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씨 학위조작 사건의 파문이 함축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다. 그것은 개인의 거짓말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어떤지를 확인하는 데 외적 ‘형식’이면 충분하다고 간주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전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왜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게 되었을까?
다소 과장된 해석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진리의 기준을 우리 스스로 안에서 찾지 못하고 밖에서, 그것도 ‘대국’에서 찾아온 데 큰 문화적 원인이 있다. 실제로 유학, 불학, 도가 사상 같은 한국의 전통사상이라는 것은 다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던가. 한국 최대의 사상가라고 하는 퇴계의 철학이 중국 성리학과 얼마나 다르던가. ‘작은 중국’(小中華)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오기도 하지 않았던가. 한결같이 중국에서 배워오면서 그렇게 천년을 지내오지 않았던가.
근대에 들어 선진적인 것의 기준을 일본적인 데에서 찾기도 하다가, 이제는 미국을 위시한 구미 국가를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국가적인 일에 미국 눈치를 보지 않은 적이 있던가. 미국에 가까울수록 앞서가는 것이고 그만큼 객관적인 삶의 기준이 되는 분위기가 여전하지 않던가. ‘썩 그럴듯하다’, ‘멋지다’를 의미하는 ‘근사’하다는 말이 사실상 서양적인 것, 외국 것에 ‘가깝고(近) 비슷하다(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이런 우리네 정서를 잘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역사상 우리 안에 제대로 된 것이 있다고 자긍심을 가져본 적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동안 중국을 베껴온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면, 오늘날 그 무게중심은 미국을 위시한 서양적인 데로 옮겨가고 말았다. 미국의 삼류급 선교사들이 전해준 삼류 기독교를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실상이기도 하니 말이다. 어떤 목사가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사실만으로 교회 성장의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로마보다 더 로마적이라는 비아냥을 가끔 듣기도 하는 한국 가톨릭이나, 중국에는 이미 없어진 공자제사(석전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한국 유교의 상황도 사상이나 문명을 주체적으로 소화하기보다는 큰 것을 베끼며 섬기고(事大), 그대로 모방해온 우리의 현주소를 잘 말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사대주의’의 전형 아니던가. 얼마나 주체적인가, 얼마나 무르익었는가, 얼마나 지행합일적인가 등이 기준이 아니라, 대국에 있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내가 얼마나 대국과 가까운 사람인가가 사실상 권위를 결정하는 역할을 해왔으니, 신정아씨의 예일대 학위 조작 사건은 사실상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상은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사례들이다. 형식에 맞으면 내용이 좀 부실해도 그 형식만으로 충분히 화제가 된다. 화제의 중심에 서기위해서라도 내가 중국을, 일본을, 구미를 좀 아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형식을 갖추는 일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는 첩경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학문하는 이들의 독서 습관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어떤 책을 읽을 때, 과연 그 책이 읽을 가치가 있는지를 아는 제일 솔직한 방법은 당연히 그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읽기도 전에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는 간편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책의 날개에 써있는 저자의 이력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때 학술서의 경우라면 저자가 어디서 공부했느냐, 학위 취득 대학이나 국가가 어디냐 살펴보되, 특히 미국에서 공부했으면 일단 읽을 가치가 있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 책에는 미국 학계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그걸 읽은 것만으로도 내가 미국과 가까운 존재가 되며, 그만큼 남들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거리도 더 생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몇 마디 영어를 섞어가며 태생적인 영어 콤플렉스를 지닌 한국인의 정서를 슬쩍 건드리는 순간 그것만으로도 그이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능력자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얼마나 큰 나라와 가까운 존재인지로 사회적 신분을 결정해온 우리의 오랜 문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신정아씨가 굳이 예일대 학위증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것이 신정아씨 혼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라면 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그이가 학위를 위조하도고 당당해하는 것은 자기 주변에 그런 사람이 또 있거나 적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형식이 내용과 동일시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면 충분한 사회, 분명히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저급 문화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때 이런 글을 쓰는 나는 이러한 삼류문화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음에는 나는 왜 박사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써보련다.
-- 덧붙히는 글
이 기사를 쓴 이찬수 교수는 7년 동안 재직한 강남대에서 부당하게 해직되고 현재는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출처: 오마이뉴스 인권실천시민연대(cshr) 기자 2007-07-27 06:41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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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6일 토요일
한국에서의 영웅, 그리고 빠순이
우리나라는 영웅을 키우지 못하는 사회라고들 한다. 그건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보는 성질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요즘 누구의 팬으로서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 '~빠'라고 말하며, 그 말이 객관적인지 아닌지는 무시되기 일쑤이다.
실제 우리나라 사람이 그런지,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는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자. 누군가가 자기는 누구를 (또는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을 했을 때, 그 대상(사람이든 아니든)에 대해 흠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완벽한 건 없으므로). 그리고 (실제로 자기가 좋아하는 게 있든 없든) 자기가 좋아하는 건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을 비판하는 측은, 최소한 말싸움에서는 우위에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에게는 공격 대상이 되는 약점이 없으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그걸 왜 하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그걸 왜 좋아하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묻고 싶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냐?', '너는 무엇을 좋아하냐?'
정치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국민들이 가진 가장 흔한 태도가, 정치를 욕하면서 양비론, 냉소주의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도 우리나라의 정치가 바람직하고, 정치가들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팔짱끼고 멀찌감치 서서 혀만 차고 있으면 나아지는 것이 무엇일까? (쿨하게 보일 수 있나?) 더구나 정치의 결과는 결국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계급만을 위하는 정치가가 있다면, 그런 정치가가 원하는 정치에 대한 시선은 바로 위와 같은 냉소주의일 것이다 (국민들이 누가 자기를 위해 정치를 하는가 열심히 생각하면, 표로써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자기가 권력을 잡을 수 없을 게 자명하므로).
'오십 보 백 보'라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속담이나 격언이 있다고 해서, 그 속에 담긴 논리가 전부 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다 (비유 등의 수사법도 다 해당, 숨겨진 핵심을 짚어내거나 어떤 것을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참인 건 아니다). 모든 정치가가 못하더라도 조금 덜 못하는 사람을 지지해주자. 그리고 수준이 낮다고 냉소주의로 무관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최소한의 실천(투표)을 하자. K리그가 외국 빅리그에 비해 수준이 낮다 해서 특별히 손해볼 건 없지만, 정치가 수준이 낮으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ps. 난 정치가 중에서는 김근태를 좋아하고, 그런 사람(요령은 부족하지만 양심과 굳은 신념을 가진)이 크게 될 수 없는 우리나라가 안타깝다.
실제 우리나라 사람이 그런지,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는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자. 누군가가 자기는 누구를 (또는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을 했을 때, 그 대상(사람이든 아니든)에 대해 흠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완벽한 건 없으므로). 그리고 (실제로 자기가 좋아하는 게 있든 없든) 자기가 좋아하는 건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을 비판하는 측은, 최소한 말싸움에서는 우위에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에게는 공격 대상이 되는 약점이 없으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그걸 왜 하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그걸 왜 좋아하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묻고 싶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냐?', '너는 무엇을 좋아하냐?'
정치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국민들이 가진 가장 흔한 태도가, 정치를 욕하면서 양비론, 냉소주의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도 우리나라의 정치가 바람직하고, 정치가들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팔짱끼고 멀찌감치 서서 혀만 차고 있으면 나아지는 것이 무엇일까? (쿨하게 보일 수 있나?) 더구나 정치의 결과는 결국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계급만을 위하는 정치가가 있다면, 그런 정치가가 원하는 정치에 대한 시선은 바로 위와 같은 냉소주의일 것이다 (국민들이 누가 자기를 위해 정치를 하는가 열심히 생각하면, 표로써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자기가 권력을 잡을 수 없을 게 자명하므로).
'오십 보 백 보'라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속담이나 격언이 있다고 해서, 그 속에 담긴 논리가 전부 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다 (비유 등의 수사법도 다 해당, 숨겨진 핵심을 짚어내거나 어떤 것을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참인 건 아니다). 모든 정치가가 못하더라도 조금 덜 못하는 사람을 지지해주자. 그리고 수준이 낮다고 냉소주의로 무관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최소한의 실천(투표)을 하자. K리그가 외국 빅리그에 비해 수준이 낮다 해서 특별히 손해볼 건 없지만, 정치가 수준이 낮으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ps. 난 정치가 중에서는 김근태를 좋아하고, 그런 사람(요령은 부족하지만 양심과 굳은 신념을 가진)이 크게 될 수 없는 우리나라가 안타깝다.
2007년 6월 12일 화요일
스크랩) 교주님과 근대성의 역학!
교주님과 근대성의 역학!
[한겨레]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국과 일본의 많은 지성인들은 왜 그토록 ‘종교적 전제왕국’의 환상에 쉽게 빠지는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수년 전 필자가 한국의 한 대학에서 공부했을 때 유독 눈에 띈 것은 학생회관 내 어느 방에 걸려 있던 ‘하늘과 땅’이란 현수막이었다.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로서 결례를 무릅쓰고 들어가서 인사를 청했다. 나중에 그곳이 어떤 신흥종교에 열정을 바치는 동아리란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 모르는 새 종교가 여기에 있구나! 새로운 발견을 한 기분으로 필자는 그 학생들을 사귀었고 그 교주를 알현하기까지 되었다.
한 교주의 빌라에서 충격을 받다
굿당들이 많은 산에 위치했던 교주의 빌라에서 필자는 그날 충격을 받았다. 짧은 치마를 입은 젊은 여자들에 둘러싸인 교주가 ‘말씀’을 하면 “네, 선생님!”을 연발했던 신도들의 얼굴 표정도 “문선명에게 늙은이밖에 안 남았는데, 우리 식구들은 젊은 피가 많아!”와 같은 ‘교세 자랑’도 충격이었다. 지금 그 교단의 정확한 명칭도 기억할 수 없지만, 전도 유망해 보이던 학우들이 왜 그 ‘선생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됐는지 그 교단으로 가게 만든 이유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남아 있었다.
몇 개월 뒤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어느 종말론적 선교회의 선교사와 만난 일이 있었다. 1992년 10월28일이 되면 세계사가 끝이 나고 믿는 자만이 허공으로 들려 올라갈 수 있다는 예언을 위주로 설교하는 부부 선교사였는데 그 남편은 원래 대기업의 사원이었다.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거쳐간 사람이 갑자기 광신으로 뭉친 소집단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뒤 1992년 10월28일 시한부종말론에 대한 신문 보도를 읽었을 때 이장림 목사에게 현혹돼 전 재산을 바치는 등 극단적인 신앙 행위를 벌인 2만여명 중 공무원·교사·기업체 간부 등 고학력 중산층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금이라도 비판 정신을 가진다면 곧 허구성이 드러나는 한 개인의 종교적인 환상을 고학력자들이 어떻게 절대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 동아시아의 ‘중산층 신형 신흥종교’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계기는 1995년 3월20일의 도쿄 지하철 독가스 살포 사건이었다. 이 가스 제조의 책임을 맡은 화학 석사나 옴진리교를 위해 러시아에서 무기 구입을 한 오사카대학교 출신의 젊은 건축가,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가 재판을 받았음에도 꾸준히 믿었던 도쿄대학교 박사과정 출신의 인류학자 등 젊은 지성인들은 어떻게 해서 “문선명과 창가학회(創價學會·일본의 대표적인 불교적 신흥종교)의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회장이 유대인 조직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일본인들을 말살하려고 한다”는 난센스를 믿고 대량 살인을 ‘정당한 방어’로 믿게 됐는가? 물론 일본 국내의 교도들은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의 극소수에 불과하며, 영계·환생에 대한 괴설로 유명(?)한 도쿄대 법학부 출신 오가와 류호(大川隆法)의 ‘행복의 과학’ 등과 같은 고학력 중산층 위주의 ‘신형 신흥종교’들도 수만명 이상의 고정 신도를 모을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상당수 대학생들이 한번쯤 옴진리교·행복의 과학 유의 말세론적·유사(類似)밀교적·카리스마적 리더 숭배 중심의 ‘신형 신흥종교’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었고, ‘교주 말씀’이라면 범죄까지도 서슴지 않을 만큼 ‘개인 숭배’가 태심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윗 사람에 대한 맹종문화’가 토양
아시아에서 근대적이라 할 일본이나 한국에서 어떻게 해서 지성인들까지 빨아들일 수 있는 ‘전제왕국’들이 생겨날 수 있는가? 이 현상이 동아시아 근대성의 본질적인 문제들과 연관은 없는가? 근대 초기의 ‘고전적인’ 신흥종교- 예컨대 한국의 동학이나 일본의 천리교(天理敎)와 같은 민중 본위적인 종교운동- 들이 전통 질서의 밑으로부터의 와해와 대안적 미래의 열망을 반영했다면, 기독교·불교의 요소를 종말론·환생론에 자의적으로 갖다붙이는 식의 1970년대 이후의 ‘신형 신흥종교’들은 근대의 무엇을 반영하는 것인가? 일본이 제도적으로는 근대화됐지만 근대성의 기본 요소인 개인의 도덕적 주체성을 끝내 가져보지 못했다는 전후 일본의 진보적 사상계의 주역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96)의 뼈아픈 지적을 보자. 서구에서는 주체적인 개인의 탄생이 이루어졌다는 마사오의 의견에 그대로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한국도 아직도 끝까지 탈피하지 못한 권위주의적 근대화의 ‘메이지 모델’이 주체적 개인의 탄생을 극단적으로 방해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설교문 테이프를 수시로 듣고, 옴진리교 소유의 공장에 가서 무보수로 일하고, 교주의 명령이 떨어지면 ‘배교자’들을 납치·살인을 했던 옴진리교 신도들의 행동 양식은 우리로서 끔찍할 뿐이고 이장림 목사 유의 ‘교주’들의 발언을 문자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은 바보로 보인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계 서열적인 폭력·착취, 패거리 집단 안에서의 ‘윗사람’에 대한 맹종이 과연 한국·일본 사회에서 드문 일인가? 물론 체육학과 교수의 지시에 따라 성적을 못 올린 후배에게 주먹질을 하는 선배나, 내용상 관계가 없더라도 자신의 논문의 제1주에서 꼭 지도교수의 글을 인용하는 대학원생도 ‘교주’의 의심 모를 하수인이 되려면 특수한 계기·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가방모찌’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주류’ 사회로의 진출이 불가능한, 즉 개인과 집단의 ‘어르신’ 사이의 합리적인 횡적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토양에서 ‘교주님’들이 번성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은 사실이다.
'주류' 집단의 물신주의·출세주의·형식주의에 질려버린 젊은 지식인으로서 늘 이탈의 동기가 존재하지만, 이탈이 곧바로 또 하나의 패거리로의 편입으로 이어지기가 쉽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악 속의 빌라에서 ‘선생님의 말씀’에 몰입하던 학우들이 바로 이와 같은 경우이었을 듯하다. 상황을 더욱더 왜곡하는 것은 한국의 경우 일반적인 종교집단의 구조적인 문제들이고, 일본의 경우에는 전전(戰前) 민족주의의 청산의 미흡성이다. 즉, 일반 종교단체에서 성직자를 비판하기는커녕 평등한 상대로서 토론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한국에서, 어떤 경우에는 권위주의가 지나친 일반 성직자와 사이비 ‘교주’ 사이에서 구별조차 하기 힘들다. 그리고 유대인의 지하조직과 미국, 영국의 왕실 등이 일본을 말살하려고 하고 그들과 연결돼 있는 일본의 국제적 명망가들이 다 ‘유대인’들이라는 아사하라의 가르침이나, 일본의 ‘신인류의 중심’에 놓인 수많은 ‘신형 신흥종교’의 교리는 겉으로만 과거의 국가주의를 ‘극복한’ 오늘의 일본에서 민족주의적 심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린이와 어른을 동등한 인격체로
후기 산업사회의 무의미한 생산·소비의 순환에 식상하여 허무감을 종교적인 모색으로 메우려는 중산층 고학력자 젊은이들의 고뇌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중심부나 준주변부 어디에서나 목격되는 현상이다. 그리나 ‘참 나’로부터의 소외의 진정한 이유인 자본주의적 체제의 기본 문제들이 무시되고 담론의 구조가 전적으로 종교적 차원만으로 전환되는 한 이 모색이 생산적 ‘소외 극복’으로 되지 못하고 기존의 구조로 계속 회귀된다. 다만, 서구·미국의 경우에는 요가나 불교, 탄트라(성적 요소가 강한 힌두교적·불교적 밀교) 등이 결국 일종의 ‘종교적 소비품’으로 전락되어 핵화된 소비주의자들의 입맛에 단순히 맞추어지는 반면에, 소외라는 자본주의의 주된 문제가 집단주의·자율적 개성의 미발달과 중첩되는 한국·일본 사회에서 ‘엘리트 코스’라는 위계질서적 구조를 벗어나게 하는 개체들이 곧 전체주의적 성격이 훨씬 강한 ‘비주류’ 교단으로 몰입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양쪽의 근대화 과정이 달랐던 만큼 자본주의의 폐쇄회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의사(擬似) 탈주’의 구조도 다른 것이다.
물론 종교적 모색이 시장 논리에 편입된 구미 지역을 흠모할 일은 없지만 개인이 집단 속에서 용해되는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저질러질 가능성이 있는 동아시아형 ‘신형 신흥종교’들의 문제도 결코 좌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어린이와 어른이 기본적으로 동등한 인격체로서 취급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독립심과 자긍심을 길러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참고 사이트 1. 옴진리교 관련 사이트 링크의 모음: http://square.millto.net/~sacca/
2. 옴진리교의 후신 단체인 ‘알레프’의 사이트: http://www.aleph.to/
3. 아사하라 ‘예언집’의 일부. ‘일미 결전(決戰)’을 예언하는 것은 태평양전쟁 시대의 세계관을 방불케 한다: http://www.geocities.co.jp/WallStreet/1733/aum/seppou-1.html
4. 이탈자 6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영생교’라는 한 신흥종교의 사이트. 그 교주 조희성이 “전지전능한 구원자”로 불렸다: http://www.victor.or.kr/
5. 옴진리교에 대한 영문 정리와 영문 링크 모음 :
http://religiousmovements.lib.virginia.edu/nrms/aum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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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국과 일본의 많은 지성인들은 왜 그토록 ‘종교적 전제왕국’의 환상에 쉽게 빠지는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수년 전 필자가 한국의 한 대학에서 공부했을 때 유독 눈에 띈 것은 학생회관 내 어느 방에 걸려 있던 ‘하늘과 땅’이란 현수막이었다.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로서 결례를 무릅쓰고 들어가서 인사를 청했다. 나중에 그곳이 어떤 신흥종교에 열정을 바치는 동아리란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 모르는 새 종교가 여기에 있구나! 새로운 발견을 한 기분으로 필자는 그 학생들을 사귀었고 그 교주를 알현하기까지 되었다.
한 교주의 빌라에서 충격을 받다
굿당들이 많은 산에 위치했던 교주의 빌라에서 필자는 그날 충격을 받았다. 짧은 치마를 입은 젊은 여자들에 둘러싸인 교주가 ‘말씀’을 하면 “네, 선생님!”을 연발했던 신도들의 얼굴 표정도 “문선명에게 늙은이밖에 안 남았는데, 우리 식구들은 젊은 피가 많아!”와 같은 ‘교세 자랑’도 충격이었다. 지금 그 교단의 정확한 명칭도 기억할 수 없지만, 전도 유망해 보이던 학우들이 왜 그 ‘선생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됐는지 그 교단으로 가게 만든 이유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남아 있었다.
몇 개월 뒤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어느 종말론적 선교회의 선교사와 만난 일이 있었다. 1992년 10월28일이 되면 세계사가 끝이 나고 믿는 자만이 허공으로 들려 올라갈 수 있다는 예언을 위주로 설교하는 부부 선교사였는데 그 남편은 원래 대기업의 사원이었다.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거쳐간 사람이 갑자기 광신으로 뭉친 소집단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뒤 1992년 10월28일 시한부종말론에 대한 신문 보도를 읽었을 때 이장림 목사에게 현혹돼 전 재산을 바치는 등 극단적인 신앙 행위를 벌인 2만여명 중 공무원·교사·기업체 간부 등 고학력 중산층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금이라도 비판 정신을 가진다면 곧 허구성이 드러나는 한 개인의 종교적인 환상을 고학력자들이 어떻게 절대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 동아시아의 ‘중산층 신형 신흥종교’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계기는 1995년 3월20일의 도쿄 지하철 독가스 살포 사건이었다. 이 가스 제조의 책임을 맡은 화학 석사나 옴진리교를 위해 러시아에서 무기 구입을 한 오사카대학교 출신의 젊은 건축가,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가 재판을 받았음에도 꾸준히 믿었던 도쿄대학교 박사과정 출신의 인류학자 등 젊은 지성인들은 어떻게 해서 “문선명과 창가학회(創價學會·일본의 대표적인 불교적 신흥종교)의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회장이 유대인 조직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일본인들을 말살하려고 한다”는 난센스를 믿고 대량 살인을 ‘정당한 방어’로 믿게 됐는가? 물론 일본 국내의 교도들은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의 극소수에 불과하며, 영계·환생에 대한 괴설로 유명(?)한 도쿄대 법학부 출신 오가와 류호(大川隆法)의 ‘행복의 과학’ 등과 같은 고학력 중산층 위주의 ‘신형 신흥종교’들도 수만명 이상의 고정 신도를 모을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상당수 대학생들이 한번쯤 옴진리교·행복의 과학 유의 말세론적·유사(類似)밀교적·카리스마적 리더 숭배 중심의 ‘신형 신흥종교’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었고, ‘교주 말씀’이라면 범죄까지도 서슴지 않을 만큼 ‘개인 숭배’가 태심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윗 사람에 대한 맹종문화’가 토양
아시아에서 근대적이라 할 일본이나 한국에서 어떻게 해서 지성인들까지 빨아들일 수 있는 ‘전제왕국’들이 생겨날 수 있는가? 이 현상이 동아시아 근대성의 본질적인 문제들과 연관은 없는가? 근대 초기의 ‘고전적인’ 신흥종교- 예컨대 한국의 동학이나 일본의 천리교(天理敎)와 같은 민중 본위적인 종교운동- 들이 전통 질서의 밑으로부터의 와해와 대안적 미래의 열망을 반영했다면, 기독교·불교의 요소를 종말론·환생론에 자의적으로 갖다붙이는 식의 1970년대 이후의 ‘신형 신흥종교’들은 근대의 무엇을 반영하는 것인가? 일본이 제도적으로는 근대화됐지만 근대성의 기본 요소인 개인의 도덕적 주체성을 끝내 가져보지 못했다는 전후 일본의 진보적 사상계의 주역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96)의 뼈아픈 지적을 보자. 서구에서는 주체적인 개인의 탄생이 이루어졌다는 마사오의 의견에 그대로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한국도 아직도 끝까지 탈피하지 못한 권위주의적 근대화의 ‘메이지 모델’이 주체적 개인의 탄생을 극단적으로 방해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설교문 테이프를 수시로 듣고, 옴진리교 소유의 공장에 가서 무보수로 일하고, 교주의 명령이 떨어지면 ‘배교자’들을 납치·살인을 했던 옴진리교 신도들의 행동 양식은 우리로서 끔찍할 뿐이고 이장림 목사 유의 ‘교주’들의 발언을 문자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은 바보로 보인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계 서열적인 폭력·착취, 패거리 집단 안에서의 ‘윗사람’에 대한 맹종이 과연 한국·일본 사회에서 드문 일인가? 물론 체육학과 교수의 지시에 따라 성적을 못 올린 후배에게 주먹질을 하는 선배나, 내용상 관계가 없더라도 자신의 논문의 제1주에서 꼭 지도교수의 글을 인용하는 대학원생도 ‘교주’의 의심 모를 하수인이 되려면 특수한 계기·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가방모찌’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주류’ 사회로의 진출이 불가능한, 즉 개인과 집단의 ‘어르신’ 사이의 합리적인 횡적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토양에서 ‘교주님’들이 번성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은 사실이다.
'주류' 집단의 물신주의·출세주의·형식주의에 질려버린 젊은 지식인으로서 늘 이탈의 동기가 존재하지만, 이탈이 곧바로 또 하나의 패거리로의 편입으로 이어지기가 쉽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악 속의 빌라에서 ‘선생님의 말씀’에 몰입하던 학우들이 바로 이와 같은 경우이었을 듯하다. 상황을 더욱더 왜곡하는 것은 한국의 경우 일반적인 종교집단의 구조적인 문제들이고, 일본의 경우에는 전전(戰前) 민족주의의 청산의 미흡성이다. 즉, 일반 종교단체에서 성직자를 비판하기는커녕 평등한 상대로서 토론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한국에서, 어떤 경우에는 권위주의가 지나친 일반 성직자와 사이비 ‘교주’ 사이에서 구별조차 하기 힘들다. 그리고 유대인의 지하조직과 미국, 영국의 왕실 등이 일본을 말살하려고 하고 그들과 연결돼 있는 일본의 국제적 명망가들이 다 ‘유대인’들이라는 아사하라의 가르침이나, 일본의 ‘신인류의 중심’에 놓인 수많은 ‘신형 신흥종교’의 교리는 겉으로만 과거의 국가주의를 ‘극복한’ 오늘의 일본에서 민족주의적 심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린이와 어른을 동등한 인격체로
후기 산업사회의 무의미한 생산·소비의 순환에 식상하여 허무감을 종교적인 모색으로 메우려는 중산층 고학력자 젊은이들의 고뇌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중심부나 준주변부 어디에서나 목격되는 현상이다. 그리나 ‘참 나’로부터의 소외의 진정한 이유인 자본주의적 체제의 기본 문제들이 무시되고 담론의 구조가 전적으로 종교적 차원만으로 전환되는 한 이 모색이 생산적 ‘소외 극복’으로 되지 못하고 기존의 구조로 계속 회귀된다. 다만, 서구·미국의 경우에는 요가나 불교, 탄트라(성적 요소가 강한 힌두교적·불교적 밀교) 등이 결국 일종의 ‘종교적 소비품’으로 전락되어 핵화된 소비주의자들의 입맛에 단순히 맞추어지는 반면에, 소외라는 자본주의의 주된 문제가 집단주의·자율적 개성의 미발달과 중첩되는 한국·일본 사회에서 ‘엘리트 코스’라는 위계질서적 구조를 벗어나게 하는 개체들이 곧 전체주의적 성격이 훨씬 강한 ‘비주류’ 교단으로 몰입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양쪽의 근대화 과정이 달랐던 만큼 자본주의의 폐쇄회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의사(擬似) 탈주’의 구조도 다른 것이다.
물론 종교적 모색이 시장 논리에 편입된 구미 지역을 흠모할 일은 없지만 개인이 집단 속에서 용해되는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저질러질 가능성이 있는 동아시아형 ‘신형 신흥종교’들의 문제도 결코 좌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어린이와 어른이 기본적으로 동등한 인격체로서 취급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독립심과 자긍심을 길러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참고 사이트 1. 옴진리교 관련 사이트 링크의 모음: http://square.millto.net/~sacca/
2. 옴진리교의 후신 단체인 ‘알레프’의 사이트: http://www.aleph.to/
3. 아사하라 ‘예언집’의 일부. ‘일미 결전(決戰)’을 예언하는 것은 태평양전쟁 시대의 세계관을 방불케 한다: http://www.geocities.co.jp/WallStreet/1733/aum/seppou-1.html
4. 이탈자 6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영생교’라는 한 신흥종교의 사이트. 그 교주 조희성이 “전지전능한 구원자”로 불렸다: http://www.victor.or.kr/
5. 옴진리교에 대한 영문 정리와 영문 링크 모음 :
http://religiousmovements.lib.virginia.edu/nrms/aum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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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다 [한겨레21 2006-05-09 08:06]
[한겨레] 한때 정치인의 전유물이었던 ‘뻔뻔함’은 이제 대중들의 일상 속으로 … 과연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다. “뻔뻔스럽고 부끄러워함이 없음”이란 뜻이다. 후안무치에 친화적인 정치판에선 상대편을 비난할 때 자주 쓰는 상용어지만, 보통 사람들 사이에선 큰 욕이다. 넓고 묽게 보자. 후안무치를 도덕의 경계선상에 걸쳐 있는 하나의 인간적 특성으로 보자.
김구가 이승만의 적수가 되지 못한 이유
정치인의 제1 자질이 무엇일까? 단연 후안무치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도덕감정을 고수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인에겐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고 상황에 따라 언행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볼 것도 없이 한국 현대사만 살펴봐도 이는 분명해진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경쟁자들과 비교해볼 때 후안무치 자질이 더 뛰어났다. 예컨대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해보라. 김구도 다른 독립투사에 비하면 꽤 후안무치한 편이었지만 감히 이승만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는 대통령들에게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은 기본이고 거기에 후안무치 자질이 더해져야만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영삼부터 살펴보자. 3당 합당과 내각제 각서 파동은 김영삼의 탁월한 후안무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정계은퇴 식언과 ‘20억+알파’ 사건은 김대중의 후안무치 능력을, 대선후보 전 동교동계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지역주의 양비론의 일시적 위장 등은 노무현의 후안무치 능력을 입증해준다.
대체적으로 보아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후안무치를 저지른 건수가 더 많고 농도가 더 강하다. 피부가 얇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거나 조직의 리더가 된 걸 본 적이 있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유능하진 않았을 게다.
정치는 인간의 야수적 속성을 다루는 영역이다. 어느 영역치고 그 속성과 무관하랴만, 본격적인 권력투쟁이라는 점에서 정치를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경제 영역의 투쟁도 무섭긴 하지만, 그쪽은 이익 중심이기 때문에 이익과 더불어 이념·명분 등이 칼춤을 추는 정치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는 경제계의 거물이었던 정주영과 김우중이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기웃거리다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가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영역에서도 후안무치가 경쟁력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최근의 삼성과 현대차 사태를 보라. 왜 잘나가는 재벌그룹 총수일수록 후안무치의 농도가 강한가? 그건 평소 후안무치했기 때문에 그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답으로 대신하면 되겠다.
주변을 둘러보기 바란다. 후안무치 자질이 비교적 뛰어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게다. 그들에겐 좋은 점이 많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교섭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비교적 탁월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이미 권력을 가진 쪽은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즉, 같은 선수를 알아보고 요청·요구에 응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뻔뻔함'은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자신의 후안무치를 자각할 수 있는가? 없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싹튼다. 자신이 후안무치하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면 후안무치를 구사하기 어려워진다. 후안무치를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하는 기분으로 체화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의 상식적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해도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같은 후안무치 자질을 가진 측근 인사들에게 의존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대중은 묘한 동물이다. 그들은 정치인의 후안무치가 필요악임을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어느 순간 돌아서서 후안무치하다고 욕을 한다. 언제 어느 경우에 그러는지 그건 확실치 않다. 그들은 “해도 너무하네”라고 하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서부터 너무한 건지 그들 자신도 답을 갖고 있진 않다. 그래서 정치는 늘 대중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임이 된다.
1920년대 후반 미국 마피아 조직을 주름잡았던 알 카포네는 “상류사회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훌륭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폭이 감히 그런 말을 해? 아니다. 상류층의 후안무치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조폭도 당당해진다. 일반 대중인들 무얼 망설이랴. 민주화 이후 한국인에게 나타난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후안무치의 일상화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의 반열에 올랐다. 보수파들은 그게 민주화 탓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게 아니다. 후안무치의 엘리트 독식 체제에서 대중화 체제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긍정적 변화로 보는 게 옳다.
그건 마치 아줌마들의 후안무치를 비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남존여비 가부장 체제하에서 처녀 때까지 억눌려왔던 후안무치 욕구가 애 낳고 폭발하면 원인부터 따져보는 게 옳다. 나는 후안무치해도 좋지만 너는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후안무치의 평준화는 사회 정의다.
독일에 페터 슬로터다이크라는 괴짜 철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위선적 계몽주의’를 질타하면서 ‘뻔뻔함’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이자 실천 항목으로 제시했다. 이론과 명분대로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표현 양식이라 할 뻔뻔함을 발휘하면서 문제를 짚어보자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심오한 뜻이 있겠지만, 후안무치를 다시 보자는 메시지만큼은 그대로 접수해도 좋겠다. 사실 한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돼온 것이다. 한동안 열풍이 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이 기(氣) 살려주기 운동’도 기실 따지고 보면 이 후안무치한 세상에서 내 새끼 경쟁력 키워주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
지금 이 후안무치 이야기를 행여 냉소로 이해하면 크게 실수하는 거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문법에 대해 탐구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이 이대로 좋은가 하는 걸 정색을 하고 살펴보자는 뜻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혁명의 순수성은 2주일을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민주화운동이나 개혁의 순수성은 얼마나 갈까? 2개월? 2년? 얼마이건 그 주체는 모른다. 왜 그런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주체에겐 후안무치 자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보기엔 이미 순수하지 않은데도 자신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걸 무슨 수로 막으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이 라는 책에서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고 독설을 퍼부었을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민주화운동을 한 인사들은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계속 밖에서만 떠돌아야 하고, 공직은 운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독식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천규석이 말하고자 한 건 운동가들의 공직 진출 자체가 아니라 공직 진출 이후 보여주는 모습일 거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글과 말로만 운동을 했던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혹 나는 나의 글을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모든 지식인들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후안무치는 정치인들만의 무기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석은 언젠가 ‘글쓰기의 무서움’이란 글에서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발 밑에 조회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는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모두에게 긴요한 덕목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자신이 실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옳은 메시지라면 널리 전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반론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로 인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너무 심각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한국 사회엔 ‘담론의 거품’이 너무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좀 유치한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 구체적 각론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이야기는 유치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적어도 수준의 잡지에선 ‘부국강병론’이니 ‘소득 2만달러론’이니 하는 것은 경멸받기 딱 좋은 보수파 담론으로 통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멸이 과연 정직한 것인가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주의·민족주의는 무조건 때려야 진보고 품위 있는 지식인으로 통하는 이 풍토가 언행일치를 전제로 한 정직성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잠시 를 보자. 이 신문은 자주 문화적으론 ‘좌파 담론’의 상품화에 열을 올린다. 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극우성을 위장하려는 술책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을지 모르겠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그게 그 신문 독자들이 원하는 상품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가?
"잘 살아보세”는 “잘 써보세”로 바뀌고…
뫚맏맒봉 법칙’이란 게 있다. 미국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지만 일류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갖게 된 이른바 ‘보보스족’이 정치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과거 운동권 시절과 비교해 갖게 되는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문화적으로만 진보 냄새를 피우는 걸 말한다.
과연 의 독자들은 독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물론 삼위일체를 고수하는 게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법은 없다. 얼마든지 각기 따로 놀 수 있다. 다만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일관된 경향성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김대중 정권은 물론이고 노무현 정권이 경제적으로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성장주의 패러다임’이 과연 한국인 다수가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인가?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닌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사라진 유물이 아니다. “잘 써보세”로 바뀌었을 뿐이다. 민주시민의 윤리는 소비자 윤리로 대체되었다. 소비자가 악덕 상인에 분노하듯, 민주시민은 악덕 정치권에 분노하는 정도의 윤리는 갖고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뿐이다. 민주주의는 소비주의와 결탁했다. 민주시민은 그 이상의 선은 넘으려 하지 않는다.
일부에 지나지 않을망정, 그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매년 해외여행을 하고 중형차를 굴리고 골프를 치기도 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은 돈으로 이른바 ‘대학 개혁’을 하고 있지만, 그것에 저항하진 않으며 그로 인한 수혜만 누린다.
이런 지적은 부당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았던 미국의 노엄 촘스키가 짜증을 냈듯이, 유치하다고 짜증을 낼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논점은 지식인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의 담론 생산이 현실 세계와 맺는 관계다. 그 괴리가 클수록 지식인의 ‘상징 자본’은 튼실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세계를 바꾸는 데 어떤 실천력을 갖는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와 법의 차원에선 한국 사회는 개혁을 할 만큼 했다. 물론 할 게 더 남아 있고 앞으로 더욱 해야겠지만, 제도와 법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남아 있으니 그게 바로 의식과 행태의 영역이다. 예컨대 정치판에선 ‘보스 정치’가 거의 사라졌지만, 대학엔 건재하다. 학연주의와 파벌주의는 정치권 뺨을 치고도 남는다. 대학 내 선거 수준도 직업 정치판 선거보다 높지 않다는 이유로 관리권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빼앗겼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 그 바닥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늘 사회를 향해서만 설교를 늘어놓는다.
정치권 동지들을 새삼 경외하다
자신의 후안무치에 대해 가끔이나마 자각을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글쓰기가 몹시 싫어지니까 말이다.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게 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언행일치를 하는 사람 위주로 글쓰기 시장이 물갈이돼 담론과 세상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에 따라 실천력도 강해질 게 아닌가. 정치권의 후안무치 동지들에게 새삼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들에겐 이런 고민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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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때 정치인의 전유물이었던 ‘뻔뻔함’은 이제 대중들의 일상 속으로 … 과연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다. “뻔뻔스럽고 부끄러워함이 없음”이란 뜻이다. 후안무치에 친화적인 정치판에선 상대편을 비난할 때 자주 쓰는 상용어지만, 보통 사람들 사이에선 큰 욕이다. 넓고 묽게 보자. 후안무치를 도덕의 경계선상에 걸쳐 있는 하나의 인간적 특성으로 보자.
김구가 이승만의 적수가 되지 못한 이유
정치인의 제1 자질이 무엇일까? 단연 후안무치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도덕감정을 고수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인에겐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고 상황에 따라 언행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볼 것도 없이 한국 현대사만 살펴봐도 이는 분명해진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경쟁자들과 비교해볼 때 후안무치 자질이 더 뛰어났다. 예컨대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해보라. 김구도 다른 독립투사에 비하면 꽤 후안무치한 편이었지만 감히 이승만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는 대통령들에게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은 기본이고 거기에 후안무치 자질이 더해져야만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영삼부터 살펴보자. 3당 합당과 내각제 각서 파동은 김영삼의 탁월한 후안무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정계은퇴 식언과 ‘20억+알파’ 사건은 김대중의 후안무치 능력을, 대선후보 전 동교동계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지역주의 양비론의 일시적 위장 등은 노무현의 후안무치 능력을 입증해준다.
대체적으로 보아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후안무치를 저지른 건수가 더 많고 농도가 더 강하다. 피부가 얇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거나 조직의 리더가 된 걸 본 적이 있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유능하진 않았을 게다.
정치는 인간의 야수적 속성을 다루는 영역이다. 어느 영역치고 그 속성과 무관하랴만, 본격적인 권력투쟁이라는 점에서 정치를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경제 영역의 투쟁도 무섭긴 하지만, 그쪽은 이익 중심이기 때문에 이익과 더불어 이념·명분 등이 칼춤을 추는 정치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는 경제계의 거물이었던 정주영과 김우중이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기웃거리다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가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영역에서도 후안무치가 경쟁력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최근의 삼성과 현대차 사태를 보라. 왜 잘나가는 재벌그룹 총수일수록 후안무치의 농도가 강한가? 그건 평소 후안무치했기 때문에 그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답으로 대신하면 되겠다.
주변을 둘러보기 바란다. 후안무치 자질이 비교적 뛰어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게다. 그들에겐 좋은 점이 많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교섭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비교적 탁월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이미 권력을 가진 쪽은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즉, 같은 선수를 알아보고 요청·요구에 응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뻔뻔함'은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자신의 후안무치를 자각할 수 있는가? 없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싹튼다. 자신이 후안무치하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면 후안무치를 구사하기 어려워진다. 후안무치를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하는 기분으로 체화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의 상식적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해도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같은 후안무치 자질을 가진 측근 인사들에게 의존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대중은 묘한 동물이다. 그들은 정치인의 후안무치가 필요악임을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어느 순간 돌아서서 후안무치하다고 욕을 한다. 언제 어느 경우에 그러는지 그건 확실치 않다. 그들은 “해도 너무하네”라고 하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서부터 너무한 건지 그들 자신도 답을 갖고 있진 않다. 그래서 정치는 늘 대중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임이 된다.
1920년대 후반 미국 마피아 조직을 주름잡았던 알 카포네는 “상류사회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훌륭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폭이 감히 그런 말을 해? 아니다. 상류층의 후안무치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조폭도 당당해진다. 일반 대중인들 무얼 망설이랴. 민주화 이후 한국인에게 나타난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후안무치의 일상화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의 반열에 올랐다. 보수파들은 그게 민주화 탓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게 아니다. 후안무치의 엘리트 독식 체제에서 대중화 체제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긍정적 변화로 보는 게 옳다.
그건 마치 아줌마들의 후안무치를 비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남존여비 가부장 체제하에서 처녀 때까지 억눌려왔던 후안무치 욕구가 애 낳고 폭발하면 원인부터 따져보는 게 옳다. 나는 후안무치해도 좋지만 너는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후안무치의 평준화는 사회 정의다.
독일에 페터 슬로터다이크라는 괴짜 철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위선적 계몽주의’를 질타하면서 ‘뻔뻔함’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이자 실천 항목으로 제시했다. 이론과 명분대로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표현 양식이라 할 뻔뻔함을 발휘하면서 문제를 짚어보자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심오한 뜻이 있겠지만, 후안무치를 다시 보자는 메시지만큼은 그대로 접수해도 좋겠다. 사실 한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돼온 것이다. 한동안 열풍이 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이 기(氣) 살려주기 운동’도 기실 따지고 보면 이 후안무치한 세상에서 내 새끼 경쟁력 키워주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
지금 이 후안무치 이야기를 행여 냉소로 이해하면 크게 실수하는 거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문법에 대해 탐구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이 이대로 좋은가 하는 걸 정색을 하고 살펴보자는 뜻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혁명의 순수성은 2주일을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민주화운동이나 개혁의 순수성은 얼마나 갈까? 2개월? 2년? 얼마이건 그 주체는 모른다. 왜 그런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주체에겐 후안무치 자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보기엔 이미 순수하지 않은데도 자신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걸 무슨 수로 막으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이 라는 책에서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고 독설을 퍼부었을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민주화운동을 한 인사들은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계속 밖에서만 떠돌아야 하고, 공직은 운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독식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천규석이 말하고자 한 건 운동가들의 공직 진출 자체가 아니라 공직 진출 이후 보여주는 모습일 거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글과 말로만 운동을 했던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혹 나는 나의 글을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모든 지식인들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후안무치는 정치인들만의 무기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석은 언젠가 ‘글쓰기의 무서움’이란 글에서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발 밑에 조회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는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모두에게 긴요한 덕목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자신이 실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옳은 메시지라면 널리 전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반론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로 인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너무 심각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한국 사회엔 ‘담론의 거품’이 너무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좀 유치한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 구체적 각론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이야기는 유치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적어도 수준의 잡지에선 ‘부국강병론’이니 ‘소득 2만달러론’이니 하는 것은 경멸받기 딱 좋은 보수파 담론으로 통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멸이 과연 정직한 것인가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주의·민족주의는 무조건 때려야 진보고 품위 있는 지식인으로 통하는 이 풍토가 언행일치를 전제로 한 정직성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잠시 를 보자. 이 신문은 자주 문화적으론 ‘좌파 담론’의 상품화에 열을 올린다. 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극우성을 위장하려는 술책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을지 모르겠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그게 그 신문 독자들이 원하는 상품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가?
"잘 살아보세”는 “잘 써보세”로 바뀌고…
뫚맏맒봉 법칙’이란 게 있다. 미국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지만 일류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갖게 된 이른바 ‘보보스족’이 정치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과거 운동권 시절과 비교해 갖게 되는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문화적으로만 진보 냄새를 피우는 걸 말한다.
과연 의 독자들은 독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물론 삼위일체를 고수하는 게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법은 없다. 얼마든지 각기 따로 놀 수 있다. 다만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일관된 경향성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김대중 정권은 물론이고 노무현 정권이 경제적으로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성장주의 패러다임’이 과연 한국인 다수가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인가?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닌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사라진 유물이 아니다. “잘 써보세”로 바뀌었을 뿐이다. 민주시민의 윤리는 소비자 윤리로 대체되었다. 소비자가 악덕 상인에 분노하듯, 민주시민은 악덕 정치권에 분노하는 정도의 윤리는 갖고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뿐이다. 민주주의는 소비주의와 결탁했다. 민주시민은 그 이상의 선은 넘으려 하지 않는다.
일부에 지나지 않을망정, 그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매년 해외여행을 하고 중형차를 굴리고 골프를 치기도 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은 돈으로 이른바 ‘대학 개혁’을 하고 있지만, 그것에 저항하진 않으며 그로 인한 수혜만 누린다.
이런 지적은 부당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았던 미국의 노엄 촘스키가 짜증을 냈듯이, 유치하다고 짜증을 낼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논점은 지식인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의 담론 생산이 현실 세계와 맺는 관계다. 그 괴리가 클수록 지식인의 ‘상징 자본’은 튼실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세계를 바꾸는 데 어떤 실천력을 갖는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와 법의 차원에선 한국 사회는 개혁을 할 만큼 했다. 물론 할 게 더 남아 있고 앞으로 더욱 해야겠지만, 제도와 법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남아 있으니 그게 바로 의식과 행태의 영역이다. 예컨대 정치판에선 ‘보스 정치’가 거의 사라졌지만, 대학엔 건재하다. 학연주의와 파벌주의는 정치권 뺨을 치고도 남는다. 대학 내 선거 수준도 직업 정치판 선거보다 높지 않다는 이유로 관리권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빼앗겼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 그 바닥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늘 사회를 향해서만 설교를 늘어놓는다.
정치권 동지들을 새삼 경외하다
자신의 후안무치에 대해 가끔이나마 자각을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글쓰기가 몹시 싫어지니까 말이다.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게 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언행일치를 하는 사람 위주로 글쓰기 시장이 물갈이돼 담론과 세상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에 따라 실천력도 강해질 게 아닌가. 정치권의 후안무치 동지들에게 새삼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들에겐 이런 고민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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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1일 월요일
신문산업을 통해 본 독과점 - 시장의 한계
[유시민의 경제학카페 p164-204]
신문배달업과 생산업이 통합된 우리나라의 현 상황과 그로 야기되는 신규사업자의 진입장벽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변화를 통하여 신문이 독자를 따라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서비스, 성향 등)
하지만 완전 경쟁이 될 경우, 신규진입이 쉬워진다 해도 현재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는 신문사들이 미치는 영향이 작아지며 주도권이 독자에게 넘어갈 것인가. (언론주도, 사회교육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와 함께 시장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의료계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중에서 '괴짜경제학' 부동산업자의 예에서도 설명됐던 정보의 독점과 불균형이 있다.
신문배달업과 생산업이 통합된 우리나라의 현 상황과 그로 야기되는 신규사업자의 진입장벽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변화를 통하여 신문이 독자를 따라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서비스, 성향 등)
하지만 완전 경쟁이 될 경우, 신규진입이 쉬워진다 해도 현재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는 신문사들이 미치는 영향이 작아지며 주도권이 독자에게 넘어갈 것인가. (언론주도, 사회교육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와 함께 시장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의료계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중에서 '괴짜경제학' 부동산업자의 예에서도 설명됐던 정보의 독점과 불균형이 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나를 배반한 역사(박노자) p.79-97]
개인주의는 곧 이기주의로 치부되는 우리나라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개인의 치부와 출세 지향은 개인주의가 아닌 제도에 기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라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개인보다는 무조건 집단을 우선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수긍하나 바람직한 개인주의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 같다. 필자가 말하는 개인주의란 각 개인의 (자신만이 아닌) 가치를 최고로 여기고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을 평소 내가 생각해 오던 성장은 자아의 확대를 뜻한다는 것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는 얼마나 개인주의를 강조하는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족한 항목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주의는 나아가 다양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주의는 곧 이기주의로 치부되는 우리나라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개인의 치부와 출세 지향은 개인주의가 아닌 제도에 기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라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개인보다는 무조건 집단을 우선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수긍하나 바람직한 개인주의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 같다. 필자가 말하는 개인주의란 각 개인의 (자신만이 아닌) 가치를 최고로 여기고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을 평소 내가 생각해 오던 성장은 자아의 확대를 뜻한다는 것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는 얼마나 개인주의를 강조하는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족한 항목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주의는 나아가 다양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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