에서는 스파르타 체제를 찬양할 자유가 있지만, 스파르타에서는 스파르타 이외의 체제를 찬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2300년이 지난 시대에 살고 있다.
유럽, 아시아, 전세계 어디서나… ‘브란덴버그 기준’ 수준의 표현의 자유 보장이 미국만의 것은 아니다. 지난 1995년 국제법 전문가들이 국가 안보와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면밀히 논의한 결과 채택한 ‘요하네스버그 원칙’도 그와 비슷한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 원칙은 이후 유엔의 공인을 받았다.
이 원칙 제1조는 국가 안보의 필요성에 따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더라도 △그 표현이 심각한 위협을 줄 때 △국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제한만 가해야 하며 △그 제한은 민주적인 원칙에 부합해야 한다는 전제를 규정하고 있다. 특히 표현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선 그 표현이 △즉각적인 불법 행위 선동을 의도했고 △그런 불법 행위를 유발할 것 같으며 △그 표현과 불법 행위의 발생 가능성 사이에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세 가지 사실을 정부가 증명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이런 기준은 단지 이론적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많은 나라에서 이미 법적인 원칙으로 자리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선진국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인도 대법원은 이미 지난 1989년 제한할 수 있는 표현의 범위를 이렇게 판시했다. “표현 행위가 유발할 것으로 예상되는 위험이 시간적으로 먼 일이거나 단지 추측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그 표현과 직접적이고 근접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마치 화약통 속의 스파크처럼, 의도하는 행위를 일으킬 만한 표현이어야 한다.” 나이지리아 대법원의 1983년 판결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폭력에 의한 체제 전복 선동으로부터 우리의 공동체를 지킬 중요성이 커질수록,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 또한 더욱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야만 정부가 국민의 뜻에 책임을 지는 것이고 국민이 바라는 변화를 평화적으로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이 가입해 있는 유럽인권재판소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사건이 자주 다뤄지는데, 역시 엄격한 잣대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고 있다.
쿠르드족이 무장투쟁 등 강력한 분리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는 터키에서, 지난 1989년 정부의 쿠르드족 탄압 중단과 쿠르드족의 자유 의지에 근거한 평화적 해결 등을 주장하며 창당된 공산당이 그 강령을 이유로 해산 명령을 받았다. 공산당 지도자들이 터키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정당의 활동이 헌법적 체제를 훼손한다는 정부의 판단만으로는 결사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 특히 정당은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의 작동을 보장하는 데 본질적 역할을 하는 만큼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더욱 보호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터키 영토의 일부를 쿠르드족의 땅으로 지칭하며 쿠르드노동자당의 무장 활동을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처벌당한 언론인의 제소에 대해서도 이 재판소는 “개인의 의견을 주장했을 뿐이고 즉각 무장저항에 나서도록 설득하려 한 의도도 없는 만큼, 이 기사는 쿠르드족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언론의 자유와 정보 접근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출처: 한겨레21 200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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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6일 토요일
한국에서의 영웅, 그리고 빠순이
우리나라는 영웅을 키우지 못하는 사회라고들 한다. 그건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보는 성질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요즘 누구의 팬으로서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 '~빠'라고 말하며, 그 말이 객관적인지 아닌지는 무시되기 일쑤이다.
실제 우리나라 사람이 그런지,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는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자. 누군가가 자기는 누구를 (또는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을 했을 때, 그 대상(사람이든 아니든)에 대해 흠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완벽한 건 없으므로). 그리고 (실제로 자기가 좋아하는 게 있든 없든) 자기가 좋아하는 건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을 비판하는 측은, 최소한 말싸움에서는 우위에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에게는 공격 대상이 되는 약점이 없으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그걸 왜 하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그걸 왜 좋아하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묻고 싶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냐?', '너는 무엇을 좋아하냐?'
정치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국민들이 가진 가장 흔한 태도가, 정치를 욕하면서 양비론, 냉소주의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도 우리나라의 정치가 바람직하고, 정치가들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팔짱끼고 멀찌감치 서서 혀만 차고 있으면 나아지는 것이 무엇일까? (쿨하게 보일 수 있나?) 더구나 정치의 결과는 결국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계급만을 위하는 정치가가 있다면, 그런 정치가가 원하는 정치에 대한 시선은 바로 위와 같은 냉소주의일 것이다 (국민들이 누가 자기를 위해 정치를 하는가 열심히 생각하면, 표로써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자기가 권력을 잡을 수 없을 게 자명하므로).
'오십 보 백 보'라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속담이나 격언이 있다고 해서, 그 속에 담긴 논리가 전부 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다 (비유 등의 수사법도 다 해당, 숨겨진 핵심을 짚어내거나 어떤 것을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참인 건 아니다). 모든 정치가가 못하더라도 조금 덜 못하는 사람을 지지해주자. 그리고 수준이 낮다고 냉소주의로 무관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최소한의 실천(투표)을 하자. K리그가 외국 빅리그에 비해 수준이 낮다 해서 특별히 손해볼 건 없지만, 정치가 수준이 낮으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ps. 난 정치가 중에서는 김근태를 좋아하고, 그런 사람(요령은 부족하지만 양심과 굳은 신념을 가진)이 크게 될 수 없는 우리나라가 안타깝다.
실제 우리나라 사람이 그런지,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는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자. 누군가가 자기는 누구를 (또는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을 했을 때, 그 대상(사람이든 아니든)에 대해 흠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완벽한 건 없으므로). 그리고 (실제로 자기가 좋아하는 게 있든 없든) 자기가 좋아하는 건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을 비판하는 측은, 최소한 말싸움에서는 우위에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에게는 공격 대상이 되는 약점이 없으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그걸 왜 하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그걸 왜 좋아하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묻고 싶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냐?', '너는 무엇을 좋아하냐?'
정치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국민들이 가진 가장 흔한 태도가, 정치를 욕하면서 양비론, 냉소주의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도 우리나라의 정치가 바람직하고, 정치가들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팔짱끼고 멀찌감치 서서 혀만 차고 있으면 나아지는 것이 무엇일까? (쿨하게 보일 수 있나?) 더구나 정치의 결과는 결국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계급만을 위하는 정치가가 있다면, 그런 정치가가 원하는 정치에 대한 시선은 바로 위와 같은 냉소주의일 것이다 (국민들이 누가 자기를 위해 정치를 하는가 열심히 생각하면, 표로써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자기가 권력을 잡을 수 없을 게 자명하므로).
'오십 보 백 보'라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속담이나 격언이 있다고 해서, 그 속에 담긴 논리가 전부 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다 (비유 등의 수사법도 다 해당, 숨겨진 핵심을 짚어내거나 어떤 것을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참인 건 아니다). 모든 정치가가 못하더라도 조금 덜 못하는 사람을 지지해주자. 그리고 수준이 낮다고 냉소주의로 무관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최소한의 실천(투표)을 하자. K리그가 외국 빅리그에 비해 수준이 낮다 해서 특별히 손해볼 건 없지만, 정치가 수준이 낮으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ps. 난 정치가 중에서는 김근태를 좋아하고, 그런 사람(요령은 부족하지만 양심과 굳은 신념을 가진)이 크게 될 수 없는 우리나라가 안타깝다.
2007년 6월 12일 화요일
스크랩)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다 [한겨레21 2006-05-09 08:06]
[한겨레] 한때 정치인의 전유물이었던 ‘뻔뻔함’은 이제 대중들의 일상 속으로 … 과연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다. “뻔뻔스럽고 부끄러워함이 없음”이란 뜻이다. 후안무치에 친화적인 정치판에선 상대편을 비난할 때 자주 쓰는 상용어지만, 보통 사람들 사이에선 큰 욕이다. 넓고 묽게 보자. 후안무치를 도덕의 경계선상에 걸쳐 있는 하나의 인간적 특성으로 보자.
김구가 이승만의 적수가 되지 못한 이유
정치인의 제1 자질이 무엇일까? 단연 후안무치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도덕감정을 고수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인에겐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고 상황에 따라 언행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볼 것도 없이 한국 현대사만 살펴봐도 이는 분명해진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경쟁자들과 비교해볼 때 후안무치 자질이 더 뛰어났다. 예컨대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해보라. 김구도 다른 독립투사에 비하면 꽤 후안무치한 편이었지만 감히 이승만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는 대통령들에게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은 기본이고 거기에 후안무치 자질이 더해져야만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영삼부터 살펴보자. 3당 합당과 내각제 각서 파동은 김영삼의 탁월한 후안무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정계은퇴 식언과 ‘20억+알파’ 사건은 김대중의 후안무치 능력을, 대선후보 전 동교동계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지역주의 양비론의 일시적 위장 등은 노무현의 후안무치 능력을 입증해준다.
대체적으로 보아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후안무치를 저지른 건수가 더 많고 농도가 더 강하다. 피부가 얇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거나 조직의 리더가 된 걸 본 적이 있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유능하진 않았을 게다.
정치는 인간의 야수적 속성을 다루는 영역이다. 어느 영역치고 그 속성과 무관하랴만, 본격적인 권력투쟁이라는 점에서 정치를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경제 영역의 투쟁도 무섭긴 하지만, 그쪽은 이익 중심이기 때문에 이익과 더불어 이념·명분 등이 칼춤을 추는 정치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는 경제계의 거물이었던 정주영과 김우중이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기웃거리다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가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영역에서도 후안무치가 경쟁력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최근의 삼성과 현대차 사태를 보라. 왜 잘나가는 재벌그룹 총수일수록 후안무치의 농도가 강한가? 그건 평소 후안무치했기 때문에 그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답으로 대신하면 되겠다.
주변을 둘러보기 바란다. 후안무치 자질이 비교적 뛰어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게다. 그들에겐 좋은 점이 많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교섭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비교적 탁월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이미 권력을 가진 쪽은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즉, 같은 선수를 알아보고 요청·요구에 응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뻔뻔함'은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자신의 후안무치를 자각할 수 있는가? 없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싹튼다. 자신이 후안무치하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면 후안무치를 구사하기 어려워진다. 후안무치를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하는 기분으로 체화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의 상식적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해도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같은 후안무치 자질을 가진 측근 인사들에게 의존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대중은 묘한 동물이다. 그들은 정치인의 후안무치가 필요악임을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어느 순간 돌아서서 후안무치하다고 욕을 한다. 언제 어느 경우에 그러는지 그건 확실치 않다. 그들은 “해도 너무하네”라고 하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서부터 너무한 건지 그들 자신도 답을 갖고 있진 않다. 그래서 정치는 늘 대중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임이 된다.
1920년대 후반 미국 마피아 조직을 주름잡았던 알 카포네는 “상류사회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훌륭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폭이 감히 그런 말을 해? 아니다. 상류층의 후안무치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조폭도 당당해진다. 일반 대중인들 무얼 망설이랴. 민주화 이후 한국인에게 나타난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후안무치의 일상화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의 반열에 올랐다. 보수파들은 그게 민주화 탓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게 아니다. 후안무치의 엘리트 독식 체제에서 대중화 체제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긍정적 변화로 보는 게 옳다.
그건 마치 아줌마들의 후안무치를 비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남존여비 가부장 체제하에서 처녀 때까지 억눌려왔던 후안무치 욕구가 애 낳고 폭발하면 원인부터 따져보는 게 옳다. 나는 후안무치해도 좋지만 너는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후안무치의 평준화는 사회 정의다.
독일에 페터 슬로터다이크라는 괴짜 철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위선적 계몽주의’를 질타하면서 ‘뻔뻔함’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이자 실천 항목으로 제시했다. 이론과 명분대로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표현 양식이라 할 뻔뻔함을 발휘하면서 문제를 짚어보자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심오한 뜻이 있겠지만, 후안무치를 다시 보자는 메시지만큼은 그대로 접수해도 좋겠다. 사실 한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돼온 것이다. 한동안 열풍이 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이 기(氣) 살려주기 운동’도 기실 따지고 보면 이 후안무치한 세상에서 내 새끼 경쟁력 키워주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
지금 이 후안무치 이야기를 행여 냉소로 이해하면 크게 실수하는 거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문법에 대해 탐구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이 이대로 좋은가 하는 걸 정색을 하고 살펴보자는 뜻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혁명의 순수성은 2주일을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민주화운동이나 개혁의 순수성은 얼마나 갈까? 2개월? 2년? 얼마이건 그 주체는 모른다. 왜 그런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주체에겐 후안무치 자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보기엔 이미 순수하지 않은데도 자신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걸 무슨 수로 막으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이 라는 책에서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고 독설을 퍼부었을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민주화운동을 한 인사들은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계속 밖에서만 떠돌아야 하고, 공직은 운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독식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천규석이 말하고자 한 건 운동가들의 공직 진출 자체가 아니라 공직 진출 이후 보여주는 모습일 거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글과 말로만 운동을 했던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혹 나는 나의 글을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모든 지식인들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후안무치는 정치인들만의 무기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석은 언젠가 ‘글쓰기의 무서움’이란 글에서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발 밑에 조회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는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모두에게 긴요한 덕목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자신이 실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옳은 메시지라면 널리 전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반론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로 인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너무 심각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한국 사회엔 ‘담론의 거품’이 너무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좀 유치한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 구체적 각론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이야기는 유치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적어도 수준의 잡지에선 ‘부국강병론’이니 ‘소득 2만달러론’이니 하는 것은 경멸받기 딱 좋은 보수파 담론으로 통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멸이 과연 정직한 것인가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주의·민족주의는 무조건 때려야 진보고 품위 있는 지식인으로 통하는 이 풍토가 언행일치를 전제로 한 정직성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잠시 를 보자. 이 신문은 자주 문화적으론 ‘좌파 담론’의 상품화에 열을 올린다. 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극우성을 위장하려는 술책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을지 모르겠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그게 그 신문 독자들이 원하는 상품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가?
"잘 살아보세”는 “잘 써보세”로 바뀌고…
뫚맏맒봉 법칙’이란 게 있다. 미국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지만 일류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갖게 된 이른바 ‘보보스족’이 정치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과거 운동권 시절과 비교해 갖게 되는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문화적으로만 진보 냄새를 피우는 걸 말한다.
과연 의 독자들은 독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물론 삼위일체를 고수하는 게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법은 없다. 얼마든지 각기 따로 놀 수 있다. 다만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일관된 경향성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김대중 정권은 물론이고 노무현 정권이 경제적으로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성장주의 패러다임’이 과연 한국인 다수가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인가?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닌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사라진 유물이 아니다. “잘 써보세”로 바뀌었을 뿐이다. 민주시민의 윤리는 소비자 윤리로 대체되었다. 소비자가 악덕 상인에 분노하듯, 민주시민은 악덕 정치권에 분노하는 정도의 윤리는 갖고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뿐이다. 민주주의는 소비주의와 결탁했다. 민주시민은 그 이상의 선은 넘으려 하지 않는다.
일부에 지나지 않을망정, 그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매년 해외여행을 하고 중형차를 굴리고 골프를 치기도 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은 돈으로 이른바 ‘대학 개혁’을 하고 있지만, 그것에 저항하진 않으며 그로 인한 수혜만 누린다.
이런 지적은 부당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았던 미국의 노엄 촘스키가 짜증을 냈듯이, 유치하다고 짜증을 낼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논점은 지식인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의 담론 생산이 현실 세계와 맺는 관계다. 그 괴리가 클수록 지식인의 ‘상징 자본’은 튼실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세계를 바꾸는 데 어떤 실천력을 갖는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와 법의 차원에선 한국 사회는 개혁을 할 만큼 했다. 물론 할 게 더 남아 있고 앞으로 더욱 해야겠지만, 제도와 법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남아 있으니 그게 바로 의식과 행태의 영역이다. 예컨대 정치판에선 ‘보스 정치’가 거의 사라졌지만, 대학엔 건재하다. 학연주의와 파벌주의는 정치권 뺨을 치고도 남는다. 대학 내 선거 수준도 직업 정치판 선거보다 높지 않다는 이유로 관리권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빼앗겼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 그 바닥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늘 사회를 향해서만 설교를 늘어놓는다.
정치권 동지들을 새삼 경외하다
자신의 후안무치에 대해 가끔이나마 자각을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글쓰기가 몹시 싫어지니까 말이다.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게 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언행일치를 하는 사람 위주로 글쓰기 시장이 물갈이돼 담론과 세상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에 따라 실천력도 강해질 게 아닌가. 정치권의 후안무치 동지들에게 새삼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들에겐 이런 고민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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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때 정치인의 전유물이었던 ‘뻔뻔함’은 이제 대중들의 일상 속으로 … 과연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다. “뻔뻔스럽고 부끄러워함이 없음”이란 뜻이다. 후안무치에 친화적인 정치판에선 상대편을 비난할 때 자주 쓰는 상용어지만, 보통 사람들 사이에선 큰 욕이다. 넓고 묽게 보자. 후안무치를 도덕의 경계선상에 걸쳐 있는 하나의 인간적 특성으로 보자.
김구가 이승만의 적수가 되지 못한 이유
정치인의 제1 자질이 무엇일까? 단연 후안무치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도덕감정을 고수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인에겐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고 상황에 따라 언행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볼 것도 없이 한국 현대사만 살펴봐도 이는 분명해진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경쟁자들과 비교해볼 때 후안무치 자질이 더 뛰어났다. 예컨대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해보라. 김구도 다른 독립투사에 비하면 꽤 후안무치한 편이었지만 감히 이승만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는 대통령들에게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은 기본이고 거기에 후안무치 자질이 더해져야만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영삼부터 살펴보자. 3당 합당과 내각제 각서 파동은 김영삼의 탁월한 후안무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정계은퇴 식언과 ‘20억+알파’ 사건은 김대중의 후안무치 능력을, 대선후보 전 동교동계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지역주의 양비론의 일시적 위장 등은 노무현의 후안무치 능력을 입증해준다.
대체적으로 보아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후안무치를 저지른 건수가 더 많고 농도가 더 강하다. 피부가 얇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거나 조직의 리더가 된 걸 본 적이 있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유능하진 않았을 게다.
정치는 인간의 야수적 속성을 다루는 영역이다. 어느 영역치고 그 속성과 무관하랴만, 본격적인 권력투쟁이라는 점에서 정치를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경제 영역의 투쟁도 무섭긴 하지만, 그쪽은 이익 중심이기 때문에 이익과 더불어 이념·명분 등이 칼춤을 추는 정치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는 경제계의 거물이었던 정주영과 김우중이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기웃거리다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가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영역에서도 후안무치가 경쟁력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최근의 삼성과 현대차 사태를 보라. 왜 잘나가는 재벌그룹 총수일수록 후안무치의 농도가 강한가? 그건 평소 후안무치했기 때문에 그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답으로 대신하면 되겠다.
주변을 둘러보기 바란다. 후안무치 자질이 비교적 뛰어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게다. 그들에겐 좋은 점이 많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교섭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비교적 탁월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이미 권력을 가진 쪽은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즉, 같은 선수를 알아보고 요청·요구에 응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뻔뻔함'은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자신의 후안무치를 자각할 수 있는가? 없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싹튼다. 자신이 후안무치하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면 후안무치를 구사하기 어려워진다. 후안무치를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하는 기분으로 체화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의 상식적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해도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같은 후안무치 자질을 가진 측근 인사들에게 의존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대중은 묘한 동물이다. 그들은 정치인의 후안무치가 필요악임을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어느 순간 돌아서서 후안무치하다고 욕을 한다. 언제 어느 경우에 그러는지 그건 확실치 않다. 그들은 “해도 너무하네”라고 하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서부터 너무한 건지 그들 자신도 답을 갖고 있진 않다. 그래서 정치는 늘 대중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임이 된다.
1920년대 후반 미국 마피아 조직을 주름잡았던 알 카포네는 “상류사회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훌륭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폭이 감히 그런 말을 해? 아니다. 상류층의 후안무치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조폭도 당당해진다. 일반 대중인들 무얼 망설이랴. 민주화 이후 한국인에게 나타난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후안무치의 일상화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의 반열에 올랐다. 보수파들은 그게 민주화 탓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게 아니다. 후안무치의 엘리트 독식 체제에서 대중화 체제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긍정적 변화로 보는 게 옳다.
그건 마치 아줌마들의 후안무치를 비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남존여비 가부장 체제하에서 처녀 때까지 억눌려왔던 후안무치 욕구가 애 낳고 폭발하면 원인부터 따져보는 게 옳다. 나는 후안무치해도 좋지만 너는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후안무치의 평준화는 사회 정의다.
독일에 페터 슬로터다이크라는 괴짜 철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위선적 계몽주의’를 질타하면서 ‘뻔뻔함’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이자 실천 항목으로 제시했다. 이론과 명분대로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표현 양식이라 할 뻔뻔함을 발휘하면서 문제를 짚어보자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심오한 뜻이 있겠지만, 후안무치를 다시 보자는 메시지만큼은 그대로 접수해도 좋겠다. 사실 한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돼온 것이다. 한동안 열풍이 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이 기(氣) 살려주기 운동’도 기실 따지고 보면 이 후안무치한 세상에서 내 새끼 경쟁력 키워주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
지금 이 후안무치 이야기를 행여 냉소로 이해하면 크게 실수하는 거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문법에 대해 탐구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이 이대로 좋은가 하는 걸 정색을 하고 살펴보자는 뜻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혁명의 순수성은 2주일을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민주화운동이나 개혁의 순수성은 얼마나 갈까? 2개월? 2년? 얼마이건 그 주체는 모른다. 왜 그런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주체에겐 후안무치 자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보기엔 이미 순수하지 않은데도 자신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걸 무슨 수로 막으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이 라는 책에서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고 독설을 퍼부었을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민주화운동을 한 인사들은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계속 밖에서만 떠돌아야 하고, 공직은 운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독식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천규석이 말하고자 한 건 운동가들의 공직 진출 자체가 아니라 공직 진출 이후 보여주는 모습일 거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글과 말로만 운동을 했던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혹 나는 나의 글을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모든 지식인들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후안무치는 정치인들만의 무기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석은 언젠가 ‘글쓰기의 무서움’이란 글에서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발 밑에 조회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는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모두에게 긴요한 덕목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자신이 실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옳은 메시지라면 널리 전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반론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로 인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너무 심각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한국 사회엔 ‘담론의 거품’이 너무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좀 유치한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 구체적 각론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이야기는 유치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적어도 수준의 잡지에선 ‘부국강병론’이니 ‘소득 2만달러론’이니 하는 것은 경멸받기 딱 좋은 보수파 담론으로 통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멸이 과연 정직한 것인가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주의·민족주의는 무조건 때려야 진보고 품위 있는 지식인으로 통하는 이 풍토가 언행일치를 전제로 한 정직성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잠시 를 보자. 이 신문은 자주 문화적으론 ‘좌파 담론’의 상품화에 열을 올린다. 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극우성을 위장하려는 술책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을지 모르겠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그게 그 신문 독자들이 원하는 상품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가?
"잘 살아보세”는 “잘 써보세”로 바뀌고…
뫚맏맒봉 법칙’이란 게 있다. 미국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지만 일류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갖게 된 이른바 ‘보보스족’이 정치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과거 운동권 시절과 비교해 갖게 되는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문화적으로만 진보 냄새를 피우는 걸 말한다.
과연 의 독자들은 독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물론 삼위일체를 고수하는 게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법은 없다. 얼마든지 각기 따로 놀 수 있다. 다만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일관된 경향성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김대중 정권은 물론이고 노무현 정권이 경제적으로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성장주의 패러다임’이 과연 한국인 다수가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인가?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닌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사라진 유물이 아니다. “잘 써보세”로 바뀌었을 뿐이다. 민주시민의 윤리는 소비자 윤리로 대체되었다. 소비자가 악덕 상인에 분노하듯, 민주시민은 악덕 정치권에 분노하는 정도의 윤리는 갖고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뿐이다. 민주주의는 소비주의와 결탁했다. 민주시민은 그 이상의 선은 넘으려 하지 않는다.
일부에 지나지 않을망정, 그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매년 해외여행을 하고 중형차를 굴리고 골프를 치기도 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은 돈으로 이른바 ‘대학 개혁’을 하고 있지만, 그것에 저항하진 않으며 그로 인한 수혜만 누린다.
이런 지적은 부당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았던 미국의 노엄 촘스키가 짜증을 냈듯이, 유치하다고 짜증을 낼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논점은 지식인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의 담론 생산이 현실 세계와 맺는 관계다. 그 괴리가 클수록 지식인의 ‘상징 자본’은 튼실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세계를 바꾸는 데 어떤 실천력을 갖는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와 법의 차원에선 한국 사회는 개혁을 할 만큼 했다. 물론 할 게 더 남아 있고 앞으로 더욱 해야겠지만, 제도와 법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남아 있으니 그게 바로 의식과 행태의 영역이다. 예컨대 정치판에선 ‘보스 정치’가 거의 사라졌지만, 대학엔 건재하다. 학연주의와 파벌주의는 정치권 뺨을 치고도 남는다. 대학 내 선거 수준도 직업 정치판 선거보다 높지 않다는 이유로 관리권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빼앗겼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 그 바닥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늘 사회를 향해서만 설교를 늘어놓는다.
정치권 동지들을 새삼 경외하다
자신의 후안무치에 대해 가끔이나마 자각을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글쓰기가 몹시 싫어지니까 말이다.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게 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언행일치를 하는 사람 위주로 글쓰기 시장이 물갈이돼 담론과 세상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에 따라 실천력도 강해질 게 아닌가. 정치권의 후안무치 동지들에게 새삼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들에겐 이런 고민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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