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하재근(ears) 기자]
한나라당이 사학법을 양보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원내 1당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고 한다. 사학개혁을 추진했던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양보를 환영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 계속된 사학개혁 싸움은 한나라당의 양보로 일단락 된 것인가?
양보의 주체가 한나라당이라고 선전하는 열린우리당의 태도부터가 황당하다. 한나라당은 양보한 적이 없다. 양보한 당사자는 명백히 열린우리당이다. 그 양보의 대가는 민생법안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학법을 주고 받았다는 교육 분야 민생법안은 로스쿨법이다. 그것도 법사위에서 아직 이견이 해소되지 않았다. 이것도 황당하다.
로스쿨의 학비는 연간 수천만 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연간 수천만 원 학비의 교육과정 설치와 민생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로스쿨은 논란의 여지가 매우 크며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공론이 모아지지 않은 부문이다. 열린우리당은 그런 것을 민생법안이라며 우리 사회의 숙원인 사학법과 맞바꾸려 하고 있다.
양극화 문제는 접어두고, 그나마 상식이 통하는 나라를 만들겠다던 현 집권세력이 내세울 유일한 개혁 실적이 사학개혁이다. 열린우리당은 2002년 총선 전엔 이런 개혁을 책임지겠다며 국민에게 호소했고, 총선 후엔 이 싸움으로 몇 년간을 소모했다. 그런데 이제 한나라당의 양보를 이끌어냈다며 사학법을 재개정하려고 한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2004년 열린우리당 애초의 안은 개방형 이사가 이사 중 3분의 1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곧 '양보'했다. 2005년에 이르러 개방형 이사는 4분의 1로 줄었고, 그나마도 학교운영위원회 2배수 추천 후 재단이 임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록 미흡하나마 사학의 제왕적 족벌경영을 견제할 장치의 첫 걸음이라고 평가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거침없는 양보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2006년에 이르러 개방형 이사제를 명목상 유지하는 대신 사학에 다른 출구를 주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이사장 친인척의 학교장 임용 허용, 이사장의 타 학교법인 이사장, 교장 겸직 허용, 대학의 학교장 중임 제한 삭제, 위법 방조 임원승인 취소 조항 삭제 등이다. 교사회-학부모회-학생회 법제화나 인사위원회-징계위원회 교사회-교수회 추천 조항은 2005년도에 이미 삭제했다.
개방형 이사제를 존립시킨다는 그 명분 하나만을 가지고 국민을 현혹하며 실질적으론 지속적으로 사학개혁의 취지를 무력화해 온 것이다.
개방형 이사를 추천하는 주체는 학교운영위원회다. 그런데 학교운영위원회는 불행히도 학교 측 이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학교 운영 구조 개혁의 실질적 주체는 교사회, 학부모회, 학생회 등이다. 하지만 이 주체들은 우리당의 양보로 사학개혁에서 진작에 사라졌다. 또, 이사장의 친인척이 교장이 되고, 중임할 수 있게 되면 족벌경영을 뿌리 뽑을 수 없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2007년 4월엔 임시이사의 임기를 3년으로 제한해 비리재단이 복귀할 장치까지 마련했다. 게다가 이 모든 거침없는 양보의 행진을 감행하며 끝끝내 지키겠다고 표방했던 단 하나의 명분인 개방형 이사제도 무력화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했다.
그것이 개방이사추천위원회다. 이 위원회를 학교운영위원회/대학평의원회와 이사회가 동시에 구성, 개방형 이사를 2배수로 추천하여 이사회의 낙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이사회 자신이 개방형 이사를 추천할 권한을 갖게 되어 개방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된다.
스스로 추천하여 스스로 임명하는 이사가 어떻게 개방형 이사란 말인가? 열린우리당의 거침없는 양보는 급기야는 개방형 이사제라는 단어 하나만 남기고 그 모든 실질적 내용을 스스로 삭제하는 거대한 허무개그의 경지에 다다른 셈이다.
한나라당은 이마저도 받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개방이사추천위원회를 이사회와 학교운영위원회·대학평의원회가 동수로 구성하라고 요구했다. 이번에 한나라당이 양보했다는 것은,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의 양보했던 모든 내용은 다 받으면서, 개방이사추천위원회에 이사회 측 인사가 한 명 적게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학교운영위원회·대학평의원회 측 인사가 위원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한다 해도, 2배수 추천인 이상 이사회가 절반의 추천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추천한 인사를 선임하게 될 것이다.
물론 얻은 것이 있기는 하다. 학교운영위원회는 개방이사추천위원회에서 2배수로 개방형 이사를 추천할 때 과반수의 인원으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추천 당시의 거부권. 이것이 열린우리당의 사학개혁으로 한국사회가 얻은 것이다.
그러나 재단이 거부권의 대상이 될 만큼 결격사유가 분명한 인사를 추천할 리도 없거니와, 학교운영위원회 자체가 기존의 학교장-재단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므로, 학교운영위원회가 개방이사추천위원회에 진입해 행사하는 거부권이 황제경영을 견제할 장치가 될 것이라고 믿기는 힘들다. 그리하여 결국 얻은 것은 허울뿐인 개방형 이사제라는 단어에 불과한 셈이 된다.
지금 한나라당이 마치 큰 양보를 한 것처럼 선전되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열린우리당이 애초에 한나라당이 받을 안을 마련해줬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면 사학재단은 개방형 이사 선임 과정에서의 '약간의 귀찮음'만 감수하면 잃을 것이 크게 없다. 사학재단에게 '약간의 귀찮음'을 안겨주기 위해 국회 과반수가 필요했단 말인가?
한나라당에게 원활한 국정운영과 민생법안을 위해 대승적으로 양보했다는 프리미엄을 안겨주는 대신, 교육부문에서 열린우리당은 로스쿨법안 하나를 챙기려 하는 모양새다. 2007년에 로스쿨법안을 얻기 위해 사학개혁의 큰 칼을 빼들었다? 열린우리당의 기념비적인 허무개그가 놀라울 뿐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원문] 2007-06-30 11:47
ⓒ 2007 OhmyNews
2007년 6월 30일 토요일
국가경쟁력과 대학입시
요즘 대학입시제도에 대해서 말이 많다. 대학들이 좋은 학생들을 유치한다는 명목 하에 학교 간에 차이가 있는 내신의 비율을 낮추겠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고교평준화 제도도 폐지하고 고등학교 간의 학력차를 인정하자고 한다.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그네들이 좋아하는 경쟁력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소위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학교육이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교육이 잘 이루어져 봤자 국제 학력 경연 대회에서 좋은 성적 받는 것 정도일까? 대학 간에 대학의 구성원들(교수, 학생)끼리의 경쟁을 통해 열심히 노력해야 더 좋은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각 개인들도 나태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학의 간판이 곧 능력의 척도가 된 상황에서는 어떻게 될까. 우선 주변을 보면 확실히 소위 명문대 출신들은 능력이 뛰어나다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은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기업에서 명문대를 선호하는 이유도 짐작이 간다 (학연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이렇게 출신 대학이 능력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이유는, 잘 갖춰져 있는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에 대한 줄세우기 제도 때문이 아닐까. 대학들은 좋은 학생들의 유치를 통한 명문대로서의 위치 유지를, 학생들은 학교 간판을 통해 사회에서 유리한 출발 보장을 원한다. 대학이나 학생들의 이러한 욕심은 당연한 거고 큰 문제는 없다 생각한다. 그런데 앞서 말한대로 잘 되어 있는 줄세우기 제도, 문화 때문에, 학생들은 앞줄에 서고 싶어하고 대학들은 앞줄에서부터 뽑아가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출신대학 = 능력)이라는 공식이 생기게 된다.
우리 내부끼리가 아닌 대외 경쟁력의 제고를 위해서는 각 구성원들이 나태, 안주하지 않고 노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경쟁이 필수이다 (이렇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경쟁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말한대로 여기에서는 경쟁력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 하지만 이렇게 (출신대학 = 능력)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면 당연히 경쟁이나 노력이 줄어들게 된다. 상위권 대학은 보장되어 있으니, 하위권 대학들은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니 당연히 노력을 하지 않게되고,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 대외 경쟁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바람직한 것은 대학 간판을 통해 보장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각 대학이나 그 구성원들은 열심히 뛸 수 밖에 없고, 그를 통해 대외 경쟁력은 자연스레 높아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 눈에 보이는 공통된 기준을 없애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도농간이나 지역간의 학력차이가 존재하지 않고, 또 국가적으로 공통적인 시험이 없다면 학생들이나 대학은 내신이라는 기준 밖에 없을 것이다. 각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좋은 순위를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대학들은 좋은 학생들을 뽑기 위해 내신은 물론 다른 능력도 알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고안할 것이다 (면접이나 본고사 등). 더 중요한 것은 대학간의 서열이 애매하다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다음 경쟁을 위해, 대학은 대학대로 학생들을 기업 등에서 원하는 인재로 만들기 위해, 대학생들은 대학생대로 예전처럼 대학이라는 간판이 없으니 능력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연속적인 경쟁으로 계속 노력을 해야하니, 전 국가적으로 보면 대외경쟁력이 쑥쑥 높아질 것이다.
좀 무리한 가정을 통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요지는 국가의 대외경쟁력을 위해서는, 밖에서는 통하지도 않고 국내에서만 통하는, 대학이나 고등학생들의 줄세우기를 없애서 그들 간에 계속적인 경쟁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점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 교육의 연속성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고등학교 교육의 중요성과, 대학 간 순위가 애매할 경우 국가가 보유하고 교육역량을 어느 한 곳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교육의 연속성을 생각해도 고등학교 교육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고 (내 경험으로는 대학교 가서 열심히 하면 된다. 지금 필요 이상으로 고등학교 공부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앞에 말한 인생의 상당 부분을 결정하게 되는 대학교에 들어갈 때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본적인 인성이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양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교육역량의 집중은 예전 박통 때처럼 국가적으로 인적, 물적 역량이 부족할 때나 통할 이야기이고(그때는 오히려 대학 서열을 통해 소수 대학에 집중하는 것이 경쟁력 측면에서 나았을 것이다), 고급 인력이 넘쳐나는 요즘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생각한다.
이렇게 대외경쟁력을 기준으로 생각해도 요즘 대학들이나 기득권들이 대입제도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들은 타당성이 없으며, 결국 기득권을 가진 집단(소위 명문대들, 그리고 좋은 교육환경을 자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소리일 뿐이라 생각된다.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그네들이 좋아하는 경쟁력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소위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학교육이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교육이 잘 이루어져 봤자 국제 학력 경연 대회에서 좋은 성적 받는 것 정도일까? 대학 간에 대학의 구성원들(교수, 학생)끼리의 경쟁을 통해 열심히 노력해야 더 좋은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각 개인들도 나태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학의 간판이 곧 능력의 척도가 된 상황에서는 어떻게 될까. 우선 주변을 보면 확실히 소위 명문대 출신들은 능력이 뛰어나다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은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기업에서 명문대를 선호하는 이유도 짐작이 간다 (학연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이렇게 출신 대학이 능력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이유는, 잘 갖춰져 있는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에 대한 줄세우기 제도 때문이 아닐까. 대학들은 좋은 학생들의 유치를 통한 명문대로서의 위치 유지를, 학생들은 학교 간판을 통해 사회에서 유리한 출발 보장을 원한다. 대학이나 학생들의 이러한 욕심은 당연한 거고 큰 문제는 없다 생각한다. 그런데 앞서 말한대로 잘 되어 있는 줄세우기 제도, 문화 때문에, 학생들은 앞줄에 서고 싶어하고 대학들은 앞줄에서부터 뽑아가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출신대학 = 능력)이라는 공식이 생기게 된다.
우리 내부끼리가 아닌 대외 경쟁력의 제고를 위해서는 각 구성원들이 나태, 안주하지 않고 노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경쟁이 필수이다 (이렇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경쟁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말한대로 여기에서는 경쟁력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 하지만 이렇게 (출신대학 = 능력)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면 당연히 경쟁이나 노력이 줄어들게 된다. 상위권 대학은 보장되어 있으니, 하위권 대학들은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니 당연히 노력을 하지 않게되고,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 대외 경쟁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바람직한 것은 대학 간판을 통해 보장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각 대학이나 그 구성원들은 열심히 뛸 수 밖에 없고, 그를 통해 대외 경쟁력은 자연스레 높아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 눈에 보이는 공통된 기준을 없애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도농간이나 지역간의 학력차이가 존재하지 않고, 또 국가적으로 공통적인 시험이 없다면 학생들이나 대학은 내신이라는 기준 밖에 없을 것이다. 각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좋은 순위를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대학들은 좋은 학생들을 뽑기 위해 내신은 물론 다른 능력도 알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고안할 것이다 (면접이나 본고사 등). 더 중요한 것은 대학간의 서열이 애매하다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다음 경쟁을 위해, 대학은 대학대로 학생들을 기업 등에서 원하는 인재로 만들기 위해, 대학생들은 대학생대로 예전처럼 대학이라는 간판이 없으니 능력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연속적인 경쟁으로 계속 노력을 해야하니, 전 국가적으로 보면 대외경쟁력이 쑥쑥 높아질 것이다.
좀 무리한 가정을 통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요지는 국가의 대외경쟁력을 위해서는, 밖에서는 통하지도 않고 국내에서만 통하는, 대학이나 고등학생들의 줄세우기를 없애서 그들 간에 계속적인 경쟁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점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 교육의 연속성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고등학교 교육의 중요성과, 대학 간 순위가 애매할 경우 국가가 보유하고 교육역량을 어느 한 곳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교육의 연속성을 생각해도 고등학교 교육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고 (내 경험으로는 대학교 가서 열심히 하면 된다. 지금 필요 이상으로 고등학교 공부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앞에 말한 인생의 상당 부분을 결정하게 되는 대학교에 들어갈 때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본적인 인성이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양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교육역량의 집중은 예전 박통 때처럼 국가적으로 인적, 물적 역량이 부족할 때나 통할 이야기이고(그때는 오히려 대학 서열을 통해 소수 대학에 집중하는 것이 경쟁력 측면에서 나았을 것이다), 고급 인력이 넘쳐나는 요즘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생각한다.
이렇게 대외경쟁력을 기준으로 생각해도 요즘 대학들이나 기득권들이 대입제도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들은 타당성이 없으며, 결국 기득권을 가진 집단(소위 명문대들, 그리고 좋은 교육환경을 자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소리일 뿐이라 생각된다.
2007년 6월 16일 토요일
답답한 대학 입시 보도
오늘 아침 중앙일보며 소위 보수언론이라하는 신문들에 실린 기사들을 보며 답답한 맘을 금할 수 없었다. 모두 대학의 입시제도 변경과 교육부의 대응에 대해 정부 쪽을 지탄하는 글들 일색이었다. 그런데 과연 대학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그리고 교육부의 정책은 정말 중심없이 흔들리고만 있는가?
교육부는 누차 공교육의 붕괴를 막기 위한 내신 지키기를 표명해왔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그 정책적 일관성만큼은 분명했다. 다만 대학이 입시 자율을 워낙에 외치다보니 그를 감안하여 조율하는 과정에서 정책에 약간씩의 변동이 생겼다. 그렇다면 정책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대학의 요구 탓이지, 정부의 탓이 아니다. 적어도 정부가 맘이 바뀌어 계속 정책을 오락가락 휘집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몇몇 서울 소재 사립대학에서 발표한 내신 무효화 정책들은 필자가 보기에는 어불성설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서울 소재 유수 대학들이 내신 3-4등급 이상을 일괄적으로 만점 처리하겠다고 한다면, 이는 곧 공교육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다. 실상 Y대며, I대며 이름이 거론된 대학들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내신에서 1-2등급 내에 드는 극소수이다. 수능에서 서울 소재 유수대학 갈 정도 점수 나온다고 하는 아이들이 내신에서 3등급 이하로 떨어지는 예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다. 헌데 4등급까지 만점을 주겠다고 한다면, 이는 곧 내신을 유명무실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 그래도 학교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통에 누가 학교 공부에 치중하고 수업시간에 귀기울이겠는가. 모두 사교육 시장으로 몰려들 것이다.
중앙일보 한 기사에서 서울대는 1-2등급까지만 만점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교육부가 이를 말렸다며 비판하는 논조를 보았다. 이 역시 위와 같은 맥락에서 말이 안된다. 서울대 정도 지원할 수 있는 수능 성적 나오는 학생들은 정말 대다수가 1등급이고 못해도 2등급 이상이다. 그렇다면 서울대의 정책은 '우리 내신에는 모두 만점 주겠다'와 같은 말이 되는 것이다. 상황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교육부의 심중이 이해될만 한데 얄팍한 '겉'사실로 독자의 눈을 속이려 하니 통탄을 느낄 따름이다.
현 교육부 정책을 따라가면 특목고 학생들이 불리하다고 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로 완전히 잘못된 비판이다. 먼저 첫째, 그렇다면 현 대학이 내놓은 방식의 자율로 바뀌면 반대로, 일반고나 농어촌 학생들이 불리하지 않은가? 그 수로만 봐도 특목고 학생들의 몇 십배는 될 것이다. 대학이 말한 식의 내신 무효화를 통한 자율로 가면 사교육 시장만 비대해질텐데, 교육여건이나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사회적 하위층 자녀들은 어찌 되나? 태어날 때부터 진 업보이니 미안하지만 그냥 살라는 말인가? 그들에 대한 대책은 내놓지 않으면서 무작정 정부의 대책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물론 정부의 대책이 최선은 아닐 것이지만,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사회 전 계층을 고려한 보다 나은 대책이 있나? 대안없는 비판은 단순한 '네거티브 공세'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두 번째로, 특목고 학생들의 불리함을 왜 입시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나? 사실 현 특목고 체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에 그러한 불리함이 나오는 것이다. 특목고는 그야말로 특수목적고, 특정한 직업적 목적을 지닌 학생들을 교육양성하기 위한 학교이다. 그런데 특목고의 대명사인 외국어고는 단순히 성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는 곳이 되어버렸지 않나. 그러니 현 대학입시제도에서 이들이 불리함을 겪는 것이다. 외국어고가 정말 외국어를 특별히 더 열심히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 된다면 왜 이들이 현 제도 내에서 불리함을 겪겠는가. 외국어 자체는 전혀 성적의 우열 여부와는 관계가 없을 뿐더러 정시 외에 이들만을 위한 수시나 특별전형이 많을텐데. 즉 특목고생들의 불리함은 잘못된 특목고 제도에서 고쳐야지, 대학입시를 통해 메워야 할 것이 아니다.
답답하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언론이 교육부에 대해 겨누고 있는 비난의 화살이 현 상황에 비추어 전혀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그저 정부에 대해 성토하기에만 바쁜 것인지, 자극적인 기사로 독자를 모으려는 것인지 당최 말이 되지 않는 비판들이 난무한다. 난 '노빠'도 아니고, 참평포럼이나 노사모의 일원도 아니다. 그저 얼마 전까지 그 지옥 같다는 입시의 현장에 있었던 학생이다. 언론이 선동하니 괜한 시민들도 입시자율과 대학경쟁력을 주문처럼 외우며 정부를 비난하기만 한다. 물론 양자 모두 중요하고, 나 역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 언론의 비판은 단지 그것을 정부 비판에 이용하기 위해 구호처럼 내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거와 대안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당장의 이익과 한치 앞의 손익계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대운이 걸린 장래까지 멀리 보며 다져가야 한다. 그러자면 대학경쟁력만큼 중요한 것이 교육을 통한 사회 양극화의 개선과 진정한 민주주의적 평등의 달성이다. 현재 대학이 주장하는 입시제도로 '지금 당장' 선회하게 된다면 이는 공교육을 무너뜨리고 교육적/경제적 양극화를 심화할 것이다. 교육부가 안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저 넓은 사회와 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데, 보수언론들은 당장 코앞에 닥친 2008년도 입시만을 이야기한다.
오늘도 한 뉴스에서 인터뷰를 하는 학부모 한 분의 왈, '교육부가 정책을 자꾸 바꾸니까 거기 휘둘리지 말고...' 정말 정책을 자꾸 흔드는 주체는 교육부인가? 아니면 대학인가? 언론인가? 그것도 아니면 앞선 둘에 휘둘리는 여론인가?
출처: 중앙일보 이미지( caesarian)님 글
교육부는 누차 공교육의 붕괴를 막기 위한 내신 지키기를 표명해왔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그 정책적 일관성만큼은 분명했다. 다만 대학이 입시 자율을 워낙에 외치다보니 그를 감안하여 조율하는 과정에서 정책에 약간씩의 변동이 생겼다. 그렇다면 정책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대학의 요구 탓이지, 정부의 탓이 아니다. 적어도 정부가 맘이 바뀌어 계속 정책을 오락가락 휘집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몇몇 서울 소재 사립대학에서 발표한 내신 무효화 정책들은 필자가 보기에는 어불성설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서울 소재 유수 대학들이 내신 3-4등급 이상을 일괄적으로 만점 처리하겠다고 한다면, 이는 곧 공교육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다. 실상 Y대며, I대며 이름이 거론된 대학들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내신에서 1-2등급 내에 드는 극소수이다. 수능에서 서울 소재 유수대학 갈 정도 점수 나온다고 하는 아이들이 내신에서 3등급 이하로 떨어지는 예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다. 헌데 4등급까지 만점을 주겠다고 한다면, 이는 곧 내신을 유명무실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 그래도 학교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통에 누가 학교 공부에 치중하고 수업시간에 귀기울이겠는가. 모두 사교육 시장으로 몰려들 것이다.
중앙일보 한 기사에서 서울대는 1-2등급까지만 만점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교육부가 이를 말렸다며 비판하는 논조를 보았다. 이 역시 위와 같은 맥락에서 말이 안된다. 서울대 정도 지원할 수 있는 수능 성적 나오는 학생들은 정말 대다수가 1등급이고 못해도 2등급 이상이다. 그렇다면 서울대의 정책은 '우리 내신에는 모두 만점 주겠다'와 같은 말이 되는 것이다. 상황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교육부의 심중이 이해될만 한데 얄팍한 '겉'사실로 독자의 눈을 속이려 하니 통탄을 느낄 따름이다.
현 교육부 정책을 따라가면 특목고 학생들이 불리하다고 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로 완전히 잘못된 비판이다. 먼저 첫째, 그렇다면 현 대학이 내놓은 방식의 자율로 바뀌면 반대로, 일반고나 농어촌 학생들이 불리하지 않은가? 그 수로만 봐도 특목고 학생들의 몇 십배는 될 것이다. 대학이 말한 식의 내신 무효화를 통한 자율로 가면 사교육 시장만 비대해질텐데, 교육여건이나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사회적 하위층 자녀들은 어찌 되나? 태어날 때부터 진 업보이니 미안하지만 그냥 살라는 말인가? 그들에 대한 대책은 내놓지 않으면서 무작정 정부의 대책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물론 정부의 대책이 최선은 아닐 것이지만,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사회 전 계층을 고려한 보다 나은 대책이 있나? 대안없는 비판은 단순한 '네거티브 공세'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두 번째로, 특목고 학생들의 불리함을 왜 입시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나? 사실 현 특목고 체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에 그러한 불리함이 나오는 것이다. 특목고는 그야말로 특수목적고, 특정한 직업적 목적을 지닌 학생들을 교육양성하기 위한 학교이다. 그런데 특목고의 대명사인 외국어고는 단순히 성적으로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는 곳이 되어버렸지 않나. 그러니 현 대학입시제도에서 이들이 불리함을 겪는 것이다. 외국어고가 정말 외국어를 특별히 더 열심히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 된다면 왜 이들이 현 제도 내에서 불리함을 겪겠는가. 외국어 자체는 전혀 성적의 우열 여부와는 관계가 없을 뿐더러 정시 외에 이들만을 위한 수시나 특별전형이 많을텐데. 즉 특목고생들의 불리함은 잘못된 특목고 제도에서 고쳐야지, 대학입시를 통해 메워야 할 것이 아니다.
답답하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언론이 교육부에 대해 겨누고 있는 비난의 화살이 현 상황에 비추어 전혀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그저 정부에 대해 성토하기에만 바쁜 것인지, 자극적인 기사로 독자를 모으려는 것인지 당최 말이 되지 않는 비판들이 난무한다. 난 '노빠'도 아니고, 참평포럼이나 노사모의 일원도 아니다. 그저 얼마 전까지 그 지옥 같다는 입시의 현장에 있었던 학생이다. 언론이 선동하니 괜한 시민들도 입시자율과 대학경쟁력을 주문처럼 외우며 정부를 비난하기만 한다. 물론 양자 모두 중요하고, 나 역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 언론의 비판은 단지 그것을 정부 비판에 이용하기 위해 구호처럼 내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거와 대안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당장의 이익과 한치 앞의 손익계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대운이 걸린 장래까지 멀리 보며 다져가야 한다. 그러자면 대학경쟁력만큼 중요한 것이 교육을 통한 사회 양극화의 개선과 진정한 민주주의적 평등의 달성이다. 현재 대학이 주장하는 입시제도로 '지금 당장' 선회하게 된다면 이는 공교육을 무너뜨리고 교육적/경제적 양극화를 심화할 것이다. 교육부가 안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저 넓은 사회와 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데, 보수언론들은 당장 코앞에 닥친 2008년도 입시만을 이야기한다.
오늘도 한 뉴스에서 인터뷰를 하는 학부모 한 분의 왈, '교육부가 정책을 자꾸 바꾸니까 거기 휘둘리지 말고...' 정말 정책을 자꾸 흔드는 주체는 교육부인가? 아니면 대학인가? 언론인가? 그것도 아니면 앞선 둘에 휘둘리는 여론인가?
출처: 중앙일보 이미지( caesarian)님 글
2007년 6월 14일 목요일
스크랩) 공부의 내력
노땡큐) 공부의 내력
▣ 김규항 발행인
밥상에서 김건이 말했다. “빨리 5학년이 되면 좋겠어.” “왜?” “역사 공부 하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 “응. 왕건이나 대조영 같은 거 너무 재미있어.” “그래, 역사는 재미있는 거야.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생각보다 재미없을 거야.” “왜?” “그건 말이야..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거든.” “역사가 아니라니?” 김건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본다. “역사가 뭐지?” “응, 옛날에 있었던 사건이나 전쟁 같은 거 아냐?” “큰 사건이나 전쟁만 역사는 아니야. 우리 집에도 역사가 있고 건이에게도 역사가 있지. 여기 부러졌던 일 기억하지?” “당연하지.”
무조건 열심히…
녀석은 세 살 때 어느 날 미끄럼틀에서 놀다 다리가 부러졌다. 아이가 자라면서 어디 한 번 부러지는 거야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 그게 사건이 된 건 그러고 울지도 않고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잠이 깨서 나오는 아이가 한쪽 다리를 짚지 못해 병원에 가보니 골절이라고 했다. 깁스를 하는 의사가 웃을 만큼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김건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작은 역사가 되었다.
“그게 몇 년 몇 월 며칠이었지?” “몰라.” “그럼 깁스한 병원은?” “몰라.” “의사 이름은?” “몰라, 아빤 기억해?” “아빠도 기억이 안 나.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날짜, 병원 이름, 의사 이름만 알아내선 그 사건에 대해 건이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한다면 어때?” “바보 같지.” “학교에선 그런 걸 역사라고 배워.” “정말?” “누나한테 물어봐.” “누나!” 김건은 제 누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나는 그의 누나가 5학년 첫 시험을 준비하면서 역사 때문에 힘들어하던 걸 떠올렸다. 부여의 첫 도읍지는 어디였는지, 두 번째 도읍지는 어디였는지 따위를 외우면서 말이다.
동양의 전통적인 공부법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동양의 공부란 사람이 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지식과 깨우침이 담겼다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을 거듭 공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공부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동양의 공부는 지적 통찰을 체득하는 정신 수련이었다. 사방이 책으로 빼곡한 서양 학자의 서재와는 달리 동양의 학자 공부방에는 몇 권의 책만 있었다.
서양식 공부가 도입되고 아이들이 배우는 건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이 아니게 되고도 한참 동안 부모들은 동양식 공부법에 젖어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길 기대했고 요구했다. 대략 지금 아이들의 할아버지 세대까지 그랬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의 부모, 즉 우리는 청년 시절에 공부란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 ‘진짜 공부’를 하기 위해 몰래 동아리를 지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책들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그 공부를 통해 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공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우리는 어떤 공부를 강요하는가
그런 우리는 지금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하게 하는가? 우리는 오히려 공부에 대한 깨우침이 없었던 우리 부모들보다 더 한심하고 무지스럽게 아이들에게 역사 아닌 역사, 국어 아닌 국어, 수학 아닌 수학을 강요한다. 우리는 한술 더 떠 우리에게 난생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주었던 인문 사회과학 책들을 모조리 다이제스트판으로 달달 외우게 한다. ‘논술 필수 고전’이라 불리는 그 명단엔 심지어 까지 들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아이들이 진짜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20여 년을 달달 볶는 동시에 그들이 입시에서 빠져나와 처음으로 지적 희열을 느끼기 위해 보존되어야 할 지적 감수성의 부위들마저 하나하나 불로 지져 영원한 지적 불감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게 이른바 부모가 된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매일같이 반복하는 교육적 실천이다. 그렇게 하루의 실천을 마친 우리는 인사동이나 신촌의 지적인 카페에 둘러앉아 지적인 얼굴로 “요즘 애들은 책을 안 읽어” “인문학의 위기는 인류의 위기야” 떠들어댄다. 아,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된 인간들인가?
http://h21.hani.co.kr/section-021031000/2007/06/0210310002007060706630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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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항 발행인
밥상에서 김건이 말했다. “빨리 5학년이 되면 좋겠어.” “왜?” “역사 공부 하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 “응. 왕건이나 대조영 같은 거 너무 재미있어.” “그래, 역사는 재미있는 거야.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생각보다 재미없을 거야.” “왜?” “그건 말이야..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거든.” “역사가 아니라니?” 김건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본다. “역사가 뭐지?” “응, 옛날에 있었던 사건이나 전쟁 같은 거 아냐?” “큰 사건이나 전쟁만 역사는 아니야. 우리 집에도 역사가 있고 건이에게도 역사가 있지. 여기 부러졌던 일 기억하지?” “당연하지.”
무조건 열심히…
녀석은 세 살 때 어느 날 미끄럼틀에서 놀다 다리가 부러졌다. 아이가 자라면서 어디 한 번 부러지는 거야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 그게 사건이 된 건 그러고 울지도 않고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잠이 깨서 나오는 아이가 한쪽 다리를 짚지 못해 병원에 가보니 골절이라고 했다. 깁스를 하는 의사가 웃을 만큼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김건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작은 역사가 되었다.
“그게 몇 년 몇 월 며칠이었지?” “몰라.” “그럼 깁스한 병원은?” “몰라.” “의사 이름은?” “몰라, 아빤 기억해?” “아빠도 기억이 안 나.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날짜, 병원 이름, 의사 이름만 알아내선 그 사건에 대해 건이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한다면 어때?” “바보 같지.” “학교에선 그런 걸 역사라고 배워.” “정말?” “누나한테 물어봐.” “누나!” 김건은 제 누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나는 그의 누나가 5학년 첫 시험을 준비하면서 역사 때문에 힘들어하던 걸 떠올렸다. 부여의 첫 도읍지는 어디였는지, 두 번째 도읍지는 어디였는지 따위를 외우면서 말이다.
동양의 전통적인 공부법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동양의 공부란 사람이 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지식과 깨우침이 담겼다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을 거듭 공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공부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동양의 공부는 지적 통찰을 체득하는 정신 수련이었다. 사방이 책으로 빼곡한 서양 학자의 서재와는 달리 동양의 학자 공부방에는 몇 권의 책만 있었다.
서양식 공부가 도입되고 아이들이 배우는 건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이 아니게 되고도 한참 동안 부모들은 동양식 공부법에 젖어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길 기대했고 요구했다. 대략 지금 아이들의 할아버지 세대까지 그랬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의 부모, 즉 우리는 청년 시절에 공부란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 ‘진짜 공부’를 하기 위해 몰래 동아리를 지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책들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그 공부를 통해 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공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우리는 어떤 공부를 강요하는가
그런 우리는 지금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하게 하는가? 우리는 오히려 공부에 대한 깨우침이 없었던 우리 부모들보다 더 한심하고 무지스럽게 아이들에게 역사 아닌 역사, 국어 아닌 국어, 수학 아닌 수학을 강요한다. 우리는 한술 더 떠 우리에게 난생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주었던 인문 사회과학 책들을 모조리 다이제스트판으로 달달 외우게 한다. ‘논술 필수 고전’이라 불리는 그 명단엔 심지어 까지 들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아이들이 진짜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20여 년을 달달 볶는 동시에 그들이 입시에서 빠져나와 처음으로 지적 희열을 느끼기 위해 보존되어야 할 지적 감수성의 부위들마저 하나하나 불로 지져 영원한 지적 불감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게 이른바 부모가 된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매일같이 반복하는 교육적 실천이다. 그렇게 하루의 실천을 마친 우리는 인사동이나 신촌의 지적인 카페에 둘러앉아 지적인 얼굴로 “요즘 애들은 책을 안 읽어” “인문학의 위기는 인류의 위기야” 떠들어댄다. 아,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된 인간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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