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강준만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강준만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07년 6월 26일 화요일

한국 정치 ‘아부의 정석 10’

적 만들고 명분은 그럴듯하게…
아부에 면역되면 자기교정 능력 없어져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따져보자고 한다. 좋은 일이지만 더 시급한 게 있다.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어떻게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가? 이게 가장 중요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 김영삼·김대중 정권의 말기가 비참했던 것도 바로 이런 문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그런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

한나라당의 내분이 실감나게 보여준 건 ‘줄서기’와 ‘줄세우기’였다. 한나라당 집권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지도자의 오류를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이는 한나라당만의 문제도 아니고 역대 정권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 정치의 문제다. 대통령제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더욱 근원적인 것이다.


△ 한국 정치가 지도자의 오류를 통제할 수 없는 근본적 원인 중 하나가 아부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무회의에 앞서 넥타이를 매지 않고 나오면, 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공무원이 따라한다.(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당파성’에 대한 엄청난 착각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 동시에 그 힘을 숭배하는 이중성을 잠시 접고, 정치를 정직하게 바라보자. 아니 우리 자신부터 보자. 우리는 공정성에 대단히 취약하거나 서투른 사람들이다. ‘호감’과 ‘반감’이 공정성을 먹어버린다. 공정한 규칙은 모든 집단에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이 진술에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걸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지지하는 집단엔 관대한 반면, 내가 반대하는 집단엔 엄격하다. 이걸 ‘당파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정성이 없거나 약하니, 사회적 갈등은 합리적 해소의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늘 문자 그대로 이전투구(泥田鬪狗)로 갈 수밖에 없다. 이미 갈라진 편의 대세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조율하거나 바꾸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는 자기 편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똑같은 짓이라도 상대편이 하면 타도해야 할 반민주적 작태지만, 우리 편이 하면 개혁을 위한 불가피성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되면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지도자의 비위를 맞추려는 아부꾼만 난무하게 된다. 아무리 같은 편이라도 아부를 지적해 비판할 수 있을 정도의 긴장이 그 집단 내에 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부, 이거 의외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한국 정치의 급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시절 주변의 아부꾼들에 의해 ‘세기의 태양’ ‘구국의 태양’ ‘인류의 등대’ ‘현대의 성자’ 등으로 극찬됐다. 우리는 지금 그걸 보고 어이없어하며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진보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우리는 ‘태양’ ‘등대’ ‘성자’ 같은 언어 구사의 촌스러움에 대해 웃는 것이지, 아부 자체를 멀리할 정도로 진보하진 않았다.

미국 언론인 리처드 스텐겔은 <아부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아부의 정석’으로 “그럴듯하게 하라”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말라” “칭찬과 동시에 부탁하지 말라” “여러 사람에게 같은 칭찬을 되풀이하지 말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 등을 들었다.

다 좋은 말이지만, 아부의 기술이 미국보다 더 발달한 한국에선 한 차원 더 높게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다.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는 ‘기술’이 아니라 기본 조건이다. 인터넷 덕분에 이젠 아부가 주로 공론장에서 행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정교한 이론과 실무가 필요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아부의 정석’은 다음 10가지다.

모든 의견에 무조건 끄덕끄덕하라

첫째, 명분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라. 이건 그냥 “그럴듯하게 하라”는 말과 비슷한 것 같지만,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이다. 한국인은 명분에 약하다. 자신이 아부를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반드시 거창한 명분과 연결해야 한다.

둘째, 신선하게 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않는 걸로는 부족하다.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독창성을 발휘해야 한다. 궤변이라도 파격적인 이설(異說)을 제시하는 아부가 평범한 아부보다 훨씬 더 큰 파괴력이 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한다.

셋째,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는 한국에선 안 통한다. 아부꾼들 사이에도 경쟁이 있기 때문에 보스의 머릿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려면 무조건 동의하는 건 필수다.

넷째, 거대하고 흉악한 적을 창출하라. 보스에 대한 아부를 적에 대한 증오의 그늘에 가려지게 할 수 있는 동시에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최일선에서 그 적과 싸우는 ‘투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면 적어도 보스에 대한 아부로 인해 욕먹을 일은 없다.

다섯째, 보스를 불쌍하게 보이도록 만들어라. 아주 훌륭한 분인데 그 진면목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고 슬픈 표정을 지어라. 이건 아부 효과와 더불어 자신이 보스를 잘 아는 ‘실세’라는 효과를 내는 일석이조(一石二鳥)다.

여섯째, 당당하게 호통치면서 아부하라. 이른바 적반하장(賊反荷杖) 수법이다. 보스를 미화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말고 보스에 대한 비판도 박살내는 호전성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너무도 당당한 자세에 압도돼 그건 아부가 아니라 소신과 양심의 표현일 거라고 믿게 된다.

일곱째, 자신이 아부로 얻은 걸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사람들은 아부꾼의 당당한 자세에 압도되다가도 어느 순간 아부꾼이 아부로 큰 이익을 취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해체하기 위해 자신은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무소유’ 정신의 화신인 양 쇼를 할 필요가 있다.

여덟째, 보스를 ‘싸가지’ 없게 평가하는 쇼맨십을 발휘하라. 기질상 결코 아부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만천하에 과시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아부의 효과도 높아진다. 물론 이 수법은 그런 정도는 암묵적 이해를 해줄 수 있을 정도로 보스의 신뢰를 얻은 다음에 구사해야 한다.


△ 유권자의 무관심은 자랑이 아니다.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온다. 정치인들이 선거철 시장에 들러 유권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아홉째, 자신도 괴롭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아무리 쇼를 잘해도 아부에 대한 비판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 비판에 과장되게 반응하면서, 왜 자신의 진정성을 이리도 몰라주는지 안타깝고 서글프다고 징징 우는 소리를 하라. 역사가 알아줄지 모르겠다는 등 헛소리를 해대는 것도 좋겠다.

열째, 자신에게도 아부하는 사람들을 키워라. 이는 아부의 힘을 증강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부에 대한 비판을 원천봉쇄하는 효과를 낳는다. 비판자들이 아부꾼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의 집단공격이 무서워 아부꾼을 비판하는 걸 삼가게 된다는 것이다. 명심하라. 아부의 순간은 쓸망정 그 열매는 달고 영원하다.

선거 뒤엔 ‘조폭 공동체 의식’

혹 이야기가 너무 심각해질까봐 잠시 좀 웃자고 과장되게 표현했지만, 이상에서 말한 ‘아부의 정석’은 한국 정치에 자기교정 능력이 없는 이유를 시사해주기엔 족하다. 전 사회 영역에 걸쳐 ‘보스 1극 권력집중 체제’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아부는 생존과 성장의 필수이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러한 아부에 면역돼 있다. 정치 분야에선 상대편 내부의 아부엔 혐오를 드러내지만, 우리 편 내부의 아부엔 열광한다.

왜 그런 정신상태가 가능한가? 무슨 선거든 선거판 현장을 수일간 체험학습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정치는 고립돼 있는 ‘섬’과 같다. 어깨띠를 두르고 시장을 돌아다녀보라. 악수를 자주 거절당하는 건 기본이고 등에 대고 욕하는 소리마저 쉽게 들을 수 있다.

유권자는 냉담하다 못해 살벌하고, 언론은 사사건건 흠만 잡아내 보도하려고 발버둥친다. 경쟁자들은 온갖 인신공격에 흑색선전까지 마다하지 않으니, 이쪽도 앉아서 당할 순 없어 같은 수법으로 맞받아쳐야 한다. 이거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선거에 출마한 적이 없다면 감히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명언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말이지 후보들은 보기에 불쌍하다. 충성할 참모진 구성하랴, 선거자금 마련하랴, 유권자들의 냉대에도 미소 지으랴, 존경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후보들은 당선된 뒤에 유권자들에게 복수한다. 자신을 위해 충성한 사람들에게 ‘낙하산’을 태워주고, 돈 댄 사람들에게 들통나지 않게 특혜를 주고, 자신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한다. 이른바 ‘조폭 공동체 의식’이다. 이 의식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아부’란 단어는 아예 없다. 조직원이 보스에게 무조건 충성과 찬양을 바치는 건 아부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본질이다.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는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고위 공직은 개인적인 ‘코리안드림’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쟁탈해야 할 이권이요, 비즈니스가 된다. 물론 이는 ‘줄서기’와 지도자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이유가 된다.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떤 고난을 겪고 희생을 했는지 알아?” 하는 마음이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오고, 이게 또 정치혐오를 낳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한국 정치는 복수혈전이다. 우리는 고위 공직자들에게 공복(公僕)이 될 걸 요구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과연 그런 요구를 할 자격이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특히 ‘바람 정치’가 문제다. 유권자들이 바람에 휩쓸리는 건 일시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도 있지만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정치 발전엔 치명적이다. 바람만 잘 타면, 바람이 부는 쪽으로 줄만 잘 서면, 길 가다 금배지를 주울 수도 있는 풍토는 유권자들이 만든 것이지 정치인들이 만든 게 아니다. 유권자들이 그렇게 해놓고선 정치인들의 줄서기를 비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그 어떤 바람에 휩쓸리더라도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을 평가해 옥석을 구분해주는 정도의 성의를 보이면 모르겠는데, 그것마저 없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평소 ‘개판’을 쳤더라도 바람과 줄만 잘 타면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공할 수도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누가 ‘줄서기’를 두려워하겠는가? 정당을 장난감처럼 여겨 깨부수고 다시 만들고 또 깨부수고 다시 만드는 작태를 삼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바람정치’의 좋은 점이라는 것도 반독재 투쟁 시절에나 의미가 있었지만, 아직도 그 습속은 계속되고 있다. 반감을 토대로 삼은 ‘역바람정치’도 ‘바람정치’의 일종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지도자 추종주의다. 지도자 추종주의가 계속되는 한,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길이 없다. 한국 정치가 ‘기대와 환멸’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다는 진단은 바로 지도자 추종주의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란 국민 뜯어먹기’라는 역발상

그럼에도 시민사회의 모든 담론은 정치인만 욕하고 유권자들의 성찰을 촉구하는 건 전무하다. 물론 유권자들이 그러는 건 역사와 구조의 그 어떤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보자면 정치인들에겐 면책 사유가 없겠는가? 정치인 못지않게 유권자들도 성찰의 주체가 되어 마땅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의 복수’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역설 같지만, 발상의 전환도 해봄직하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냉소와 혐오를 보내는 이유는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교과서적 원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 전제를 믿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연연해하는가?

반대로 정치란 원래 ‘국민 뜯어먹기’를 주업으로 삼는 고등 사기 행위라는 걸 전제로 삼아보자. 개혁을 내세운 집단들도 반개혁 세력과의 대치 국면을 조성해 ‘증오의 마케팅’ 공세로 자기들이 누리는 기득권과 특권을 계속 독식하려는 사기꾼에 불과하며, 한국엔 여야가 아니라 ‘엘리트 대 비엘리트’ 또는 ‘출세한 사람 대 출세하지 못한 사람’의 구도만 있을 뿐이라는 신념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그런 자세를 가지면 한국 정치에도 아름다운 사람과 장면이 많다는 데 주목하면서 정치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

좀더 현실적인 수준에서 대안을 모색해보자면, 정치 외풍에서 자유로운 ‘중립지대’를 늘려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각급 지도자의 인사·예산권의 상당 부분을 시민사회의 자율체제로 돌려 정치의 영향력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있겠지만, 그건 한국 시민사회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니 인내를 갖고 하나씩 고쳐나가는 게 옳다. ‘정치의 복수’를 피해보고 싶은 마음에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펴보긴 했지만, 어디까지 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출처: 한겨레21 [원본]

2007년 6월 25일 월요일

최고•최대•최초, 행복하십니까?

[한겨레] [강준만의 세상읽기]
초고층 건물에 집착하고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으로 인격을 재는 한국인…좌파 지식인들도 거대담론 증후군…
‘지속가능한 우쭐’을 위해 성찰이 필요하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 사회는 오래전부터 ‘동양 최고’ ‘동양 최대’ ‘동양 최초’ ‘세계 최고’ ‘세계 최대’ ‘세계 최초’ 등과 같은 ‘최고병’ ‘최대병’ ‘최초병’을 앓아왔다. 역사적으로 너무 당한 경험이 많아서인지 한국인들은 최고•최대•최초주의에 한이 맺혔다. 최고•최대•최초를 향해 목숨 걸고 질주한다. 황우석 사건에 대해 말이 많지만, 남 이야기인 척하진 말자. 그거 우리 이야기고 내 이야기다.

초고층건물론의 원조는 이건희 회장

최고•최대•최초주의가 한국 고유의 것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예컨대, 하늘로 치솟은 초고층 빌딩을 가리키는 마천루를 만드는 경쟁은 서양인들이 먼저 시작했다. 유럽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은 1932년 뉴욕에 102층짜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만들어놓고 유럽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거 세계 최고다. 너네 이런 것 없지?” 이에 열받은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대해 말하는 뉴욕 사람에게선 시민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자기네 시정(市政)에 대해서도 항상 그런 자부심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라고 썼다.

자부심에 집착하다 실패한 경우도 있다. 북한은 88 서울올림픽에 자극을 받아 89년 제13차 평양청년축전을 과도한 비용을 낭비해가면서 치렀는데 이때부터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기업과 합작으로 평양에 세우려다 중단한 105층짜리 유경호텔이 그런 과시 사업의 하나였다. 지금도 평양에는 공사가 중단된 105층의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최근 들어 ‘세계 최대’ ‘세계 최고’ ‘세계 최초’에 집착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두바이다. 아랍에미리트에 소속된, 인구 120만 명의 작은 토후국이다. 세계에 이름을 알릴 길이 없어 거대한 토목공사로 ‘세계 최대’ ‘세계 최고’ ‘세계 최초’의 기록을 만들어내느라 여념이 없다. 국가 홍보 전략인 셈이다.

두바이의 그런 집착은 ‘콤플렉스’가 아니라 ‘실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국은 실질을 말하기엔 제법 큰 나라가 돼버렸다. 한국은 여전히 자부심과 자존심에 집착한다. 그래서 초고층 건물을 짓자는 이야기도 계속 나오고 있다.

애국심이 강한 소설가 이문열은 여러 나라들이 저마다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초고층 건물로 국가적 자긍심을 고취하기도 하고 경제성장을 과시하기도 하는데, 서울도 지금쯤은 세계가 돌아볼 만한 초고층 건물 하나쯤 가져도 좋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초고층건물론의 원조는 삼성 회장 이건희다. 이건희는 지금의 타워팰리스 자리에 원래 102층짜리 초대형 사옥을 지으려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69층짜리 타워팰리스로 만족해야 했다. 이건희는 최고•최대•최초주의의 전도사이기도 하다. 사실 이게 바로 그가 인기를 누리는 비결이다. 그의 어록을 살펴보면 ‘최고•최대•최초’라는 단어들이 난무한다. 그와 삼성의 오빠부대 요원들도 ‘반도체 세계 1위’ ‘LCD 세계 1위’ ‘휴대폰 세계 3위’ 등과 같은 순위를 들먹이기에 바쁘다.

한국 민주주의도 과도하게 폄하?

사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다. 올림픽 시상식에서 은메달 받고서도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선수는 한국인밖에 없다. 이것 하나로 다 정리된다. 이런 현실이 시사하듯이, 한국의 최고병•최대병•최초병이 조만간 치유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간 많은 걸 이루었지만 아직도 한국인의 자부심 또는 자존감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2005년 6월 취업 포털 잡링크에 따르면 대학생을 대상으로 국적 포기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5.8%가 ‘필요하다면 국적을 포기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이화여대 학보사가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5년 9월 이대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출생 전 자신의 의지로 조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62%의 학생이 선택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왜 그럴까? 한국이 그만큼 형편없는 나라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비교 대상에 문제가 있다. 신문도 좋고 학자들의 논문도 좋다. 국가 간 비교 사례를 보라. 예외 없이 선진국과의 비교 일색이다.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나라와 비교하는 법은 없다. 비교 대상은 죽으나 사나 미국, 일본, 유럽이다. 그거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제공되는 비교 연구 자료가 그것밖에 없으니 그런 경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늘 비교만 했다 하면 선진국과 비교하는 버릇은 빨리빨리 정신에 따른 과욕일까? 한국 민주주의도 그런 비교 대상이 돼 과도하게 폄하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주장을 펴는 대표적인 학자는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강정인이다.

강정인은 ‘서구 민주화 경험에 비춰본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라는 논문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짧은 역사는 생각하지 않고 서구 중심주의적 시각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폄하하는 걸 비판하면서 “한국의 현실은 비록 급진주의자들의 눈에는 불만스러울지언정 참을성 많은 역사가의 눈에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서구 국가들은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로 성숙하는 데 적어도 200년 이상 걸렸다”면서 “지난 50년간 이룩한 한국의 민주화를 자기 비하적으로 ‘일탈’ ‘파행’ ‘왜곡’으로 보는 시각을 시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선진국과의 비교 중독증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늘 더 높은 곳을 향해 따라잡자는 전투성을 배양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국민적 자기 모멸 또는 자학을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이 큰 성과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계속 자존감 투쟁에 일로매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면 최고병•최대병•최초병은 사라질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사이즈의 문제는 남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토 크기와 인구 크기는 세계 대비 각각 0.078%에 0.73%다. 이걸 모른 척하고 넘어갈 한국인이 아니다.

큰 사이즈에 민감, 얼굴 크기만 예외

한국인의 자존감을 위한 투쟁은 꼭 밖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내부적으로 생성되기도 한다. 그 내부적 생성 요인마저 처음엔 밖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일망정 시간이 흐르면서 내면화된 질서로 자리잡게 된다는 뜻이다. 밖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내적인 권위주의를 낳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질곡에 휘둘린 사람들일수록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핵심은 삶의 모든 것이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내면적 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밖에서 몰아치는 격랑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에 늘 밖과의 비교와 관계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이게 한국 사회에 각종 ‘신드롬’을 양산하는 심리적 기반이기도 하다.
밖과의 관계에선 늘 사이즈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한국인은 사이즈에 대단히 민감한 민족이다. 꼭 크다고 성능까지 좋은 건 아닌데 왜 그렇게 큰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작은 걸 크게 늘리기 위해 별일을 다 한다. 신체의 특정 부위에서부터 아파트 평수에 이르기까지 개조하는 걸 무척 사랑한다. 그래도 얼굴 크기는 작을수록 좋다고 보는 게 기특하다.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 크기로 인격을 재거나 사람을 차별한다는 건 이젠 상식이 됐다. 특히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왜 그렇게 큰 차를 좋아하고 경소형차를 천대하는지 신기할 정도다. 한동안 티코를 조롱하는 개그가 유행했던 걸 생각해보라. 티코의 바퀴가 도로 위의 껌에 붙어 꼼짝도 안 하더라는 둥, 티코가 그랜저를 추월해 어찌된 일인가 알아봤더니 때마침 거세게 분 바람에 날아갔기 때문이라는 둥, 자기 승용차도 없는 사람들까지 주제를 모르고 그걸 개그랍시고 해대며 키득거리곤 했다.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경소형차 이용자의 82%가 차가 작다는 이유로 무시•차별당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총 쏘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다. 10년 전엔 충남 아산시 국도에서 볼보 승용차와 프레스토 승용차가 추월 경쟁을 벌이다 볼보 승용차에 탄 사람이 공기총을 쏴 프레스토 승용차를 탄 사람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왜 볼보가 프레스토를 향해 총을 쐈겠는지 각자 생각해보시라.

사정이 그와 같으니 경소형차 사용 비중이 높을 리 없다. 일본이 20%를 넘는 것에 비해 한국은 4.5%로 일본의 5분의 1 수준에 머물러 있다. 비슷한 이유로 자동차 교체주기도 엄청나게 빠르다. 미국과 일본의 자동차 교체주기와 비교해 한국은 2배 이상 빠르다.

거창한 개념에 매료되기 시작하면…

전국의 자동차 번호판이 통일되면서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자동차 번호판마저 차별의 요인이다. ‘서울 52’나 ‘서울 55’로 시작하는 서울 강남구 번호판을 달고 다니면 고급 식당이나 호텔 등에서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에, 한 해에 신규로 강남구에서 발행하는 자동차 번호판 중 강남 비거주자 비율이 절반을 웃돌았었다.

벯 것은 아름답다”는 신념은 지식계에까지 파고들었다. 이른바 ‘거대담론증’이다. 한양대 교수 임지현은 “남한 지성사의 파국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세련된 자유주의와의 공개된 논쟁 속에서 단련되지 못하고, 밀폐된 공간 속에서 ‘정통’과 ‘최대주의’의 장막 속에 안주했다는 점이다”며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은 한마디로 거대담론 지향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날카로운 지적이지만, 거대담론 지향성은 좌파 지식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거대담론이란 게 과연 무언가? 거대한 걸 이야기하는 걸 거대담론이라고 그러는가? 꼭 그렇진 않다. 실천과의 연계성이 중요하다. 예컨대, 바닥이 더러우면 우선 걸레질부터 하고 찾아온 손님을 모셔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걸레질할 생각은 않고 그 자리에서 그 집의 구조에서부터 창문과 바닥재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입으로만 떠들어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거대담론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니 ‘시대정신’이니 하는 거창한 개념에 매료되기 시작하면 모든 미시적 분석은 쓰레기통에 내던져지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크게 봐서 옳기 때문에 무조건 지지한다는 자세를 갖게 되면, 자기 성찰과 교정은 불가능해진다. 자기 성찰과 교정을 위한 시도는 크게 봐서 나쁜 편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성토의 대상이 된다. 말을 거창하게 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풍토가 조성되지 않는 한 거대담론 증후군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최고•최대•최초주의와 거대담론 증후군은 ‘우쭐’의 산물일 수 있다. ‘우쭐댄다’함은 ‘남을 의식해서 자기 자신을 꾸며서 나타내는 행동’을 말한다. 잘난 척한다, 젠체한다, 폼 잡는다, 목에 힘준다, 거들먹댄다, 으스댄다, 뻐긴다 등등이 그런 경우다. 이런 정의를 내린 심리학자 최상진은 한국인에겐 우쭐대는 기질이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금배지를 달고 다니며 외국 유학생들은 하버드나 스탠퍼드 같은 ‘알아주는 명문대학’을 실속 있는 대학보다 선호하고, 미국에 이민간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에 관계없이 벤츠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이와 유관한 현상으로 읽어볼 수 있다. 근래에 들어, 한국 사람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와 같은 발전도상국을 여행할 때, 돈을 잘 쓰며 ‘우쭐’대는 행세를 하며, 이러한 한국인의 행동에 대해 비판 기사가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는 경제 선진국인 미국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에서도 한국 사람들은 기죽지 않고 활보하면서, ‘미국 별거 없어’라고 자기들 간에 이야기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기가 살았고, 또 어떻게 보면 우쭐댄다고 볼 수 있다.”

황우석에 던진 돌을 자신에게!

물론 우쭐대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 지구상에서 일본인들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한국인들이 유일하다고 하지 않는가. 우쭐대더라도 ‘지속 가능한 우쭐’을 위해 피땀 흘려 노력하면 되는데, 불행 중 다행히도 한국인에겐 그게 있다. 그래서 한국인의 ‘우쭐’은 영원하다.

‘우쭐’은 왕성한 삶의 투쟁 의욕을 키우는 것이기도 하니,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적어도 자존감을 지키고 누리기 위한 한국인의 ‘최고•최대•최초’ 투쟁에 돌을 던지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제 밖과의 관계에서 자기 의미를 찾는 자존감이 이대로 좋은지 생각해볼 때다. 사는 게 너무 피곤하고 살벌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자존감’을 위해 황우석에게 던질 돌을 각자 자기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출처: [한겨레21 2006-02-14 11:03]

ⓒ 한겨레( 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07년 6월 12일 화요일

스크랩)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다 [한겨레21 2006-05-09 08:06]

[한겨레] 한때 정치인의 전유물이었던 ‘뻔뻔함’은 이제 대중들의 일상 속으로 … 과연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다. “뻔뻔스럽고 부끄러워함이 없음”이란 뜻이다. 후안무치에 친화적인 정치판에선 상대편을 비난할 때 자주 쓰는 상용어지만, 보통 사람들 사이에선 큰 욕이다. 넓고 묽게 보자. 후안무치를 도덕의 경계선상에 걸쳐 있는 하나의 인간적 특성으로 보자.
김구가 이승만의 적수가 되지 못한 이유
정치인의 제1 자질이 무엇일까? 단연 후안무치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도덕감정을 고수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인에겐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고 상황에 따라 언행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볼 것도 없이 한국 현대사만 살펴봐도 이는 분명해진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경쟁자들과 비교해볼 때 후안무치 자질이 더 뛰어났다. 예컨대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해보라. 김구도 다른 독립투사에 비하면 꽤 후안무치한 편이었지만 감히 이승만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는 대통령들에게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은 기본이고 거기에 후안무치 자질이 더해져야만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영삼부터 살펴보자. 3당 합당과 내각제 각서 파동은 김영삼의 탁월한 후안무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정계은퇴 식언과 ‘20억+알파’ 사건은 김대중의 후안무치 능력을, 대선후보 전 동교동계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지역주의 양비론의 일시적 위장 등은 노무현의 후안무치 능력을 입증해준다.
대체적으로 보아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후안무치를 저지른 건수가 더 많고 농도가 더 강하다. 피부가 얇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거나 조직의 리더가 된 걸 본 적이 있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유능하진 않았을 게다.
정치는 인간의 야수적 속성을 다루는 영역이다. 어느 영역치고 그 속성과 무관하랴만, 본격적인 권력투쟁이라는 점에서 정치를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경제 영역의 투쟁도 무섭긴 하지만, 그쪽은 이익 중심이기 때문에 이익과 더불어 이념·명분 등이 칼춤을 추는 정치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는 경제계의 거물이었던 정주영과 김우중이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기웃거리다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가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영역에서도 후안무치가 경쟁력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최근의 삼성과 현대차 사태를 보라. 왜 잘나가는 재벌그룹 총수일수록 후안무치의 농도가 강한가? 그건 평소 후안무치했기 때문에 그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답으로 대신하면 되겠다.
주변을 둘러보기 바란다. 후안무치 자질이 비교적 뛰어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게다. 그들에겐 좋은 점이 많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교섭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비교적 탁월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이미 권력을 가진 쪽은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즉, 같은 선수를 알아보고 요청·요구에 응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뻔뻔함'은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자신의 후안무치를 자각할 수 있는가? 없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싹튼다. 자신이 후안무치하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면 후안무치를 구사하기 어려워진다. 후안무치를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하는 기분으로 체화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의 상식적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해도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같은 후안무치 자질을 가진 측근 인사들에게 의존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대중은 묘한 동물이다. 그들은 정치인의 후안무치가 필요악임을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어느 순간 돌아서서 후안무치하다고 욕을 한다. 언제 어느 경우에 그러는지 그건 확실치 않다. 그들은 “해도 너무하네”라고 하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서부터 너무한 건지 그들 자신도 답을 갖고 있진 않다. 그래서 정치는 늘 대중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임이 된다.
1920년대 후반 미국 마피아 조직을 주름잡았던 알 카포네는 “상류사회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훌륭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폭이 감히 그런 말을 해? 아니다. 상류층의 후안무치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조폭도 당당해진다. 일반 대중인들 무얼 망설이랴. 민주화 이후 한국인에게 나타난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후안무치의 일상화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의 반열에 올랐다. 보수파들은 그게 민주화 탓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게 아니다. 후안무치의 엘리트 독식 체제에서 대중화 체제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긍정적 변화로 보는 게 옳다.
그건 마치 아줌마들의 후안무치를 비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남존여비 가부장 체제하에서 처녀 때까지 억눌려왔던 후안무치 욕구가 애 낳고 폭발하면 원인부터 따져보는 게 옳다. 나는 후안무치해도 좋지만 너는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후안무치의 평준화는 사회 정의다.
독일에 페터 슬로터다이크라는 괴짜 철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위선적 계몽주의’를 질타하면서 ‘뻔뻔함’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이자 실천 항목으로 제시했다. 이론과 명분대로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표현 양식이라 할 뻔뻔함을 발휘하면서 문제를 짚어보자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심오한 뜻이 있겠지만, 후안무치를 다시 보자는 메시지만큼은 그대로 접수해도 좋겠다. 사실 한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돼온 것이다. 한동안 열풍이 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이 기(氣) 살려주기 운동’도 기실 따지고 보면 이 후안무치한 세상에서 내 새끼 경쟁력 키워주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
지금 이 후안무치 이야기를 행여 냉소로 이해하면 크게 실수하는 거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문법에 대해 탐구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이 이대로 좋은가 하는 걸 정색을 하고 살펴보자는 뜻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혁명의 순수성은 2주일을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민주화운동이나 개혁의 순수성은 얼마나 갈까? 2개월? 2년? 얼마이건 그 주체는 모른다. 왜 그런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주체에겐 후안무치 자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보기엔 이미 순수하지 않은데도 자신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걸 무슨 수로 막으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이 라는 책에서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고 독설을 퍼부었을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민주화운동을 한 인사들은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계속 밖에서만 떠돌아야 하고, 공직은 운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독식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천규석이 말하고자 한 건 운동가들의 공직 진출 자체가 아니라 공직 진출 이후 보여주는 모습일 거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글과 말로만 운동을 했던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혹 나는 나의 글을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모든 지식인들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후안무치는 정치인들만의 무기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석은 언젠가 ‘글쓰기의 무서움’이란 글에서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발 밑에 조회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는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모두에게 긴요한 덕목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자신이 실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옳은 메시지라면 널리 전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반론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로 인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너무 심각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한국 사회엔 ‘담론의 거품’이 너무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좀 유치한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 구체적 각론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이야기는 유치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적어도 수준의 잡지에선 ‘부국강병론’이니 ‘소득 2만달러론’이니 하는 것은 경멸받기 딱 좋은 보수파 담론으로 통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멸이 과연 정직한 것인가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주의·민족주의는 무조건 때려야 진보고 품위 있는 지식인으로 통하는 이 풍토가 언행일치를 전제로 한 정직성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잠시 를 보자. 이 신문은 자주 문화적으론 ‘좌파 담론’의 상품화에 열을 올린다. 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극우성을 위장하려는 술책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을지 모르겠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그게 그 신문 독자들이 원하는 상품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가?
"잘 살아보세”는 “잘 써보세”로 바뀌고…
뫚맏맒봉 법칙’이란 게 있다. 미국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지만 일류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갖게 된 이른바 ‘보보스족’이 정치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과거 운동권 시절과 비교해 갖게 되는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문화적으로만 진보 냄새를 피우는 걸 말한다.
과연 의 독자들은 독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물론 삼위일체를 고수하는 게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법은 없다. 얼마든지 각기 따로 놀 수 있다. 다만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일관된 경향성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김대중 정권은 물론이고 노무현 정권이 경제적으로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성장주의 패러다임’이 과연 한국인 다수가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인가?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닌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사라진 유물이 아니다. “잘 써보세”로 바뀌었을 뿐이다. 민주시민의 윤리는 소비자 윤리로 대체되었다. 소비자가 악덕 상인에 분노하듯, 민주시민은 악덕 정치권에 분노하는 정도의 윤리는 갖고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뿐이다. 민주주의는 소비주의와 결탁했다. 민주시민은 그 이상의 선은 넘으려 하지 않는다.
일부에 지나지 않을망정, 그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매년 해외여행을 하고 중형차를 굴리고 골프를 치기도 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은 돈으로 이른바 ‘대학 개혁’을 하고 있지만, 그것에 저항하진 않으며 그로 인한 수혜만 누린다.
이런 지적은 부당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았던 미국의 노엄 촘스키가 짜증을 냈듯이, 유치하다고 짜증을 낼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논점은 지식인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의 담론 생산이 현실 세계와 맺는 관계다. 그 괴리가 클수록 지식인의 ‘상징 자본’은 튼실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세계를 바꾸는 데 어떤 실천력을 갖는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와 법의 차원에선 한국 사회는 개혁을 할 만큼 했다. 물론 할 게 더 남아 있고 앞으로 더욱 해야겠지만, 제도와 법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남아 있으니 그게 바로 의식과 행태의 영역이다. 예컨대 정치판에선 ‘보스 정치’가 거의 사라졌지만, 대학엔 건재하다. 학연주의와 파벌주의는 정치권 뺨을 치고도 남는다. 대학 내 선거 수준도 직업 정치판 선거보다 높지 않다는 이유로 관리권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빼앗겼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 그 바닥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늘 사회를 향해서만 설교를 늘어놓는다.
정치권 동지들을 새삼 경외하다
자신의 후안무치에 대해 가끔이나마 자각을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글쓰기가 몹시 싫어지니까 말이다.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게 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언행일치를 하는 사람 위주로 글쓰기 시장이 물갈이돼 담론과 세상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에 따라 실천력도 강해질 게 아닌가. 정치권의 후안무치 동지들에게 새삼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들에겐 이런 고민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아닌가? 모르겠다.
ⓒ 한겨레( 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