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28일 토요일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에 소개된 경제이론들

책에 소개된 경제학사의 주요 인물, 학파의 개념 및 이론들을 생각나는대로 간단히 정리해보자.

애덤 스미스
보이지 않는 손 - 자유방임시장(free market)
분업, 지역과 국가 간의 분업(절대우위, absolute advantage) - 자유무역

맬서스
인구론: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와 식량의 산술급수적 증가
빈민 구제에 대한 반대 - 인구 증가 감소

데이비드 리카도, 중상주의
기회비용(opportunity cost)과 비교우위(comparative advantage) - 자유무역(free trade)
경제학적 지대(economic rent): 현재의 용도로 쓰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최소액수에 대한 초과액 - 차액지대론 및 곡물법 반대

존 스튜어트 밀
제레미 벤담 - 공리주의
비례세율, 상속세, 자유방임과 정부개입에 대한 중립

카를 마르크스
지배계급이 생산수단을 장악: 자본가들은 불변자본을 제공하고 가변자본(노동자)을 고용 - 잉여가치의 수탈
자본주의 파멸: 이윤율과 자본축적의 감소 - 경제력 집중 - 경기침체 - 산업예비군 - 무산계급의 궁핍
(저자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전혀 쓸모없다 말한다)

앨프레드 마셜, 신고전학파
한계분석: 기업 - 한계수확(marginal returns), 소비자 - 한계효용(marginal utility)
한계수확과 한계효용의 체감 - 같아지는 점에서 균형
수확체증: 내부경제와 외부경제 - 하지만 기업의 수명에 의해 순환(탄력성과 진보성에 의한 한계)
탄력성(elasticity)의 개념
명목이자율(nominal interest rate), 실질이자율(real interest rate)의 개념

토스타인 베블런, 구제도학파, 신제도학파
제도학파(institutionalist): 사회의 법, 기풍, 제도 등에 관심
유한계급(the Lesure Class) - 현시적 여가(conspicuous leisure), 현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 현시적 가격(conspicuous price)
비즈니스 맨 - 현시적 소비, 양심적 능률 포기 / 엔지니어 - 창조, 장인정신, 과학적 사고
갤브레이스 - 필요(needs)와 욕구(wants), 광고에 의한 의존효과(dependence effect): 한계효용체감법칙 성립 안함
신제도학파 - 법률의 결정에 경제학 도입: 과실, 재산, 범죄 등에 한계분석 도구 이용

케인스 (주의자)
끈끈한 물가와 임금 - 시장경제로 모든 걸 해결 불가 (고전학파 비판)
한계소비성향 (MPC, marginal propensity to consume), 한계저축성향 (MPS, marginal propensity to save) - 승수이론(theory of multiplier): 승수 = 1/(1-MPC) = 1/MPS
불경기의 극복 - 정부가 적절한 액수 만큼의 소비를 경제에 투입: 승수이론에 따라 부족한 수요량을 메울만큼 정부가 소비

밀턴 프리드먼, 통화주의자
피셔의 교환방정식(equation of exchange) MV = PQ (V: 화폐의 유통속도, M:통화량, P: 물가수준, Q: 재화와 용역의 생산량(실질GNP))
단기적인 M의 증가는 P뿐 아니라 Q도 증가: 정부의 단순한 소비증가(케인스)만으론 효과 없음
'V가 일정하나'와 구축효과(crowding out): 케인스주의와 통화주의의 쟁점
정부정책: 일정한 통화량 증가율 유지 역할만

제임스 뷰캐넌, 공공선택학파
이익집단은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며, 사회의 공익을 해친다.
일반인 - 합리적 무시 (rational igrorance): 비용에 비해 이득이 작으므로 무시
정부, 관료나 정부의 기업규제, 재정 정책의 부정적 측면 - 모두 자신의 이익을 좇음
'정치적' 보이지 않는 손, 정보비용: 정부활동에 대한 비관

합리적 기대이론학파 (rational expectations school)
정부의 개입은 아무런 효과가 없음 - 자동적인 수급 균형, 모든 정보의 분석을 통한 최선의 선택
정부 정책(소비, 통화) 등의 효과도 미리 예측하여 판단하기 때문에 효과 없음 - 오직 예상치 못한 정책만이 효과
내부정보의 경우는 예외 (참고: '괴짜경제학'에서도 정보와 경제의 관계에 대해 언급)

2007년 7월 27일 금요일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사회 벗어나야 한다

신정아씨 학위조작 사건의 파문이 함축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다. 그것은 개인의 거짓말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어떤지를 확인하는 데 외적 ‘형식’이면 충분하다고 간주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전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왜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게 되었을까?

다소 과장된 해석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진리의 기준을 우리 스스로 안에서 찾지 못하고 밖에서, 그것도 ‘대국’에서 찾아온 데 큰 문화적 원인이 있다. 실제로 유학, 불학, 도가 사상 같은 한국의 전통사상이라는 것은 다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던가. 한국 최대의 사상가라고 하는 퇴계의 철학이 중국 성리학과 얼마나 다르던가. ‘작은 중국’(小中華)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오기도 하지 않았던가. 한결같이 중국에서 배워오면서 그렇게 천년을 지내오지 않았던가.

근대에 들어 선진적인 것의 기준을 일본적인 데에서 찾기도 하다가, 이제는 미국을 위시한 구미 국가를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국가적인 일에 미국 눈치를 보지 않은 적이 있던가. 미국에 가까울수록 앞서가는 것이고 그만큼 객관적인 삶의 기준이 되는 분위기가 여전하지 않던가. ‘썩 그럴듯하다’, ‘멋지다’를 의미하는 ‘근사’하다는 말이 사실상 서양적인 것, 외국 것에 ‘가깝고(近) 비슷하다(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이런 우리네 정서를 잘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역사상 우리 안에 제대로 된 것이 있다고 자긍심을 가져본 적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동안 중국을 베껴온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면, 오늘날 그 무게중심은 미국을 위시한 서양적인 데로 옮겨가고 말았다. 미국의 삼류급 선교사들이 전해준 삼류 기독교를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실상이기도 하니 말이다. 어떤 목사가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사실만으로 교회 성장의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로마보다 더 로마적이라는 비아냥을 가끔 듣기도 하는 한국 가톨릭이나, 중국에는 이미 없어진 공자제사(석전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한국 유교의 상황도 사상이나 문명을 주체적으로 소화하기보다는 큰 것을 베끼며 섬기고(事大), 그대로 모방해온 우리의 현주소를 잘 말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사대주의’의 전형 아니던가. 얼마나 주체적인가, 얼마나 무르익었는가, 얼마나 지행합일적인가 등이 기준이 아니라, 대국에 있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내가 얼마나 대국과 가까운 사람인가가 사실상 권위를 결정하는 역할을 해왔으니, 신정아씨의 예일대 학위 조작 사건은 사실상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상은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사례들이다. 형식에 맞으면 내용이 좀 부실해도 그 형식만으로 충분히 화제가 된다. 화제의 중심에 서기위해서라도 내가 중국을, 일본을, 구미를 좀 아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형식을 갖추는 일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는 첩경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학문하는 이들의 독서 습관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어떤 책을 읽을 때, 과연 그 책이 읽을 가치가 있는지를 아는 제일 솔직한 방법은 당연히 그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읽기도 전에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는 간편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책의 날개에 써있는 저자의 이력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때 학술서의 경우라면 저자가 어디서 공부했느냐, 학위 취득 대학이나 국가가 어디냐 살펴보되, 특히 미국에서 공부했으면 일단 읽을 가치가 있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 책에는 미국 학계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그걸 읽은 것만으로도 내가 미국과 가까운 존재가 되며, 그만큼 남들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거리도 더 생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몇 마디 영어를 섞어가며 태생적인 영어 콤플렉스를 지닌 한국인의 정서를 슬쩍 건드리는 순간 그것만으로도 그이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능력자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얼마나 큰 나라와 가까운 존재인지로 사회적 신분을 결정해온 우리의 오랜 문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신정아씨가 굳이 예일대 학위증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것이 신정아씨 혼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라면 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그이가 학위를 위조하도고 당당해하는 것은 자기 주변에 그런 사람이 또 있거나 적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형식이 내용과 동일시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면 충분한 사회, 분명히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저급 문화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때 이런 글을 쓰는 나는 이러한 삼류문화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음에는 나는 왜 박사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써보련다.

-- 덧붙히는 글
이 기사를 쓴 이찬수 교수는 7년 동안 재직한 강남대에서 부당하게 해직되고 현재는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출처: 오마이뉴스 인권실천시민연대(cshr) 기자 2007-07-27 06:41 [원문]
ⓒ 2007 OhmyNews

2007년 7월 23일 월요일

탈레반 피랍사건, 교회는 왜 비하되는가?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위험수위’입니다. 인정많은 한국인들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에 냉혹한 반응을 보인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구출은 해와야겠지만, 구출 비용은 세금을 쓰지 말고 그들에게 받아내야 한다”거나, “자기들 소원대로 죽게 됐는데(순교), 내버려둬라”는 반응, “이슬람 사회에 기독교 선교하러 간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는 반응 등, 기독교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네요.

피랍된 이들이 교회 차원에서 무모하게 봉사활동을 위해 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탈레반’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피랍된 당사자와 교회를 비난하고 있는겁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일상에 만연한 일부 ‘교회’들의 폭력적인 선교 방식과 횡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에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 본질적으로 살펴본다면 개신교 신자와 비신자의 간극이 더 이상 멀어질 수 없을만큼 멀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개신교 관계자나 신자들이 모두가 폭력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 이들의 좀 더 건강하고 상식적인 신앙생활이 더 부각돼, 간극이 좁혀지길 바라는 마음이 듭니다.

개신교, 왜 그들은 ‘개독교’라는 표현의 대명사가 됐으며, 이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더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걸까요?

교회도 ‘먹고 살아야’ 하다 보니

혹시 집에 계신 분이라면 창문을 한번 열어보시길 바랍니다. 고층아파트 사시는 분이라면, 좀 귀찮더라도 더더욱 권해봅니다. 자, 뭔가가 ‘많이’ 보일겁니다. 뭘까요? 예, 교회의 십자가일겁니다.

골목마다 하나씩 있는게 교회입니다. 비교적 큰 교회도 많지만, 영세한 교회도 많습니다. 자, 대한민국에 이렇게 많은게 교회입니다.

이게 본질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들으면 화날지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만, ‘종교’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이 숱한 교회들 틈에서 더 많은 신자들을 모아 헌금을 받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거리로 나갈 수 밖에 없겠죠? 이때부터는 경쟁입니다. 더 많은 전단지를 뿌려야 하고, 대중교통수단에서도 남이 듣던말던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알려야 하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알려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적·종교적 책임에 앞서 출석교인을 늘리는 일이 우선이 돼버렸습니다.

그 많고 많은 교회 중에서 1/10만 이런 일에 나서도, 우리가 자주 겪는 ‘폭력적인 선교방식’은 일상이 될 수 밖에 없는겁니다.

하지만, 종교란 ‘강요’하고 ‘세뇌’한다고 해서 선택되는게 아니죠? 가끔, 그렇게 ‘세뇌’돼 집문서까지 갖다바치는 분들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관이 있고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걸 안다면, 이런 짓 자제해야 됩니다.

교회가 잊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의 다원성

기독교는 원래 선민의식이 강한 종교입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의 유대는 로마제국 치하에 있었습니다. 본래부터 선민의식이 강하고 종교적으로는 다소 독선적이던 유대인들과, 종교적으로 다원성을 추구했던 로마제국과의 충돌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런 정세에서 활동했던 분이 예수였고, 실제로 내부논쟁 속에서 수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외부의 압력에 대처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히 ‘감정적인 프리미엄’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절대자가 된 것이고, 예수 역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 ‘감정적인 프리미엄’에는, ‘선택받은 자’라는 자부심이 반영돼 있습니다. 그게 후대에 와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변질된 거죠. 앞서 이야기한, 대중교통수단 내의 ‘선교’도 ‘어린 양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사명’으로 받아들인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회의 존재 목적 중 하나도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과 성장”입니다. 그 ‘나라’를 세우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머릿수’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린답시고 하는 짓이 결국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돼버린 겁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의지가 있는 분들끼리 알아서 믿으시면 됩니다. 괜히 남 눈살 찌푸리게 할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불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까지 보냅니다.

가톨릭을 대표하는 김수환 추기경과 조계종 총무원장이 손을 맞잡고 음악공연을 관람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연출합니다. 그런걸 보면, 개신교의 일부 폭력적인 선교방식이 더 부각될 수 밖에 없는겁니다. 개신교, 이제 좀 더 ‘아름답게’ 처신해야 합니다.

일부 ‘정치목사’들의 준동

사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태생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물과 기름같은 사이일 수도 있습니다.

원래,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북한에서 흥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그러면서 ‘탄압’당해 월남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되는데에도 교회 세력의 지원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 ‘한기총’이라는 개신교 극우파의 탄생과 성장은 그런 정서로부터 비롯되는겁니다. 누가 욕하든 말든, 이분들은 성조기 흔들면서 열렬한 반공을 표합니다. ‘한기총’은 이 정서를 활용해 성장한 것이고, 정치에도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이 ‘정치목사’들은 대형교회들의 담임목사들이 많고, 부패를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형교회이기에 주목받을 수 없었고,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의 고발도 ‘이미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거기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까지 같이 생각해볼까요? 비신자가 바라보는 개신교의 이미지는 ‘부패집단’일 수 밖에 없는겁니다.

교회, 이제 그만 ‘자체정화’해야

앞서 이야기했듯이 결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체정화’하는겁니다. 남들이 해결해 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보고 결정하세요. 과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양심적으로 믿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싸우세요. 전체의 이미지를 먹칠하는 저 일상의 폭력과 싸워야만 합니다.

개신교도 원래는, 가톨릭의 ‘면죄부 남발’ 등의 부패에 반발한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했던 종파잖습니까? 태생 자체가 ‘부패와의 싸움’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있어 ‘부패와 폭력’과의 싸움은 숙명인 것입니다.

그 숙명을 알고, 자신의 양심을 믿어 싸운다면, 외부의 비신자들도 당신들에게 환호를 보내며 명분을 보내줄 겁니다. 어차피, 하나님이라는 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분이잖습니까?

그런 분을 믿으신다면, 비록 비신자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분’을 생각하며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당신들의 양심 속 하나님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저 일상의 폭력에 묻어가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양심의 힘을 믿으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선택은 무엇일까요?


출처: 박형준 님 블로그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