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8일 토요일

여수·순천·광양시 2010년까지 통합

시장들 합의… 주민투표 통과하면 확정
권경안 기자 gakwon@chosun.com
출처: 조선일보 2007.09.07 00:51 [원문]


전남 광양만권의 주요 도시인 여수, 순천, 광양이 2010년까지 통합될 전망이다. 세 도시가 통합되면 면적(1856㎢)은 부산과 울산을 합친 것(1820㎢)보다 약간 크고, 인구는 72만명 이상인 광역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현섭 여수시장, 노관규 순천시장, 이성웅 광양시장은 지난 5일 여수 MBC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광양만권의 투자 효과 극대화 등을 통해 경쟁력 있는 도시로 도약하기 위해 2010년까지 3개 시를 통합하자”고 합의했다. 이들은 2012 세계박람회 개최지 결정일인 오는 11월27일 이전에 3개시 통합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통합 실무를 논의할 기구도 설치하기로 했다. 이 기구는 구체적 통합안과 통합 찬반 주민투표일 등을 결정하게 된다. 세 도시 통합 합의에는 여수 일대를 경쟁력 있는 도시로 만들어, 세계박람회 개최지 결정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의도도 담겨 있다.

세 도시 통합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절차는 주민투표다. 3개 시 투표권자의 3분의 1이 투표해 그 과반수가 찬성하면 통합이 결정된다. 전남도가 이 주민투표 결과를 첨부해 중앙정부에 통합을 건의하면 정부는 별 문제가 없는 한 ‘시(市) 설치법’ 등 관련 입법절차에 들어가게 된다. 이와 관련,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지난 6월 통합과 관련해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 여수시민 62.6%, 순천시민 65.1%, 광양시민 60.9%가 통합에 찬성했다.

이 세 도시 통합 논의는 2000년부터 광양만권연구소·여수지역사회연구소·여수상공회의소 등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제기돼 왔지만, 지금까지 실질적 진전을 보지 못했었다.

2007년 8월 11일 토요일

시작과 끝

죽음
항구에 배 두 척이 짐을 가득 실은 채 정박해 있다. 한 척은 곧 출항하려 하고 있고, 또 한 척은 방금 입항한 것이다. 그런데 대개 들어오는 배는 환영객이 거의 없으나 떠나는 배는 환송객이 많다.

탈무드에 의하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관례이다. 떠나가는 배의 미래는 알 수가 없다. 풍랑으로 침몰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왜 성대히 환송하는 것일까? 긴 항해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는 배야말로 커다란 기쁨이어서 성대한 환영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책임을 완수했기 때문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축복한다. 그것은 마치 배가 항해에 나서는 것과 같다. 그 아이의 미래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다. 병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며, 장래에 그는 흉악범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을 때, 그가 일생동안 한 일이 확실하다면 그는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배와 같다. 그때야 말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축복해 주어야 할 것이다.

- 탈무드 중에서

이 글에서는 항해를 마치고 온 배에 죽음을 비유하며 그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 비유에서 인생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시작과 끝에 대해 생각해본다. 개인적으로는 시작보다는 끝을 좋아한다. 그런데 완전한 끝은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에, 끝 무렵을 좋아한다. 방학으로 치면 끝나기 일주일 전쯤부터? 하루 중에는 저녁놀의 끝무렵. 계절 중에는 늦가을.

사실 좋다기보다는 아련히 슬프다 하는게 정확하나? 끝은 아쉬우니까. 펑펑 울 정도는 아닌, 좀 슬픈 영화를 보고 난 그런 기분?

이런 걸 좋아하는 건 내가 도전적, 진취적이지 못해서일까? 여튼 인생의 황혼기에 누군가와 함께 같이 지내온 날들을 후회없이 되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2007년 8월 5일 일요일

깊고 느린 역사 -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한눈에 읽는 현대철학 pp.183-192]

책에서 말하는 페르낭 브로델의 역사라는 학문에 대한 관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역사적 시간을 다층적으로 생각: 사건사, 국면사, 구조사
    - 사건사: 어느 시대에 어떠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다식의 서술, 연대를 중심으로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
    - 국면사: 사건들보다는 더 장기적이고 불변적이 요소, 이를테면 경제, 국가, 사회, 문명 등의 주제 분석. 여기에서 다루는 시간은 사회적인 시간, 즉 천천히 움직이며 반복되는 시간
    - 구조사: 인간을 둘러싼 주위 환경과 연관된 역사.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의 경계에 있는 역사'. 예를 들면 산과 바위, 강과 바다, 흙과 공기의 변천사 등. 지리적 시간.

  • 일반적인 시불변의 구조주의가 아닌, 기원과 생성 과정을 지니며, 너무나도 느리게 변하는 '구조'.
    - 역사에 대한 한계 또는 제약
    - 구조사: 가장 근원적인 역사 - 가장 중요한 역사에서부터 가장 피상적인 역사로, 가장 긴 호흡의 장기지속에서부터 가장 빠른 단기지속으로
    - 지리적 환경만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사실, 생산성의 한계 등 복잡한 요소도 포함 - 역사학, 지리학, 경제학, 사회학 등 인문, 사회과학의 여러 학문 분과들이 두루 동원되어야 진정한 역사 서술 가능: 학제적(學際的) 연구
책의 이 장을 읽으면서 저자의 다른 책 '남경태의 역사 오디세이 시리즈'가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그 책들에서 계속 강조되는 역사에서 지정학적 조건의 역할이 여기서 말하는 브로델의 관점에서 나온 것 같다.

개체 단독이 아닌 구조 내에서의 역할로서 인간을 분석하는 구조주의처럼, 인류의 역사 또한 그 단독으로서가 아닌 주어진 환경 내에서의 필연으로서 해석해야 한다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두 가지의 '구조'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구조'란 분석 대상과 상관없이 미리 주어지는 조건?)

(잘은 모르지만) 구조주의도 그렇고 여기에서 말하는 구조주의와 결합된 역사도 그렇고, 인문, 사회과학에서 '(구조의 가정 하에서) 자연과학과 같은 (필연적) 법칙의 도출과 그를 이용한 해석'을 시도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이 맞다면 구조 자체를 다루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고, 결국 계층적이 되는 건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2007년 8월 3일 금요일

책) 한눈에 읽는 현대철학

남경태, 한눈에 읽는 현대철학, 황소걸음, 2001

20세기의 사상들을 간단히 정리한 책.

예전 '철학과 굴뚝청소부(이진경, 이하 굴뚝청소부)'을 읽고나서 이런 류의 책은 이제 그만 읽고, 이제부터는 한 사람의 생각에 대한 책들을 읽어 나가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우선 철학과 굴뚝청소부란 책이 너무 잘 쓰여져서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도 철학자와 그 사람의 철학에 대해 소개한 책들을 몇 권 읽어봤는데, 대개 각 장에서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다음 그 사람이 말한 철학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느낀 불만은 그 사람의 철학 자체에 대해서는 너무 피상적인 것 같았고, 그래서 너무 간단하게 다뤄지다보니 이해가 어려웠다. (거의 다 번역서였는데 어쩌면 번역에서 오는 한계일 수도 있다. 추측하기에는 일반인들에게 풀어쓴 책이라면 당연히 쉽게 썼을테지만 번역하는 도중에 다시 어려워졌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굴뚝청소부는 사람의 생애보다는 철학에 대해 자세한 정도를 적당하게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가 되니 재미도 있고, 각 사상에 대해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 '한 눈에 읽는 현대철학(이하 현대철학)'은 사실 남경태라는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읽게 된 책이다. 굴뚝청소부와 비교해보면 솔직히 굴뚝청소부가 더 마음에 든다. 이 책 역시 앞에 말한 다른 책들처럼 한 사람당 9~12쪽 정도의 한정된 분량 안에서 소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 (31명, 장은 30개)을 소개할 수 있었지만 깊이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그 분량으로도 뭔가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처음 접하는 사상을 이해하기엔 좀... 그래서 다른 책들도 찾아가고 그러면서 읽었다. 그래도 이 책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이 책 뿐만 아니라 이런 종류의 책들이 공통적으로 주는 장점이지만, 어떠한 흐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부터 시작해서 주로 20세기에 활동한 사람들의 사상을 정리해서 한 번에 쭉 읽다보니 어렴풋하게나마 책 제목처럼 현대철학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소위 철학자 뿐만 아니라 과학자, 의사 등의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같이 소개함으로써, 철학 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의 업적들이 사상에는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나 알 수 있어 좋았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한 20세기 사상의 흐름을 한 단어로 나타내보라면 나는 '구조주의'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것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인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각 개인의 행동이나 생각은 언어를 중심으로 하나의 사회 속에서 결국 규정하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인간은 언어에 기반하여 생각을 하기 때문에, 언어 자체나 언어가 생성, 사용되는 사회의 구조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주체, 그리고 주체가 외부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생각함에 있어서 주체가 속해 있는 구조(무엇이 됐든)를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책에서도 나오지만, 이 구조 자체도 사람들에 의해 (물론 개인은 아니지만), 아니면 사람들의 행동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변화되어진다. 결국 역사성을 가진다는 뜻이다. 대개의 구조주의의 분석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구조 자체를 기반으로 주체를 해석하기 때문에, 구조를 시불변적인 것으로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류의 초기부터 그러한 구조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고, 결국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서 생활한 것과 밀접한 관계를 있을 수 밖에 없다. 초기 원시적인 형태의 구조 틀안에서 사람들이 사고하고, 또 그 사고들이 모여서 구조가 변화가 되고 이러한 과정의 반복을 통해 지금의 구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또한 구조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사람의 인식 또한 역사성을 가지는 것일까?

여튼 앞으로는 이제 각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책을 읽고 싶다. 우선 머리 덜 아픈 책 좀 읽고.

원작의 종류에 따른 번역의 태도

(전략) ... 번역자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원문을 그대로 살릴 것인가, 아니면 원작자의 의도를 살릴 것인가? ... 원문을 살리는 번역이란 원문 내용을 일절 여과 없이 치밀하게 옮기는 것을 말한다. ... 한편 원작자의 의도를 살리는 번역이란 행간의 의미까지 헤아리는 번역을 말한다. ... 이 두 방식 중 어느 것이 나은 방식인지는 일차적으로 원작의 종류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원작이 만약 문학작품이라면 번역자는 주저없이 첫 번째 방식을 택해야 한다. 문학에서 내용(idea)과 형식(form)의 분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형식보다 내용을 중요시하는 과학계통의 작품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형식은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수단일 뿐이다. 아이디어를 보다 쉽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번역자는 자신의 재량을 활용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셰익스피어를 이해하려면 필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어야 하지만 아인슈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읽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스티븐 와인버그(S. Weinberg)의 '중력과 우주론(Gravitation and Cosmology)'이 아인슈타인 이해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은 모든 물리학자들이 주지하는 바이다. ... (후략)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역자 후기 pp.427-428


번역하고자 하는 원작에 따른 번역자의 태도뿐 아니라 각 목적에 따른 책의 선택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내용 전달이 목적일 때에는 잘된 번역서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각 영역에서 용어에 대한 정의만 확실히 잘 된다면(물론 쉽지 않겠지만), 문학 작품이 아닌 서적들은 한글서적으로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2007년 8월 2일 목요일

책) 천재들의 주사위

데이비드 살스버그 (최정규 역), 천재들의 주사위, 뿌리와이파리, 2003.

통계학자들과 그 업적을 중심으로 엮은 통계학사.

우선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부터 말해보자. 마틴 가드너의 '이야기 파라독스', '아하' 같은 책이나 다른 문헌들을 접하면서 사람들이 흔히 접하게 되는 통계학적 오류에 관심이 생겼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매스컴에서 어떤 데이터를 대표하는 값으로서 산술평균, 중앙값 또는 최빈수를 필요에 따라 적절히 채택한다는게 있겠다.

여기에서 몇 가지 다른 재미있는 예를 들어보면, 통계에 따르면 '결핵 환자 중의 많은 사람이 산에서 죽는다'고 가정하자. 이것은 산악기후가 결핵균의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일까? 사실은 정반대로 결핵 환자의 요양에 좋기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요양을 위해 산중으로 가게되고, 따라서 산에서 죽는 결핵 환자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발이 큰 아이가 말을 더 잘 한다'면 발의 크기와 말을 배우는 능력이 관계 있다는 말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결국 둘 다 성장이 빠른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통계는 기만적인 결론을 낼 수 있고, 이런 측면이 나의 관심을 끌었었다.

더 나아가 '검은 까마귀의 파라독스(by Carl Hempel)'(검지 않으면서 까마귀가 아닌 대상은 모든 까마귀가 검다는 법칙을 검증해준다는 내용)나 '푸파란색(by Nelson Goodman)'(어떠한 사실이 두 개의 법칙을 똑같이 검증할 때 더 단순한 법칙이 선호된다. 오컴의 면도날?)의 파라독스는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주요한 문제(특히 귀납적 논리에 있어)가 된다 한다. (출처: 이야기 파라독스) 그리고 통계학은 사회학에 있어서나 과학 연구에 있어서나 광범위하게 이용되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생각된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렀는데, 여튼 이러한 통계학의 특성 때문에 관심있는 분야였고 해서 통계학에 대한 책을 찾다 이 책을 알게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이 책에서는 많은 통계학의 거장들을 소개하고, 그 사람들이 통계학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이야기한다. 그 기여한 내용은 (수식 없이) 말을 통해서만 전달하는데 그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적절한 수식을 통해 설명했으면 쉽고 명확했을 것 같은데). 통계학적 내용 자체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는 사람이나, 아니면 통계학을 전공해서 그 내용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책인 것 같다. 내가 통계학을 전공했다면, 이 사람은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이런 정리를 발견했구나, 이 이론은 이 사람이 이런 배경에서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재미있게 봤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통계학 자체에 대한 설명은 미흡하다고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이 책은 절반 넘게 읽다가 멈춘 상태다(그 이후로는 끝까지 대강 훓어보기만 했다). 말했듯이 처음 기대했던 내용과 달랐고, 그래도 계속 기다리며 봤지만 계속 비슷하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계속 읽을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흥미를 끄는 다른 책들이 많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통계학 자체의 내용보다는 통계학이라는 학문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도움을 받았던 것 같다.

어쨌든 통계학 자체에 대해 소개한 책이 있으면 좋겠다(있을 법 한데). 데보라 J. 베넷이라는 사람이 쓴 '확률의 함정'이라는 책이 그럴 것 같긴 한데... 인터넷으로 책을 사면 이런 점이 안 좋다.

2007년 8월 1일 수요일

이슬람의 시아파와 수니파 / 탈레반

출처: 네이버백과사전 [원문]

이슬람 시아파/수니파

시아파(Shiis)와 수니파(Suunis)는 이슬람교를 양분하는 분파로, 현재 수니파가 전세계 10억 이상의 이슬람 교도들 중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교조 마호메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 후계를 둘러싸고 대립이 시작되면서 시아파가 생겨 둘로 나뉘었다.

마호메트가 죽은 뒤 아부 바크르, 우마루, 우스만, 알리를 정통 칼리프로서 승인한 대다수의 신자가 수니파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수니파는 마호메트의 후계자를 정통 칼리프왕조와 역대 칼리프왕조의 칼리프(계승자 ·대리자라는 뜻)로 본다.

시아파는 원래 예언자 마호메트의 정당한 후계자(칼리프)는 그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제4대 칼리프) 뿐이라고 주창하는 사람들, 즉 시아 알리(알리의 당파)를 뜻하였다. 시아파는 알리와 그의 직계후손 11명만이 정당한 후계자이며 무슬림 공동체의 최고지도자이자 종교지도자를 '이맘'이라고 주장한다.

즉, '수니'란 말은 코란과 함께 '마호메트의 순나(말과 행동, 관행)를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시아'는 '알리와 그 후손들을 따르는 사람들(시아트알리)'을 말한다.


■ 시아파와 수니파의 차이점

때문에 수니파는 코란을 영원하다고 보고 그 해석에 충실한 반면 시아파는 이맘을 마호메트에 버금가는 완전무결한 존재로 보고 그들의 코란해석을 신봉하고 있다. 이란에서 종교 지도자가 국가 최고지도자로서 절대적인 정치 권력을 행사하게 된 것도 이맘에 대한 독특한 인식과 제도에서 비롯된다.

또 시아는 유일신 고백, 예배, 헌금, 라마단 중 금식, 성지순례 등 수니파의 5개 기둥 외에 지하드(성전)와 선행을 추가하고 있다. 특히 이슬람 영토, 신념, 기구를 보호하기 위해 성전에 나설 수 있다고 한 지하드 개념때문에 시아파가 과격하다는 인상을 준다.


■ 각 이슬람 국가의 종교정책

현재 시아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로는 이란(90%) 이라크(60%) 바레인(75%) 등이 있다.

이라크는 시아파가 다수임에도 집권층은 모두 수니파 출신이었고 바레인 역시 다수가 시아파이지만 집권층은 모두 수니파 출신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1979년 이란 혁명에 자극받은 이라크의 시아파는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곧 진압됐다.

그러나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이라크 시아파는 과도통치위원회 다수를 점하게 되었으며, 2005년 1월 실시된 이라크 총선 결과 시아파가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있던 무장세력인 탈레반은 수니파가 주축이 되었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후 축출된 시아파는 북쪽을 근거지로 반군(북부동맹)을 결성, 탈레반 정부와 내전을 벌여왔으며 수많은 난민이 발생, 파키스탄과 유럽을 떠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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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백과사전 [원문]
탈레반

1996년∼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있던 지배세력이었다. 그러나 2001년 탈레반이 비호하고 있던 빈 라덴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미국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대해 미국이 아프간을 보복공격함에 따라 탈레반 정권은 붕괴되었다.

「구도자」「학생」등을 의미하는 탈레반은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고 있던 회교 원리주의(수니파) 무장세력이다.

최고지도자인 모하마드 오마르가 94년 파키스탄 접경 칸다하르주에서 과격 이슬람 학생운동가들을 규합해 조직을 결성했다. 탈레반은 수니파 근본주의자들이 주축을 이루며 지도부는 오마르를 비롯해 임시정부의 '6인위원회' 의장인 물라 모하마드 랍바니 등 과거 대(對) 소련 무장독립 투쟁의 베테랑들로 구성됐다.

탈레반은 이슬람 이상국가 건설을 목표로 무장투쟁을 벌여왔고 1996년 랍바니 대통령 정권을 수도 카불에서 몰아낸뒤 아프가니스탄 전 국토의 95%를 장악하며 실질적인 지배세력이 됐다.

이들은 전체 노동인구의 40%인 여성의 고등 교육과 취업, 자유로운 외출을 규제하는 등 극단적 원리주의를 추구한다. 여성들에게 눈만 보이는 차도르의 일종인 '부르카'의 착용을 의무화하고, 이를 어기면 돌로 쳐죽이는 잔인성이 종종 외신에 보도돼왔다.

98년에는 미 대사관 폭탄테러 배후로 지목된 사우디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회교원리주의를 통치이념으로 강조, 미국 등 서방과 갈등을 빚어왔다.

지난 2001년 3월 탈레반은 우상화 배격운동의 일환으로 모든 불상을 파괴하도록 명령하여 유엔으로부터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바미얀 석불'을 파괴하여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후 축출된 시아파는 북쪽을 근거지로 반군(북부동맹)을 결성, 탈레반 정부와 내전을 벌여왔으며 수많은 난민이 발생, 파키스탄과 유럽을 떠돌게 되었다.


■ 탈레반 붕괴

2001년 탈레반이 비호하고 있던 빈 라덴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미국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대해 미국이 아프간을 보복공격함에 따라 탈레반 정권은 붕괴되고 말았다.

미국의 탈레반 보복공격 이후 아프가니스탄 과도정부 구성을 논의하기 위해 2001.11.27 독일 본에서 '아프간 정파회의'가 개막되었으며, 이 회의 결과 12월 5일 향후 6개월간 아프간을 통치할 29명의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 파슈툰족 지도자 하미드 카르자이가 과도정부 수반으로 추대됐으며, 북부동맹이 외무.국방.내무장관 등 내각의 핵심요직을 맡게 되었다.

2007년 7월 28일 토요일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에 소개된 경제이론들

책에 소개된 경제학사의 주요 인물, 학파의 개념 및 이론들을 생각나는대로 간단히 정리해보자.

애덤 스미스
보이지 않는 손 - 자유방임시장(free market)
분업, 지역과 국가 간의 분업(절대우위, absolute advantage) - 자유무역

맬서스
인구론: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와 식량의 산술급수적 증가
빈민 구제에 대한 반대 - 인구 증가 감소

데이비드 리카도, 중상주의
기회비용(opportunity cost)과 비교우위(comparative advantage) - 자유무역(free trade)
경제학적 지대(economic rent): 현재의 용도로 쓰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최소액수에 대한 초과액 - 차액지대론 및 곡물법 반대

존 스튜어트 밀
제레미 벤담 - 공리주의
비례세율, 상속세, 자유방임과 정부개입에 대한 중립

카를 마르크스
지배계급이 생산수단을 장악: 자본가들은 불변자본을 제공하고 가변자본(노동자)을 고용 - 잉여가치의 수탈
자본주의 파멸: 이윤율과 자본축적의 감소 - 경제력 집중 - 경기침체 - 산업예비군 - 무산계급의 궁핍
(저자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전혀 쓸모없다 말한다)

앨프레드 마셜, 신고전학파
한계분석: 기업 - 한계수확(marginal returns), 소비자 - 한계효용(marginal utility)
한계수확과 한계효용의 체감 - 같아지는 점에서 균형
수확체증: 내부경제와 외부경제 - 하지만 기업의 수명에 의해 순환(탄력성과 진보성에 의한 한계)
탄력성(elasticity)의 개념
명목이자율(nominal interest rate), 실질이자율(real interest rate)의 개념

토스타인 베블런, 구제도학파, 신제도학파
제도학파(institutionalist): 사회의 법, 기풍, 제도 등에 관심
유한계급(the Lesure Class) - 현시적 여가(conspicuous leisure), 현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 현시적 가격(conspicuous price)
비즈니스 맨 - 현시적 소비, 양심적 능률 포기 / 엔지니어 - 창조, 장인정신, 과학적 사고
갤브레이스 - 필요(needs)와 욕구(wants), 광고에 의한 의존효과(dependence effect): 한계효용체감법칙 성립 안함
신제도학파 - 법률의 결정에 경제학 도입: 과실, 재산, 범죄 등에 한계분석 도구 이용

케인스 (주의자)
끈끈한 물가와 임금 - 시장경제로 모든 걸 해결 불가 (고전학파 비판)
한계소비성향 (MPC, marginal propensity to consume), 한계저축성향 (MPS, marginal propensity to save) - 승수이론(theory of multiplier): 승수 = 1/(1-MPC) = 1/MPS
불경기의 극복 - 정부가 적절한 액수 만큼의 소비를 경제에 투입: 승수이론에 따라 부족한 수요량을 메울만큼 정부가 소비

밀턴 프리드먼, 통화주의자
피셔의 교환방정식(equation of exchange) MV = PQ (V: 화폐의 유통속도, M:통화량, P: 물가수준, Q: 재화와 용역의 생산량(실질GNP))
단기적인 M의 증가는 P뿐 아니라 Q도 증가: 정부의 단순한 소비증가(케인스)만으론 효과 없음
'V가 일정하나'와 구축효과(crowding out): 케인스주의와 통화주의의 쟁점
정부정책: 일정한 통화량 증가율 유지 역할만

제임스 뷰캐넌, 공공선택학파
이익집단은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며, 사회의 공익을 해친다.
일반인 - 합리적 무시 (rational igrorance): 비용에 비해 이득이 작으므로 무시
정부, 관료나 정부의 기업규제, 재정 정책의 부정적 측면 - 모두 자신의 이익을 좇음
'정치적' 보이지 않는 손, 정보비용: 정부활동에 대한 비관

합리적 기대이론학파 (rational expectations school)
정부의 개입은 아무런 효과가 없음 - 자동적인 수급 균형, 모든 정보의 분석을 통한 최선의 선택
정부 정책(소비, 통화) 등의 효과도 미리 예측하여 판단하기 때문에 효과 없음 - 오직 예상치 못한 정책만이 효과
내부정보의 경우는 예외 (참고: '괴짜경제학'에서도 정보와 경제의 관계에 대해 언급)

2007년 7월 27일 금요일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사회 벗어나야 한다

신정아씨 학위조작 사건의 파문이 함축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다. 그것은 개인의 거짓말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어떤지를 확인하는 데 외적 ‘형식’이면 충분하다고 간주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전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왜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게 되었을까?

다소 과장된 해석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진리의 기준을 우리 스스로 안에서 찾지 못하고 밖에서, 그것도 ‘대국’에서 찾아온 데 큰 문화적 원인이 있다. 실제로 유학, 불학, 도가 사상 같은 한국의 전통사상이라는 것은 다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던가. 한국 최대의 사상가라고 하는 퇴계의 철학이 중국 성리학과 얼마나 다르던가. ‘작은 중국’(小中華)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오기도 하지 않았던가. 한결같이 중국에서 배워오면서 그렇게 천년을 지내오지 않았던가.

근대에 들어 선진적인 것의 기준을 일본적인 데에서 찾기도 하다가, 이제는 미국을 위시한 구미 국가를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국가적인 일에 미국 눈치를 보지 않은 적이 있던가. 미국에 가까울수록 앞서가는 것이고 그만큼 객관적인 삶의 기준이 되는 분위기가 여전하지 않던가. ‘썩 그럴듯하다’, ‘멋지다’를 의미하는 ‘근사’하다는 말이 사실상 서양적인 것, 외국 것에 ‘가깝고(近) 비슷하다(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이런 우리네 정서를 잘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역사상 우리 안에 제대로 된 것이 있다고 자긍심을 가져본 적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동안 중국을 베껴온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면, 오늘날 그 무게중심은 미국을 위시한 서양적인 데로 옮겨가고 말았다. 미국의 삼류급 선교사들이 전해준 삼류 기독교를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실상이기도 하니 말이다. 어떤 목사가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사실만으로 교회 성장의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로마보다 더 로마적이라는 비아냥을 가끔 듣기도 하는 한국 가톨릭이나, 중국에는 이미 없어진 공자제사(석전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한국 유교의 상황도 사상이나 문명을 주체적으로 소화하기보다는 큰 것을 베끼며 섬기고(事大), 그대로 모방해온 우리의 현주소를 잘 말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사대주의’의 전형 아니던가. 얼마나 주체적인가, 얼마나 무르익었는가, 얼마나 지행합일적인가 등이 기준이 아니라, 대국에 있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내가 얼마나 대국과 가까운 사람인가가 사실상 권위를 결정하는 역할을 해왔으니, 신정아씨의 예일대 학위 조작 사건은 사실상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상은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사례들이다. 형식에 맞으면 내용이 좀 부실해도 그 형식만으로 충분히 화제가 된다. 화제의 중심에 서기위해서라도 내가 중국을, 일본을, 구미를 좀 아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형식을 갖추는 일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는 첩경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학문하는 이들의 독서 습관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어떤 책을 읽을 때, 과연 그 책이 읽을 가치가 있는지를 아는 제일 솔직한 방법은 당연히 그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읽기도 전에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는 간편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책의 날개에 써있는 저자의 이력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때 학술서의 경우라면 저자가 어디서 공부했느냐, 학위 취득 대학이나 국가가 어디냐 살펴보되, 특히 미국에서 공부했으면 일단 읽을 가치가 있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 책에는 미국 학계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그걸 읽은 것만으로도 내가 미국과 가까운 존재가 되며, 그만큼 남들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거리도 더 생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몇 마디 영어를 섞어가며 태생적인 영어 콤플렉스를 지닌 한국인의 정서를 슬쩍 건드리는 순간 그것만으로도 그이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능력자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얼마나 큰 나라와 가까운 존재인지로 사회적 신분을 결정해온 우리의 오랜 문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신정아씨가 굳이 예일대 학위증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것이 신정아씨 혼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라면 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그이가 학위를 위조하도고 당당해하는 것은 자기 주변에 그런 사람이 또 있거나 적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형식이 내용과 동일시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면 충분한 사회, 분명히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저급 문화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때 이런 글을 쓰는 나는 이러한 삼류문화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음에는 나는 왜 박사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써보련다.

-- 덧붙히는 글
이 기사를 쓴 이찬수 교수는 7년 동안 재직한 강남대에서 부당하게 해직되고 현재는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출처: 오마이뉴스 인권실천시민연대(cshr) 기자 2007-07-27 06:41 [원문]
ⓒ 2007 OhmyNews

2007년 7월 23일 월요일

탈레반 피랍사건, 교회는 왜 비하되는가?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위험수위’입니다. 인정많은 한국인들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에 냉혹한 반응을 보인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구출은 해와야겠지만, 구출 비용은 세금을 쓰지 말고 그들에게 받아내야 한다”거나, “자기들 소원대로 죽게 됐는데(순교), 내버려둬라”는 반응, “이슬람 사회에 기독교 선교하러 간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는 반응 등, 기독교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네요.

피랍된 이들이 교회 차원에서 무모하게 봉사활동을 위해 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탈레반’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피랍된 당사자와 교회를 비난하고 있는겁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일상에 만연한 일부 ‘교회’들의 폭력적인 선교 방식과 횡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에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 본질적으로 살펴본다면 개신교 신자와 비신자의 간극이 더 이상 멀어질 수 없을만큼 멀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개신교 관계자나 신자들이 모두가 폭력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 이들의 좀 더 건강하고 상식적인 신앙생활이 더 부각돼, 간극이 좁혀지길 바라는 마음이 듭니다.

개신교, 왜 그들은 ‘개독교’라는 표현의 대명사가 됐으며, 이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더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걸까요?

교회도 ‘먹고 살아야’ 하다 보니

혹시 집에 계신 분이라면 창문을 한번 열어보시길 바랍니다. 고층아파트 사시는 분이라면, 좀 귀찮더라도 더더욱 권해봅니다. 자, 뭔가가 ‘많이’ 보일겁니다. 뭘까요? 예, 교회의 십자가일겁니다.

골목마다 하나씩 있는게 교회입니다. 비교적 큰 교회도 많지만, 영세한 교회도 많습니다. 자, 대한민국에 이렇게 많은게 교회입니다.

이게 본질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들으면 화날지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만, ‘종교’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이 숱한 교회들 틈에서 더 많은 신자들을 모아 헌금을 받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거리로 나갈 수 밖에 없겠죠? 이때부터는 경쟁입니다. 더 많은 전단지를 뿌려야 하고, 대중교통수단에서도 남이 듣던말던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알려야 하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알려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적·종교적 책임에 앞서 출석교인을 늘리는 일이 우선이 돼버렸습니다.

그 많고 많은 교회 중에서 1/10만 이런 일에 나서도, 우리가 자주 겪는 ‘폭력적인 선교방식’은 일상이 될 수 밖에 없는겁니다.

하지만, 종교란 ‘강요’하고 ‘세뇌’한다고 해서 선택되는게 아니죠? 가끔, 그렇게 ‘세뇌’돼 집문서까지 갖다바치는 분들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관이 있고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걸 안다면, 이런 짓 자제해야 됩니다.

교회가 잊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의 다원성

기독교는 원래 선민의식이 강한 종교입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의 유대는 로마제국 치하에 있었습니다. 본래부터 선민의식이 강하고 종교적으로는 다소 독선적이던 유대인들과, 종교적으로 다원성을 추구했던 로마제국과의 충돌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런 정세에서 활동했던 분이 예수였고, 실제로 내부논쟁 속에서 수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외부의 압력에 대처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히 ‘감정적인 프리미엄’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절대자가 된 것이고, 예수 역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 ‘감정적인 프리미엄’에는, ‘선택받은 자’라는 자부심이 반영돼 있습니다. 그게 후대에 와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변질된 거죠. 앞서 이야기한, 대중교통수단 내의 ‘선교’도 ‘어린 양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사명’으로 받아들인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회의 존재 목적 중 하나도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과 성장”입니다. 그 ‘나라’를 세우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머릿수’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린답시고 하는 짓이 결국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돼버린 겁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의지가 있는 분들끼리 알아서 믿으시면 됩니다. 괜히 남 눈살 찌푸리게 할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불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까지 보냅니다.

가톨릭을 대표하는 김수환 추기경과 조계종 총무원장이 손을 맞잡고 음악공연을 관람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연출합니다. 그런걸 보면, 개신교의 일부 폭력적인 선교방식이 더 부각될 수 밖에 없는겁니다. 개신교, 이제 좀 더 ‘아름답게’ 처신해야 합니다.

일부 ‘정치목사’들의 준동

사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태생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물과 기름같은 사이일 수도 있습니다.

원래,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북한에서 흥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그러면서 ‘탄압’당해 월남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되는데에도 교회 세력의 지원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 ‘한기총’이라는 개신교 극우파의 탄생과 성장은 그런 정서로부터 비롯되는겁니다. 누가 욕하든 말든, 이분들은 성조기 흔들면서 열렬한 반공을 표합니다. ‘한기총’은 이 정서를 활용해 성장한 것이고, 정치에도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이 ‘정치목사’들은 대형교회들의 담임목사들이 많고, 부패를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형교회이기에 주목받을 수 없었고,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의 고발도 ‘이미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거기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까지 같이 생각해볼까요? 비신자가 바라보는 개신교의 이미지는 ‘부패집단’일 수 밖에 없는겁니다.

교회, 이제 그만 ‘자체정화’해야

앞서 이야기했듯이 결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체정화’하는겁니다. 남들이 해결해 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보고 결정하세요. 과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양심적으로 믿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싸우세요. 전체의 이미지를 먹칠하는 저 일상의 폭력과 싸워야만 합니다.

개신교도 원래는, 가톨릭의 ‘면죄부 남발’ 등의 부패에 반발한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했던 종파잖습니까? 태생 자체가 ‘부패와의 싸움’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있어 ‘부패와 폭력’과의 싸움은 숙명인 것입니다.

그 숙명을 알고, 자신의 양심을 믿어 싸운다면, 외부의 비신자들도 당신들에게 환호를 보내며 명분을 보내줄 겁니다. 어차피, 하나님이라는 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분이잖습니까?

그런 분을 믿으신다면, 비록 비신자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분’을 생각하며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당신들의 양심 속 하나님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저 일상의 폭력에 묻어가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양심의 힘을 믿으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선택은 무엇일까요?


출처: 박형준 님 블로그 [원문]

2007년 7월 9일 월요일

전남대, 제주도 풍력발전 등 핵심기술 개발

【광주=뉴시스】

전남대가 제주도에 설치될 풍력발전과 HVDC(원거리 전력전송에 적합한 시스템)의 핵심기술 개발에 나선다.

9일 전남대에 따르면 최근 대용량 분산전원 계통연계 안정화기술연구센터가 산업자원부의 대학전력연구센터 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됐다.

이에 따라 센터는 오는 2011년까지 산업자원부 등으로부터 모두 25억여 원을 지원받아 HVDC와 풍력발전 등 새로운 전력계통 분야 핵심 기술을 개발하게 된다.

이 연구사업을 통해 센터는 신재생 에너지 분야 연구 경쟁력을 높이는 한편 제주 지역에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통해 관광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대용량 분산전원 안정화 기술, 제주 현지 시뮬레이터 방안 등을 도출하고 연구 결과를 산업화시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3종의 제주계통의 시뮬레이터를 개발하고 기술. 취약 계통의 안정화 기술, 대단위 풍력발전 개발로 국내 전력산업 기술을 발전시켜 나갈 방침이다.

이같은 연구를 통해 새로운 전력 환경을 주도해나갈 인력을 양성하고 효과적인 산학협력 사업을 통해 산업체의 애로기술을 해결하는 방안도 마련키로 했다.

제주도의 경우 계통부하 규모에 비해 단위 전원의 크기가 커 사고가 날 경우 맞춤형 안정화대책이 필요한 상태였다.

전남대 한 관계자는 "교토기후협약으로 이산화탄소 저감을 위해 제주도의 풍부한 풍력자원을 최대한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제주도는 풍력발전은 600㎿ 이상인데도 현재 개발능력이 120MW인 것으로 평가돼 용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안이 요구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형주기자 peneye@newsis.com
ⓒ 한겨레 (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출처: 한겨레 신문 [원문]

2007년 7월 8일 일요일

현대물리학이 탐색하는 신의 마음 4장, 5장

[현대물리학이 탐색하는 신의 마음 4장, 5장]
    - 세계(자연)의 수학적 본질
    - 수학의 특성(기계론적)
    - 논증 불가한 논리, 계산 불가한 숫자
    - 계산기계를 통한 구현
    - 라이프 게임을 통한 구현
    - 시뮬레이트와 현실의 차: 시간의 비가역성, 하지만 이론적으로 구현 가능, 결국 차이 없음
    - pp171 그 내부의 인간에게는 그 세계가 칸트의 물자체, 경험주의 입장에서 그 이상은 알 수 없음
    - 알고리즘의 압축가능성, 법칙, 카오스
    - 계산 불가한 수 오메가와 종교들의 秘傳: 진리를 담고 있으며 믿음으로 이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을 그냥 단어를 나열하는 식으로 정리해봤다. 언젠가 다시 읽을 때 도움이 되겠지. 여튼 중요한 것은 시뮬레이트 내의 이성이 존재한다면, 그 이성에게 있어서는 시뮬레이트 내의 신호, 정보(전기 신호든 뭐든)가 소위 칸트의 물자체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시뮬레이트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왠지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난다.)

마찬가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 그러니 그 이상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물자체라는 개념을 가정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냐, 없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으로 갈리는데 하물며...

2007년 7월 7일 토요일

아르헨, 에너지 위기로 공장 300개 가동중단

브라질 언론 “메르코수르 차원 에너지대책” 촉구

아르헨티나에서 천연가스 및 전력 공급 부족사태가 계속되면서 최소한 300개 공장이 가동을 중단했다고 브라질 언론이 6일 보도했다.

브라질 언론은 아르헨티나 산업연맹 관계자의 말을 인용, “에너지 부족으로 인해 이날 현재 최소한 300개 공장이 가동을 멈췄으며, 4천여개 공장이 에너지 공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4천여개 공장들도 하루 한 차례 이상 생산설비가 멈춰서는 등 사실상 가동중단 단계에 들어가고 있어 생산활동에 큰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현재 하루 1만8천㎿의 전력이 필요하지만 실질적으로 공급되는 전력량은 1만6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천연가스의 경우도 2천500만㎥ 이상이 부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브라질 정부가 전날 하루 평균 3천만㎥인 볼리비아산 천연가스 수입량 가운데 100만㎥를 아르헨티나로 직접 보내도록 하고, 전력 공급량도 현재의 하루 평균 700㎿에서 이번 주말부터는 1천100㎿ 수준으로 늘리기로 하는 등 지원을 확대하고 있으나 역부족인 상태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전력 및 가스 공급은 일반 가정에 대해 우선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면서 “에너지 부족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세를 유지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경제 전문가들은 “에너지 부족 상황이 한계를 넘고 있다”면서 대규모 절전 사태가 초래돼 경제에 큰 부담을 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아르헨티나가 현재의 경제성장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간 35억달러 정도의 투자를 통해 전력, 천연가스, 디젤 등 에너지 확보에 나서야 한다는 대안도 제시하고 있다.

브라질 언론은 볼리비아 정부의 에너지 산업 국유화 선언 이후 브라질 국영에너지회사인 페트로브라스(Petrobras) 등 다국적 기업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투자가 축소되면서 천연가스 생산량이 감소한데다 강우량 부족으로 인한 수력발전소 전력 생산량 감소, 추위에 따른 에너지 소비 증가 등이 아르헨티나의 에너지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브라질 언론은 이와 함께 에너지 전문가들의 견해를 인용해 아르헨티나 외에 브라질에서도 빠르면 2008년 중 또는 2010~2012년 사이 대규모 에너지 부족사태가 예상된다는 점에서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에 칠레와 볼리비아까지 합친 확대된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차원에서 석유, 천연가스, 전력 등 에너지 문제 전반에 대한 해결책이 모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처: 연합뉴스 2007.07.07 08:19

2007년 7월 6일 금요일

[바둑] 기도 정신 훼손? 속기 팬 서비스?

팬서비스로 시작된 속기(速棋)가 바둑을 바꾸고 있다. 쉽게 엎어지고 쉽게 뒤집어지는 속기가 전술, 전략을 바꾸고 훈련방식을 바꾸고 대국 패턴과 대회 방식마저 바꾸고 있다. 순발력과 감각, 전투력은 최고의 덕목으로 떠올랐고 바둑과 동의어나 마찬가지던 장고(長考)는 가장 인기없는 단어가 됐다. 국내 바둑대회는 15개 중 10개가 20분 이내의 속기로 치러진다. 일년 내 이어지는 한국바둑리그도 제한시간 10분의 속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속기가 80% 이상을 점령한 셈이고 이런 환경이 바둑을 빠른 속도로 바꿔가고 있다. 세계대회는 아직 대부분이 2-3시간의 제한시간을 갖고 있으며 이 바람에 국내바둑과 세계바둑의 괴리현상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심심치않게 들리고 있지만 속기는 이미 한국바둑의 대세가 되고 말았다.

◆흘러간 유행가 ‘기도정신’=여자바둑의 강자 이다혜 3단은 어느날 오랜 고민거리에 대해 이창호 9단에게 물었다. “최선을 추구하는 게 옳은가요. 승부를 위해 타협해야 옳은가요.”
 
이창호 9단은 피식 웃었다. 그 자신도 답을 못 찾고 고민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바둑의 본질은 최선을 추구하는 데 있었고 그게 바로 기도정신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승부를 뛰어넘는 기도정신과 그를 통해 만들어지는 명국에 대한 소망은 프로기사들의 DNA에 깊숙이 박혀 있다. 하지만 속기 시대가 열리면서 승부는 실수가 판가름하게 됐고 역전이 밥먹듯이 일어나게 됐다. 이 두려움 때문에 갈림길에 봉착할 때마다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수 대신 안전한 길, 또는 비겁한(?) 길을 걸어가게 되는데 이다혜 3단은 자신의 그런 모습에 문득 회의를 느끼곤 했던 것이다.

팬들이 원하니까 속기는 어쩔 수 없다고 느끼면서도 바둑이 지닌 깊고 그윽한 향기와 특유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슬슬 종적을 감추는 것이 아쉬웠던 것이다.
 
◆모조리 암기한다=조훈현 9단은 어린 시절 ”정석은 외우되 바로 잊어버려라”고 배웠다. 오랜 불문율이었다. 정석에 억매이면 고수가 되지 못한다. 고수는 암기하지 않아도 판 위에서 제 길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속기시대인 지금은 정석은 고사하고 포석까지도 암기의 대상이다. 온갖 유형의 포석과 새로운 이론에 입각한 변화 등을 평소 철저히 연구한 뒤 완벽하게 암기해 두지 못하면 실전에서 피보다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날려보내게 된다. 하수의 전유물이었던 암기가 속기시대엔 프로들의 필수 무기로 변한 것이다.

◆시간공격, 시간연장책, 시간패=속기와 초읽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사람이 초를 읽을 때는 약간의 인정이 있지만 계시기의 초읽기는 가차없다. 잘 훈련된 젊은 기사들은 기계도 잘 다룬다. 반면 조훈현 9단이나 서봉수 9단 등은 돌을 놓은 뒤 시계 누르는 것을 깜박해 시간패를 당하곤 했다. 당황해 돌을 떨어뜨리는 일도 있었다. 속기시대에 순발력이 떨어지는 노장들은 여러모로 서럽다.

초읽기에 몰린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더욱 빨리 두는 행위를 시간공격이라 한다. 시간 연장책은 30초를 연장하기 위해 패를 쓰듯 급한 곳을 두는 것을 말하는데 이 수가 자칫 패착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두 속기시대의 새로운 풍속도이고 해프닝이다.

◆속기 중독의 위험성=속기를 잘 두기 위해 프로들은 10초 바둑 훈련을 열심히 한다. 인터넷 대국은 거의 20초 1회로 대국한다. 하지만 이같은 초스피드 대국은 약간의 중독성이 있어 너무 많이 두다 보면 보통의 바둑을 두기 힘들게 만든다. 뇌가 한 방향으로만 익숙해진 탓일 수 있다. 정상을 노리는 신예 유망주 강동윤 6단은 자신이 속기에는 강하지만 장고하는 바둑에 약한 약점이 있음을 고백한 바 있다.

◆속기는 유일한 대안인가=바둑학과 교수인 정수현 9단은 “팬들이 속기를 원한다. 바둑 내용은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속기로 가는 추세를 막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장수영 9단도 “프로는 상황에 적응해야지 상황 탓을 해선 안 된다”며 속기를 옹호한다.

그러나 권갑룡 7단은 “세계대회에서 중국에 자꾸 지는 이유가 속기 일변도에 있다는 지적이 있다”고 일부의 우려를 전한다. 중국 대회는 주로 2~3시간 바둑이라서 세계대회와 비슷하다.

1980년 KBS가 처음 속기대회를 선보였을 때 김인 9단은 “바둑을 황급히 둔다는 게 이상하다”며 출전하지 않았다. 당시는 1분 초읽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30초에서 20초, 10초 바둑까지 등장했다. 즉각적이고 화끈한 승부를 원하는 팬들을 위해서인데 이런 전략은 팬들을 TV 앞에 모으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바둑의 본질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도 쉼없이 이어진다(일본 3대 기전의 도전기는 지금도 이틀거리 바둑을 고수하고 있다).
 
속기 덕분에 하루 두 판 대국이 가능해지고 대회 진행도 좀 더 쉬워졌다. 하지만 한국 바둑이 어딘지 모르게 거칠어지고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다는 지적에도 귀를 귀울여봐야 하는 현실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출처: 중앙일보 2007.07.06 05:06 [원문]

2007년 7월 5일 목요일

[월드리포트] 자유경쟁 돌입한 佛 전력시장

/안정현 파리 특파원

7월부터 프랑스 전력 및 가스 시장이 경쟁체제에 돌입한다. 이미 유럽연합(EU)의 전력 및 가스 시장 자유화 조치에 따라 회원국들은 단계적으로 시장을 개방해 왔다. 프랑스의 경우 이달부터 일반 가정에서도 자유롭게 공급사업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함에 따라 실질적인 경쟁체계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일반 소비자들은 프랑스 시장에 진입해 있는 10여개의 전력 및 가스 공급업체를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지난 60여년간 이 분야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려왔던 프랑스 전기(EDF)와 프랑스 가스(GDF)는 다른 공급업체들과 가격 및 서비스 경쟁을 벌여야만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장 급격한 변화나 시장의 지각변동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EDF가 2010년까지는 기존 소비자들에게 기존의 정부 규제가격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행 규제 가격은 그 상승률이 평균 물가 상승률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며 현재 시장 가격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즉 실질적인 자유 가격 경쟁은 2010년 이후에나 가능하다.

현재 다른 공급자들은 이러한 EDF의 특권적 지위에 맞서 현재 규제가격보다 더 싼값에 향후 2∼3년간 가격을 고정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초기부터 공세를 펴고 있지만 공략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기적인 규제가격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EDF는 유럽에서 압도적인 가격경쟁력을 갖고 있다. 원자력 발전의 의존도가 높아 유럽에서 가장 값싼 전기를 생산하고 있고 그 덕분에 지난 몇 년간의 유가 및 화석연료 가격 상승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경쟁관련 사안을 심의하는 독립기관인 경쟁위원회는 실질적인 가격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EDF로 하여금 원자력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력에 대해서는 다른 도매가격을 적용하도록 권고했다. 다른 전력 공급업체가 EDF로부터 값싼 도매가격으로 전력을 구입한 후 이를 소비자들에게 재판매토록 함으로써 가격경쟁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쟁 도입이 가격 인하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유럽 주변국들의 경험을 보면 경쟁도입 이후 전기세가 인하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경쟁 도입으로 인한 서비스 개선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우선 전력 산업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문제점이다. 재고를 축적할 수 없기 때문에 공급이 수요에 실시간으로 적응되어야 한다. 공급 사업자가 많아지면 총공급량을 조절하기가 더욱 어려워져 수요불일치가 발생할 위험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대규모 정전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년 전 발생했던 대규모 정전사태가 대표적인 예다. 이미 전력 시장을 자유화한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이 대규모 고장 사태를 맞았고 지난해 11월에는 서유럽 주요지역에서 동시적인 대규모 정전사태가 있었다. 다음으로 투자를 위축시킬 가능성이다. 전력 산업의 경우 대표적인 대규모 장치 산업으로 투자 대비 회수 기간이 다른 산업보다 매우 길다. 당장의 가격경쟁을 견뎌내야 하는 공급 사업자로서는 이 분야에 투자할 여력이 이전보다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 향후 애프터서비스 창구가 이원화 된다는 점도 서비스의 질을 훼손시킬 수 있는 점이다. 전력의 생산 및 공급은 공급 사업자가, 전력의 개별 가정까지의 운송, 유지 및 보수는 현재처럼 프랑스 전기와 가스의 두 자회사가 계속해서 맡게 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EU차원의 대규모 전력시장이 형성되고 있지만 그 과실이 소비자들에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junghyun@fnnews.com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출처: 스포츠투데이 [원문]

세가의 발자취 (부제: 세가의 눈물겨운 떡실신의 역사)

세가의 겜생(?)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바로 성급함일것이다. 오랜기간동안 게임기업계의 2인자로서 설움-충분히 실력으로는 1인자가 될수도 있지만-을 겪었고, 업계 넘버원이 되기 위한 발버둥의 역사가 세가의 모든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초 세가가 첨에 발들인 8비트 게임기사업(이전의 주크박스니 하는 잡다구리한 게임기는 일단 접자)에서 닌텐도의 하드(패미컴)보다 꽤 우수한 하드(세가마크3등)를 출시했지만, 닌텐도의 패미컴에 밀리고 만다. 이유는 바로 세가의 캐치프레이즈 '세가의 하드에 세가의 소프트를' 때문이다. 즉 자체로서 우수한 게임개발집단이던 세가로서는 자사의 게임기에 '독점'소프트를 공급함-세가의 게임은 세가의 하드이외에서는 할 수 없음-으로서 시장에서의 우위를 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게임을 만들어 공급할 수 있는 소프트 하우스는 세가만 있는것이 아니다. 수많은 일본의 군소 소프트 하우스들이 너도나도 닌텐도의 패미컴에 소프트를 공급하기 위한 서드파티 계약을 맺고 게임을 냈다. 특히 에닉스의 드래곤퀘스트는 메가히트를 기록하기도 하면서 일본의 국민게임이 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고만고만하던 게임기 업체들의 경쟁이-80년대초 일본에서는 대략 10개의 업체들이 게임기를 쏟아냈었다.- 결국 닌텐도의 독주로 정리되는 형상에 이르며, 종국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세가는 절치부심, 1위로 오르기 위해 기존의 8비트에서 16비트로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메가드라이브를 출시했다.기존의 8비트형인 세가마크8가 자일로그사의Z-80을 CPU로 사용한 반면 메가드라이브는 모토로라의 68000을 사용했다. 속도,발색수,스프라이트등에서 훨씬 뛰어났다. 특히 빠른 그래픽 처리속도를 강점으로 삼아 당시 아케이드에서 가동되는 게임들 (시노비, 스트라이더 비룡, 스페이스 해리어, 수왕기등등)을 퀄리티의 다운없이 그대로 이식이 가능함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았다. 실제로 당시 아케이드 기판은 대부분 모토로라의 68000을 사용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서드파티 부족으로 인한 소프트수 감소에 뼈아픈 교훈을 바탕으로 여러 소프트 하우스를 영입한다. 대표적인 예가 초기의 테크모(썬더포스 시리즈), 텔리네트(바리스 시리즈), 자레코, 선소프트등이다. 하지만 예의 하우스들은 여전히 소프트 하우스로서는 2류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며, 그 수또한 충분치 않았다.

메가드라이브는 일본에서는 그럭저럭 300만대 정도는 출시했지만, 해외에서는 1000만대 이상을 팔은 절반은 성공한 게임기가 되었다. 그러나 메가드라이브에서도 치명적인 약점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동시 발색수 제한(512색중 동시 64색)이라는 한계로 경쟁기종인 PC-engine(512색중 동시512색) 수퍼패미컴(32768색중 동시256색)에 비해 한결 우중충한 그래픽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수퍼패미컴은 특유의 화려한 색감과 많은수의 스프라이트 128개 가능(메가드라이브는 80개)함과 확대축소회전이라는 궁극의 2D기술을 내장함으로 유저들의 눈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PC엔진의 경우 CD-ROM을 채용함으로서 용량의 제한이 없이짐으로 인해 8비트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게임들(천사의 시등)을 양산함으로서 동일하게 CD롬 매체를 채용함에도 불구하고 발색수는 전혀 변하지 않은 메가CD를 확실하게 눌렀다.

세가의 성급함이 나타난 또하나의 예는 메가 CD이다.90년대 초 화사한 색감의 PC엔진 듀오라는 (PC엔진+CD-ROM)라는 머신이 일본 시장을 강타하자 세가는 차세대 매체는 CD라는 생각에 성급히 메가CD를 발매한다. 아울러 수퍼패미컴에 밀리고 있다는 조급함과 함께 말이다. 이때 조금은 좀더 깊게 생각하고, 메가CD를 좀더 다듬었다면(여컨데 발색수라던가, 가격이라던가) 좋았을텐데, 급하게 고가격에 발매하여 일본에서 100만대 조차 보급하지 못했다.

차라리 발매되지 않았으면 싶은 비운의 기기 수퍼32X는 메가드라이브의 확장팩이다. 즉 메가드라이브의 슬롯에 꼽고 전용팩을 돌리면 메가드라이브에서 32768색중 512색을 사용한 화사한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얼마후 새턴이 발매되었고 수퍼32X는 조용히 묻혔다.굳이 역사적 의미를 찾자면 16비트와 32비트를 연결시켜주는 연결고리 정도의 역할일까 싶고, 세가에서도 실험작 정도로 출시한듯 싶다.(실제의 CPU가 새턴에서 2개 사용된 히다치의 SH2임)

세가는 이전 게임기에서의 단점을 모두 극복한 게임기를 발매한다. 세가의 6번째 게임기란 뜻으로 새턴(태양계의 6번째 행성인 토성)이란 이름으로 32비트 게임기의 포문을 열었다. (세가마크3, 메가드라이브, 게임기어, 메가CD, 수퍼32X, 새턴) 새턴은 기존 세가게임기의 단점(우충충한 발색, 스프라이트수 제한으로 인한 화면내 캐릭터수 감소, 확대축소회전, 부족한 버튼, 소수의 서드파티)을 모두 극복한 게임기였다. 이 게임기는 최강의 2D머신으로 군림하며,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과 비교하면 빠른로딩속도, 화사한 색감, 빠른 그래픽처리(단 동영상 제외)로 모든 유저를 만족시켰으나... 시대는 이미 3D다.

극단적인 비유를 들면 소니의 플스는 2D기능이 없으나, 소프트웨어 적으로 2D기능을 만들어 제공하는데 반해 새턴은 3D기능이 없으나 소프트웨어 적으로 3D기능을 만들어 제공한다라는 식이다. 새턴의 처절한 텍스쳐를 본 유저들은 새턴을 외면하기 시작했고, 결국 대세는 플스로 흐른다.

플스에 밀리자 절치부심하여 세가는 드디어 강력한 3D머신 드캐를 발매한다. 지난 겜기 대전에서 새턴의 처절한 3D기능을 강화하였고, 어차피 더 우수한 기능을 가질것이 뻔한 플투보다 (전자제품은 늦게 출시할수록 성능이 더 우수한것이 당연하다. 단 플삼제외)먼저 저가 29800엔에 출시하여 시장을 선점하기를 노렸다.

그러나 역시 성급했다. 초기물량부족과 부족한 소프트와 꽤나 심한 잔고장등으로 인해, DVD 미채용이라던가 몇가지 조금 아쉬운 부분을 제외하면 플투의 구라스팩에 비해 그닥 꿀릴것도 없었지만 조용히 접고 만다.조금은 더 심사숙고하여 출시했어도 좋았을뻔 한 비운의 하드가 드캐이다.

게다가 일본인들의 왕따도 한몪했다.
“플투는 왜 사셨어요?”
“친구들이 다 가지고 있어서요.”
“하고 싶은 게임은요?”
“지금은 없고 그냥 DVD나 볼려구요.”
“세가 드캐는 어때요? 값도 싸고 할 게임도 많고 그래픽도 나쁘지 않은데?”
“글쎄요. 세가껀 좀 꺼림찍 해서요. 친구들도 세가껀 안가지고 있어요."
이런식이다.

이후 세가는 더이상 하드웨어에서는 손을 떼고 소프트사업만 하기로 결정한다. 나중에는 사미에 인수합병되기도 했다. 사미가 소프트제작에서는 3류이지만, 빠칭고 기계등의 제작에서는 일류로서 꽤나 돈다발을 만지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뭐 중요한건 아니고 어쨋든 지금은 세가사미이다.

이상이 세가의 역사에 대한 발자취이다.

그래서 정리하면

1. 80년대 초 개나소나 게임기를 발매하자 세가도 자사 게임기를 발매하며 발을 담근다. 단 자사의 소프트만으로 말이다.
2. 그러나 패미컴에 떡실신되자 16비트 메가드라이브를 발매하며 서드파티를 영입한다.
3. 16비트 메가드라이브가 수퍼패미컴에 떡실신되자 메가CD를 발매하여 분위기 반전을 노리나 실패한다.
4. 우중충한 색감때문에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자 수퍼32X라는 괴작을 발매하나 이건 그냥 내본거다.
5. 모든 단점을 극복한 궁극의 2D 머신 새턴을 출시하나 3D 괴물 플스에 떡실신 된다.
6. 다시 새턴의 단점을 극복한 3D 강화머신 드캐를 출시하나 구라스팩 플2에 떡실신 된다.
7. 하드웨어 사업은 접는다.

아 불상한 세가여.


출처: 쓰잘데기 님의 블로그 [원문]

2007년 6월 30일 토요일

열린우리당의 기념비적인 사학법 허무개그

[오마이뉴스 하재근(ears) 기자]

한나라당이 사학법을 양보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원내 1당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고 한다. 사학개혁을 추진했던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양보를 환영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 계속된 사학개혁 싸움은 한나라당의 양보로 일단락 된 것인가?

양보의 주체가 한나라당이라고 선전하는 열린우리당의 태도부터가 황당하다. 한나라당은 양보한 적이 없다. 양보한 당사자는 명백히 열린우리당이다. 그 양보의 대가는 민생법안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학법을 주고 받았다는 교육 분야 민생법안은 로스쿨법이다. 그것도 법사위에서 아직 이견이 해소되지 않았다. 이것도 황당하다.

로스쿨의 학비는 연간 수천만 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연간 수천만 원 학비의 교육과정 설치와 민생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로스쿨은 논란의 여지가 매우 크며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공론이 모아지지 않은 부문이다. 열린우리당은 그런 것을 민생법안이라며 우리 사회의 숙원인 사학법과 맞바꾸려 하고 있다.

양극화 문제는 접어두고, 그나마 상식이 통하는 나라를 만들겠다던 현 집권세력이 내세울 유일한 개혁 실적이 사학개혁이다. 열린우리당은 2002년 총선 전엔 이런 개혁을 책임지겠다며 국민에게 호소했고, 총선 후엔 이 싸움으로 몇 년간을 소모했다. 그런데 이제 한나라당의 양보를 이끌어냈다며 사학법을 재개정하려고 한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2004년 열린우리당 애초의 안은 개방형 이사가 이사 중 3분의 1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곧 '양보'했다. 2005년에 이르러 개방형 이사는 4분의 1로 줄었고, 그나마도 학교운영위원회 2배수 추천 후 재단이 임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록 미흡하나마 사학의 제왕적 족벌경영을 견제할 장치의 첫 걸음이라고 평가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거침없는 양보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2006년에 이르러 개방형 이사제를 명목상 유지하는 대신 사학에 다른 출구를 주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이사장 친인척의 학교장 임용 허용, 이사장의 타 학교법인 이사장, 교장 겸직 허용, 대학의 학교장 중임 제한 삭제, 위법 방조 임원승인 취소 조항 삭제 등이다. 교사회-학부모회-학생회 법제화나 인사위원회-징계위원회 교사회-교수회 추천 조항은 2005년도에 이미 삭제했다.

개방형 이사제를 존립시킨다는 그 명분 하나만을 가지고 국민을 현혹하며 실질적으론 지속적으로 사학개혁의 취지를 무력화해 온 것이다.

개방형 이사를 추천하는 주체는 학교운영위원회다. 그런데 학교운영위원회는 불행히도 학교 측 이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학교 운영 구조 개혁의 실질적 주체는 교사회, 학부모회, 학생회 등이다. 하지만 이 주체들은 우리당의 양보로 사학개혁에서 진작에 사라졌다. 또, 이사장의 친인척이 교장이 되고, 중임할 수 있게 되면 족벌경영을 뿌리 뽑을 수 없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2007년 4월엔 임시이사의 임기를 3년으로 제한해 비리재단이 복귀할 장치까지 마련했다. 게다가 이 모든 거침없는 양보의 행진을 감행하며 끝끝내 지키겠다고 표방했던 단 하나의 명분인 개방형 이사제도 무력화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했다.

그것이 개방이사추천위원회다. 이 위원회를 학교운영위원회/대학평의원회와 이사회가 동시에 구성, 개방형 이사를 2배수로 추천하여 이사회의 낙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이사회 자신이 개방형 이사를 추천할 권한을 갖게 되어 개방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된다.

스스로 추천하여 스스로 임명하는 이사가 어떻게 개방형 이사란 말인가? 열린우리당의 거침없는 양보는 급기야는 개방형 이사제라는 단어 하나만 남기고 그 모든 실질적 내용을 스스로 삭제하는 거대한 허무개그의 경지에 다다른 셈이다.

한나라당은 이마저도 받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개방이사추천위원회를 이사회와 학교운영위원회·대학평의원회가 동수로 구성하라고 요구했다. 이번에 한나라당이 양보했다는 것은,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의 양보했던 모든 내용은 다 받으면서, 개방이사추천위원회에 이사회 측 인사가 한 명 적게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학교운영위원회·대학평의원회 측 인사가 위원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한다 해도, 2배수 추천인 이상 이사회가 절반의 추천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추천한 인사를 선임하게 될 것이다.

물론 얻은 것이 있기는 하다. 학교운영위원회는 개방이사추천위원회에서 2배수로 개방형 이사를 추천할 때 과반수의 인원으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추천 당시의 거부권. 이것이 열린우리당의 사학개혁으로 한국사회가 얻은 것이다.

그러나 재단이 거부권의 대상이 될 만큼 결격사유가 분명한 인사를 추천할 리도 없거니와, 학교운영위원회 자체가 기존의 학교장-재단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므로, 학교운영위원회가 개방이사추천위원회에 진입해 행사하는 거부권이 황제경영을 견제할 장치가 될 것이라고 믿기는 힘들다. 그리하여 결국 얻은 것은 허울뿐인 개방형 이사제라는 단어에 불과한 셈이 된다.

지금 한나라당이 마치 큰 양보를 한 것처럼 선전되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열린우리당이 애초에 한나라당이 받을 안을 마련해줬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면 사학재단은 개방형 이사 선임 과정에서의 '약간의 귀찮음'만 감수하면 잃을 것이 크게 없다. 사학재단에게 '약간의 귀찮음'을 안겨주기 위해 국회 과반수가 필요했단 말인가?

한나라당에게 원활한 국정운영과 민생법안을 위해 대승적으로 양보했다는 프리미엄을 안겨주는 대신, 교육부문에서 열린우리당은 로스쿨법안 하나를 챙기려 하는 모양새다. 2007년에 로스쿨법안을 얻기 위해 사학개혁의 큰 칼을 빼들었다? 열린우리당의 기념비적인 허무개그가 놀라울 뿐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원문] 2007-06-30 11:47
ⓒ 2007 OhmyNews

국가경쟁력과 대학입시

요즘 대학입시제도에 대해서 말이 많다. 대학들이 좋은 학생들을 유치한다는 명목 하에 학교 간에 차이가 있는 내신의 비율을 낮추겠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고교평준화 제도도 폐지하고 고등학교 간의 학력차를 인정하자고 한다.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그네들이 좋아하는 경쟁력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소위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학교육이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교육이 잘 이루어져 봤자 국제 학력 경연 대회에서 좋은 성적 받는 것 정도일까? 대학 간에 대학의 구성원들(교수, 학생)끼리의 경쟁을 통해 열심히 노력해야 더 좋은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각 개인들도 나태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학의 간판이 곧 능력의 척도가 된 상황에서는 어떻게 될까. 우선 주변을 보면 확실히 소위 명문대 출신들은 능력이 뛰어나다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은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기업에서 명문대를 선호하는 이유도 짐작이 간다 (학연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이렇게 출신 대학이 능력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이유는, 잘 갖춰져 있는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에 대한 줄세우기 제도 때문이 아닐까. 대학들은 좋은 학생들의 유치를 통한 명문대로서의 위치 유지를, 학생들은 학교 간판을 통해 사회에서 유리한 출발 보장을 원한다. 대학이나 학생들의 이러한 욕심은 당연한 거고 큰 문제는 없다 생각한다. 그런데 앞서 말한대로 잘 되어 있는 줄세우기 제도, 문화 때문에, 학생들은 앞줄에 서고 싶어하고 대학들은 앞줄에서부터 뽑아가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출신대학 = 능력)이라는 공식이 생기게 된다.

우리 내부끼리가 아닌 대외 경쟁력의 제고를 위해서는 각 구성원들이 나태, 안주하지 않고 노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경쟁이 필수이다 (이렇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경쟁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말한대로 여기에서는 경쟁력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 하지만 이렇게 (출신대학 = 능력)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면 당연히 경쟁이나 노력이 줄어들게 된다. 상위권 대학은 보장되어 있으니, 하위권 대학들은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니 당연히 노력을 하지 않게되고,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 대외 경쟁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바람직한 것은 대학 간판을 통해 보장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각 대학이나 그 구성원들은 열심히 뛸 수 밖에 없고, 그를 통해 대외 경쟁력은 자연스레 높아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 눈에 보이는 공통된 기준을 없애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도농간이나 지역간의 학력차이가 존재하지 않고, 또 국가적으로 공통적인 시험이 없다면 학생들이나 대학은 내신이라는 기준 밖에 없을 것이다. 각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좋은 순위를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대학들은 좋은 학생들을 뽑기 위해 내신은 물론 다른 능력도 알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고안할 것이다 (면접이나 본고사 등). 더 중요한 것은 대학간의 서열이 애매하다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다음 경쟁을 위해, 대학은 대학대로 학생들을 기업 등에서 원하는 인재로 만들기 위해, 대학생들은 대학생대로 예전처럼 대학이라는 간판이 없으니 능력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연속적인 경쟁으로 계속 노력을 해야하니, 전 국가적으로 보면 대외경쟁력이 쑥쑥 높아질 것이다.

좀 무리한 가정을 통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요지는 국가의 대외경쟁력을 위해서는, 밖에서는 통하지도 않고 국내에서만 통하는, 대학이나 고등학생들의 줄세우기를 없애서 그들 간에 계속적인 경쟁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점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 교육의 연속성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고등학교 교육의 중요성과, 대학 간 순위가 애매할 경우 국가가 보유하고 교육역량을 어느 한 곳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교육의 연속성을 생각해도 고등학교 교육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고 (내 경험으로는 대학교 가서 열심히 하면 된다. 지금 필요 이상으로 고등학교 공부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앞에 말한 인생의 상당 부분을 결정하게 되는 대학교에 들어갈 때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본적인 인성이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양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교육역량의 집중은 예전 박통 때처럼 국가적으로 인적, 물적 역량이 부족할 때나 통할 이야기이고(그때는 오히려 대학 서열을 통해 소수 대학에 집중하는 것이 경쟁력 측면에서 나았을 것이다), 고급 인력이 넘쳐나는 요즘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생각한다.

이렇게 대외경쟁력을 기준으로 생각해도 요즘 대학들이나 기득권들이 대입제도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들은 타당성이 없으며, 결국 기득권을 가진 집단(소위 명문대들, 그리고 좋은 교육환경을 자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소리일 뿐이라 생각된다.

2007년 6월 28일 목요일

"전력·가스 산업 구조 개편 지속해야"

IEA"한전, 배전 사업 분할해야".."민영화 선호"
전기위원회 독립성 강화·가스산업 규제기구 설립 필요


국제에너지기구(IEA)가 한국 전력·가스 시장의 자유 경쟁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시장 구조 개편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하게 권고했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IEA는 한국이 전력·가스 시장 구조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타임 테이블을 수립하고 전력산업을 규제하는 전기위원회의 권한과 독립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전의 배전 사업은 분리할 것을 권고했다.

끌로드 망딜 IEA 사무총장은 31일 발표한 한국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상세검토 보고서'과 관련해 과천 정부청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 같이 밝혔다.

망딜 사무총장은 "한국의 전력시장과 가스시장 구조 개편이 시작은 좋았지만 현재 중단된 상태"라고 강조했다.

그는 전력시장 구조개편과 관련 "2001년 한국전력의 발전부분을 6개 자회사로 분사한 것은 민영화를 위한 야심찬 계획의 주요한 단계였다"며 "하지만 제 3자가 송전선에 접근하고 배전 네트워크를 민영화하며 지역 독점을 제거한다는 목표는 폐지됐다"고 설명했다.

가스산업 민영화와 관련해서도 "지난 99년 가스공사 (사업을) 분리해 시장 경쟁을 촉진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지만 일부 부분에서만 진전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정부는 전력부분의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타임 테이블(시간 계획)이 없다"며 "부분적인 민영화, 자유화 정책은 IEA가 우려하는 바"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국가 에너지 규제가 불확실하다는 점 때문에 시장이 대규모 투자를 할 수 없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망딜 사무총장은 "한국정부의 경제성장 속도는 예전만큼 빠르지 않다"며 "새로운 겅제성장속도에 맞춰 보다 효율적이고 유연한 에너지 시장을 구축하기 위해서도 에너지 시장 구조 개편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망딜 사무총장은 "IEA는 한국이 에너지 시장 구장 개혁을 위해 명확한 타임 테이블을 수립해야 할 것을 강하게 권고한다"고 밝혔다.

또 전력산업 구조 개편을 위해 "(한전의) 배전사업을 분리해 제 3자가 배전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내 전력 시장을 규제하는 전기위원회의 권환과 독립성을 확대하고 가스 산업을 규제할 수 있는 별도의 규제 기관도 설립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다만 "IEA가 자유화(시장 경쟁 촉진)보다 민영화를 더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민영화가 없이 경쟁을 촉진할 수 있다면 큰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망딜 사무총장은 "민영화와 자유화가 다른 개념이지만 상충하는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뉴질랜드, 핀란드, 스웨덴의 경우 민영화를 하지 않았지만 자유화를 진행시켰다"고 덧붙였다.

그는 IEA가 민영화를 반대한다는 의미냐는 질문에 대해 사견을 전제로 "가능한 (한국정부에) 민영화를 제안하고 싶다"면서도 "2011년 이후 검토 보고서에서는 IEA가 민영화를 제시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IEA는 회원국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상세 검토 보고서를 4~5년 주기로 발표한다. 한국의 검토보고서는 지난 1994년, 2002년에 이어 이번이 세번째다. IEA는 석유공급 위기에 대비하고 대체에너지 개발과 석유 수급 비상상황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구로 지난 1974년 설립됐으며 현재 26개국이 가입돼 있다.

한편, 전력산업 민영화는 과거 국민의 정부 시절 의욕적으로 추진되다 참여정부들어 노조의 반발등으로 사실상 전면 백지화된 상태다.


출처: 이데일리 좌동욱 기자 2007.05.31 16:36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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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이 아닌 삼국지

최명, 소설이 아닌 삼국지, 조선일보사, 1997.

인물별, 에피소드별로 구성한 소설 삼국지연의에 대한 평전.

저자인 최명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라 한다. 책의 성격과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 우선 책의 목차를 정리해 보자.


천하 대세의 순환 / 조조와 진궁 / 영웅론 1,2 / 공명론 1,2,3 / 봉추론 / 선비론 / 주유론 / 노숙론 / 관우론 1,2 / 미인론 1,2 / 쪼다론 / 장수론 1,2 / 모사론 / 사마의론 / 정통론

이처럼 책의 목차만 봐도 책이 어떤 내용인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본 국가의 분열과 통일이라든지 정통이란 무엇인가처럼 역사의 관점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인물들에 따라 에피소드 중심으로 엮여 있음을 볼 수 있다. 내용 중에서는 삼국지연의(이하 삼국지)의 인물이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저자가 그 밖의 중국역사, 고전이나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도 적절하게 잘 섞여 내용의 다양성과 충실함을 높혀준다.

그리고 삼국지에 대한 학술적 분석이나 본격적인 비판을 목적으로 쓴 책이라기 보다는, 마치 삼국지를 읽은 친구와 함께 삼국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화장실에서 잠깐잠깐씩 읽기도 좋은 책이랄까. 어느 정도 삼국지의 전체 줄거리가 잡혀있는 상태에서 읽으면 새록새록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내용의 책인 것 같다.

책의 저자는 삼국지를 매우 좋아해서 수없이 읽었다 하며, 정음사 판(나는 읽어보진 못했다)을 기본으로 이 글을 썼다 밝히고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고우영 화백의 만화 삼국지 등에서 나오는 '유비는 쪼다이다' 등의 여러 의견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 여러 번역본을 참고한 듯 하다.

여튼 삼국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좀 덧붙혀 보면, 우선 개인적으로는 김구용씨가 쓴 삼국지를 제일 좋아한다. 왜냐하면 예전부터 삼국지(많이 알려져 있는 이문열 삼국지 등)들을 읽으면서, 과연 원본은 어떨 것인가 궁금해했다. 어쭙잖게 평역이랍시고 번역자에 의해 변형된 삼국지들을 읽다보면 어떤 것이 원래 내용인지 알 수가 없게된다. 물론 삼국지의 현대적인 해석들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조조에 대한 재해석이라든지). 하지만 우선은 변형되기 전의 것을 알아야 이런 것들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중문학자인 김구용 씨가 직접 (직역에 가깝게) 번역한 삼국지를 읽으며, 그동안 내가 찾던 삼국지구나 하는 것을 느꼈었다.

또 한가지, '삼국지연의'는 소설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사와의 비교라든가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소설 내부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설이므로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그런 교훈을 찾으려고 너무 얽매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교훈도 얻을 수 있겠지만, 소설은 재밌지고 읽는 것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번역가가 '이것은 정사와 다르다'는 이유로 임의로 바꾸는 것은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닌 작품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다(앞에서 삼국지들의 평역에 대해 별 가치를 인정치 않은 이유 중 하나이다. 어짜피 소설가지고 너무 심각한 게 싫다고나 할까).

이런 관점에서 삼국지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재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다양한 인간 군상의 재미이다. 용맹스런 장수들, 뛰어난 모사들,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싸우는 과정이 재미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활약하는 난세에서, 주인공인 유비 삼형제들이 정통성을 등에 업고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일어나 삼국 중의 한 나라를 성립하는 과정이 주요 재미라 생각한다(말하자면 이 밖에도 더 많지만 삼국지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줄이고 따로 글을 쓰는 게 좋겠다).

다시 '소설이 아닌 삼국지'로 돌아가 보면, 여러 에피소드들은 어짜피 삼국지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후흑학(厚黑學)'에 대한 내용이 흥미 있었다. 간단히 정리하면 영웅이 되려면 자기의 본심을 숨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말로 표현하긴 했지만, 성공하려면 남을 속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처세술도 남을 속이는 것도 싫어하지만, 살아가며 가끔은 이 말이 뜻하는 것을 경험하고 씁쓸함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뭐 어쩌겠는가. 이러한 현실의 답답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속에서는 아무리 치열하고 삭막하더라도 어짜피 소설이니까.

어찌 쓰다보니 이 책의 유쾌한 분위기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는데, 방금 말한대로 이 책은 정말 유쾌한 책이다. 친한 친구와 삼국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2007년 6월 26일 화요일

한국 정치 ‘아부의 정석 10’

적 만들고 명분은 그럴듯하게…
아부에 면역되면 자기교정 능력 없어져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따져보자고 한다. 좋은 일이지만 더 시급한 게 있다.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어떻게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가? 이게 가장 중요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 김영삼·김대중 정권의 말기가 비참했던 것도 바로 이런 문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그런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

한나라당의 내분이 실감나게 보여준 건 ‘줄서기’와 ‘줄세우기’였다. 한나라당 집권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지도자의 오류를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이는 한나라당만의 문제도 아니고 역대 정권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 정치의 문제다. 대통령제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더욱 근원적인 것이다.


△ 한국 정치가 지도자의 오류를 통제할 수 없는 근본적 원인 중 하나가 아부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무회의에 앞서 넥타이를 매지 않고 나오면, 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공무원이 따라한다.(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당파성’에 대한 엄청난 착각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 동시에 그 힘을 숭배하는 이중성을 잠시 접고, 정치를 정직하게 바라보자. 아니 우리 자신부터 보자. 우리는 공정성에 대단히 취약하거나 서투른 사람들이다. ‘호감’과 ‘반감’이 공정성을 먹어버린다. 공정한 규칙은 모든 집단에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이 진술에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걸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지지하는 집단엔 관대한 반면, 내가 반대하는 집단엔 엄격하다. 이걸 ‘당파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정성이 없거나 약하니, 사회적 갈등은 합리적 해소의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늘 문자 그대로 이전투구(泥田鬪狗)로 갈 수밖에 없다. 이미 갈라진 편의 대세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조율하거나 바꾸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는 자기 편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똑같은 짓이라도 상대편이 하면 타도해야 할 반민주적 작태지만, 우리 편이 하면 개혁을 위한 불가피성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되면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지도자의 비위를 맞추려는 아부꾼만 난무하게 된다. 아무리 같은 편이라도 아부를 지적해 비판할 수 있을 정도의 긴장이 그 집단 내에 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부, 이거 의외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한국 정치의 급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시절 주변의 아부꾼들에 의해 ‘세기의 태양’ ‘구국의 태양’ ‘인류의 등대’ ‘현대의 성자’ 등으로 극찬됐다. 우리는 지금 그걸 보고 어이없어하며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진보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우리는 ‘태양’ ‘등대’ ‘성자’ 같은 언어 구사의 촌스러움에 대해 웃는 것이지, 아부 자체를 멀리할 정도로 진보하진 않았다.

미국 언론인 리처드 스텐겔은 <아부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아부의 정석’으로 “그럴듯하게 하라”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말라” “칭찬과 동시에 부탁하지 말라” “여러 사람에게 같은 칭찬을 되풀이하지 말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 등을 들었다.

다 좋은 말이지만, 아부의 기술이 미국보다 더 발달한 한국에선 한 차원 더 높게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다.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는 ‘기술’이 아니라 기본 조건이다. 인터넷 덕분에 이젠 아부가 주로 공론장에서 행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정교한 이론과 실무가 필요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아부의 정석’은 다음 10가지다.

모든 의견에 무조건 끄덕끄덕하라

첫째, 명분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라. 이건 그냥 “그럴듯하게 하라”는 말과 비슷한 것 같지만,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이다. 한국인은 명분에 약하다. 자신이 아부를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반드시 거창한 명분과 연결해야 한다.

둘째, 신선하게 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않는 걸로는 부족하다.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독창성을 발휘해야 한다. 궤변이라도 파격적인 이설(異說)을 제시하는 아부가 평범한 아부보다 훨씬 더 큰 파괴력이 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한다.

셋째,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는 한국에선 안 통한다. 아부꾼들 사이에도 경쟁이 있기 때문에 보스의 머릿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려면 무조건 동의하는 건 필수다.

넷째, 거대하고 흉악한 적을 창출하라. 보스에 대한 아부를 적에 대한 증오의 그늘에 가려지게 할 수 있는 동시에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최일선에서 그 적과 싸우는 ‘투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면 적어도 보스에 대한 아부로 인해 욕먹을 일은 없다.

다섯째, 보스를 불쌍하게 보이도록 만들어라. 아주 훌륭한 분인데 그 진면목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고 슬픈 표정을 지어라. 이건 아부 효과와 더불어 자신이 보스를 잘 아는 ‘실세’라는 효과를 내는 일석이조(一石二鳥)다.

여섯째, 당당하게 호통치면서 아부하라. 이른바 적반하장(賊反荷杖) 수법이다. 보스를 미화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말고 보스에 대한 비판도 박살내는 호전성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너무도 당당한 자세에 압도돼 그건 아부가 아니라 소신과 양심의 표현일 거라고 믿게 된다.

일곱째, 자신이 아부로 얻은 걸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사람들은 아부꾼의 당당한 자세에 압도되다가도 어느 순간 아부꾼이 아부로 큰 이익을 취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해체하기 위해 자신은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무소유’ 정신의 화신인 양 쇼를 할 필요가 있다.

여덟째, 보스를 ‘싸가지’ 없게 평가하는 쇼맨십을 발휘하라. 기질상 결코 아부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만천하에 과시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아부의 효과도 높아진다. 물론 이 수법은 그런 정도는 암묵적 이해를 해줄 수 있을 정도로 보스의 신뢰를 얻은 다음에 구사해야 한다.


△ 유권자의 무관심은 자랑이 아니다.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온다. 정치인들이 선거철 시장에 들러 유권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아홉째, 자신도 괴롭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아무리 쇼를 잘해도 아부에 대한 비판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 비판에 과장되게 반응하면서, 왜 자신의 진정성을 이리도 몰라주는지 안타깝고 서글프다고 징징 우는 소리를 하라. 역사가 알아줄지 모르겠다는 등 헛소리를 해대는 것도 좋겠다.

열째, 자신에게도 아부하는 사람들을 키워라. 이는 아부의 힘을 증강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부에 대한 비판을 원천봉쇄하는 효과를 낳는다. 비판자들이 아부꾼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의 집단공격이 무서워 아부꾼을 비판하는 걸 삼가게 된다는 것이다. 명심하라. 아부의 순간은 쓸망정 그 열매는 달고 영원하다.

선거 뒤엔 ‘조폭 공동체 의식’

혹 이야기가 너무 심각해질까봐 잠시 좀 웃자고 과장되게 표현했지만, 이상에서 말한 ‘아부의 정석’은 한국 정치에 자기교정 능력이 없는 이유를 시사해주기엔 족하다. 전 사회 영역에 걸쳐 ‘보스 1극 권력집중 체제’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아부는 생존과 성장의 필수이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러한 아부에 면역돼 있다. 정치 분야에선 상대편 내부의 아부엔 혐오를 드러내지만, 우리 편 내부의 아부엔 열광한다.

왜 그런 정신상태가 가능한가? 무슨 선거든 선거판 현장을 수일간 체험학습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정치는 고립돼 있는 ‘섬’과 같다. 어깨띠를 두르고 시장을 돌아다녀보라. 악수를 자주 거절당하는 건 기본이고 등에 대고 욕하는 소리마저 쉽게 들을 수 있다.

유권자는 냉담하다 못해 살벌하고, 언론은 사사건건 흠만 잡아내 보도하려고 발버둥친다. 경쟁자들은 온갖 인신공격에 흑색선전까지 마다하지 않으니, 이쪽도 앉아서 당할 순 없어 같은 수법으로 맞받아쳐야 한다. 이거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선거에 출마한 적이 없다면 감히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명언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말이지 후보들은 보기에 불쌍하다. 충성할 참모진 구성하랴, 선거자금 마련하랴, 유권자들의 냉대에도 미소 지으랴, 존경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후보들은 당선된 뒤에 유권자들에게 복수한다. 자신을 위해 충성한 사람들에게 ‘낙하산’을 태워주고, 돈 댄 사람들에게 들통나지 않게 특혜를 주고, 자신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한다. 이른바 ‘조폭 공동체 의식’이다. 이 의식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아부’란 단어는 아예 없다. 조직원이 보스에게 무조건 충성과 찬양을 바치는 건 아부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본질이다.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는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고위 공직은 개인적인 ‘코리안드림’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쟁탈해야 할 이권이요, 비즈니스가 된다. 물론 이는 ‘줄서기’와 지도자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이유가 된다.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떤 고난을 겪고 희생을 했는지 알아?” 하는 마음이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오고, 이게 또 정치혐오를 낳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한국 정치는 복수혈전이다. 우리는 고위 공직자들에게 공복(公僕)이 될 걸 요구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과연 그런 요구를 할 자격이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특히 ‘바람 정치’가 문제다. 유권자들이 바람에 휩쓸리는 건 일시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도 있지만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정치 발전엔 치명적이다. 바람만 잘 타면, 바람이 부는 쪽으로 줄만 잘 서면, 길 가다 금배지를 주울 수도 있는 풍토는 유권자들이 만든 것이지 정치인들이 만든 게 아니다. 유권자들이 그렇게 해놓고선 정치인들의 줄서기를 비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그 어떤 바람에 휩쓸리더라도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을 평가해 옥석을 구분해주는 정도의 성의를 보이면 모르겠는데, 그것마저 없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평소 ‘개판’을 쳤더라도 바람과 줄만 잘 타면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공할 수도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누가 ‘줄서기’를 두려워하겠는가? 정당을 장난감처럼 여겨 깨부수고 다시 만들고 또 깨부수고 다시 만드는 작태를 삼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바람정치’의 좋은 점이라는 것도 반독재 투쟁 시절에나 의미가 있었지만, 아직도 그 습속은 계속되고 있다. 반감을 토대로 삼은 ‘역바람정치’도 ‘바람정치’의 일종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지도자 추종주의다. 지도자 추종주의가 계속되는 한,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길이 없다. 한국 정치가 ‘기대와 환멸’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다는 진단은 바로 지도자 추종주의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란 국민 뜯어먹기’라는 역발상

그럼에도 시민사회의 모든 담론은 정치인만 욕하고 유권자들의 성찰을 촉구하는 건 전무하다. 물론 유권자들이 그러는 건 역사와 구조의 그 어떤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보자면 정치인들에겐 면책 사유가 없겠는가? 정치인 못지않게 유권자들도 성찰의 주체가 되어 마땅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의 복수’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역설 같지만, 발상의 전환도 해봄직하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냉소와 혐오를 보내는 이유는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교과서적 원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 전제를 믿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연연해하는가?

반대로 정치란 원래 ‘국민 뜯어먹기’를 주업으로 삼는 고등 사기 행위라는 걸 전제로 삼아보자. 개혁을 내세운 집단들도 반개혁 세력과의 대치 국면을 조성해 ‘증오의 마케팅’ 공세로 자기들이 누리는 기득권과 특권을 계속 독식하려는 사기꾼에 불과하며, 한국엔 여야가 아니라 ‘엘리트 대 비엘리트’ 또는 ‘출세한 사람 대 출세하지 못한 사람’의 구도만 있을 뿐이라는 신념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그런 자세를 가지면 한국 정치에도 아름다운 사람과 장면이 많다는 데 주목하면서 정치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

좀더 현실적인 수준에서 대안을 모색해보자면, 정치 외풍에서 자유로운 ‘중립지대’를 늘려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각급 지도자의 인사·예산권의 상당 부분을 시민사회의 자율체제로 돌려 정치의 영향력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있겠지만, 그건 한국 시민사회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니 인내를 갖고 하나씩 고쳐나가는 게 옳다. ‘정치의 복수’를 피해보고 싶은 마음에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펴보긴 했지만, 어디까지 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출처: 한겨레21 [원본]

2007년 6월 25일 월요일

최고•최대•최초, 행복하십니까?

[한겨레] [강준만의 세상읽기]
초고층 건물에 집착하고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으로 인격을 재는 한국인…좌파 지식인들도 거대담론 증후군…
‘지속가능한 우쭐’을 위해 성찰이 필요하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 사회는 오래전부터 ‘동양 최고’ ‘동양 최대’ ‘동양 최초’ ‘세계 최고’ ‘세계 최대’ ‘세계 최초’ 등과 같은 ‘최고병’ ‘최대병’ ‘최초병’을 앓아왔다. 역사적으로 너무 당한 경험이 많아서인지 한국인들은 최고•최대•최초주의에 한이 맺혔다. 최고•최대•최초를 향해 목숨 걸고 질주한다. 황우석 사건에 대해 말이 많지만, 남 이야기인 척하진 말자. 그거 우리 이야기고 내 이야기다.

초고층건물론의 원조는 이건희 회장

최고•최대•최초주의가 한국 고유의 것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예컨대, 하늘로 치솟은 초고층 빌딩을 가리키는 마천루를 만드는 경쟁은 서양인들이 먼저 시작했다. 유럽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은 1932년 뉴욕에 102층짜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만들어놓고 유럽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거 세계 최고다. 너네 이런 것 없지?” 이에 열받은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대해 말하는 뉴욕 사람에게선 시민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자기네 시정(市政)에 대해서도 항상 그런 자부심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라고 썼다.

자부심에 집착하다 실패한 경우도 있다. 북한은 88 서울올림픽에 자극을 받아 89년 제13차 평양청년축전을 과도한 비용을 낭비해가면서 치렀는데 이때부터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기업과 합작으로 평양에 세우려다 중단한 105층짜리 유경호텔이 그런 과시 사업의 하나였다. 지금도 평양에는 공사가 중단된 105층의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최근 들어 ‘세계 최대’ ‘세계 최고’ ‘세계 최초’에 집착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두바이다. 아랍에미리트에 소속된, 인구 120만 명의 작은 토후국이다. 세계에 이름을 알릴 길이 없어 거대한 토목공사로 ‘세계 최대’ ‘세계 최고’ ‘세계 최초’의 기록을 만들어내느라 여념이 없다. 국가 홍보 전략인 셈이다.

두바이의 그런 집착은 ‘콤플렉스’가 아니라 ‘실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국은 실질을 말하기엔 제법 큰 나라가 돼버렸다. 한국은 여전히 자부심과 자존심에 집착한다. 그래서 초고층 건물을 짓자는 이야기도 계속 나오고 있다.

애국심이 강한 소설가 이문열은 여러 나라들이 저마다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초고층 건물로 국가적 자긍심을 고취하기도 하고 경제성장을 과시하기도 하는데, 서울도 지금쯤은 세계가 돌아볼 만한 초고층 건물 하나쯤 가져도 좋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초고층건물론의 원조는 삼성 회장 이건희다. 이건희는 지금의 타워팰리스 자리에 원래 102층짜리 초대형 사옥을 지으려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69층짜리 타워팰리스로 만족해야 했다. 이건희는 최고•최대•최초주의의 전도사이기도 하다. 사실 이게 바로 그가 인기를 누리는 비결이다. 그의 어록을 살펴보면 ‘최고•최대•최초’라는 단어들이 난무한다. 그와 삼성의 오빠부대 요원들도 ‘반도체 세계 1위’ ‘LCD 세계 1위’ ‘휴대폰 세계 3위’ 등과 같은 순위를 들먹이기에 바쁘다.

한국 민주주의도 과도하게 폄하?

사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다. 올림픽 시상식에서 은메달 받고서도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선수는 한국인밖에 없다. 이것 하나로 다 정리된다. 이런 현실이 시사하듯이, 한국의 최고병•최대병•최초병이 조만간 치유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간 많은 걸 이루었지만 아직도 한국인의 자부심 또는 자존감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2005년 6월 취업 포털 잡링크에 따르면 대학생을 대상으로 국적 포기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5.8%가 ‘필요하다면 국적을 포기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이화여대 학보사가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5년 9월 이대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출생 전 자신의 의지로 조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62%의 학생이 선택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왜 그럴까? 한국이 그만큼 형편없는 나라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비교 대상에 문제가 있다. 신문도 좋고 학자들의 논문도 좋다. 국가 간 비교 사례를 보라. 예외 없이 선진국과의 비교 일색이다.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나라와 비교하는 법은 없다. 비교 대상은 죽으나 사나 미국, 일본, 유럽이다. 그거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제공되는 비교 연구 자료가 그것밖에 없으니 그런 경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늘 비교만 했다 하면 선진국과 비교하는 버릇은 빨리빨리 정신에 따른 과욕일까? 한국 민주주의도 그런 비교 대상이 돼 과도하게 폄하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주장을 펴는 대표적인 학자는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강정인이다.

강정인은 ‘서구 민주화 경험에 비춰본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라는 논문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짧은 역사는 생각하지 않고 서구 중심주의적 시각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폄하하는 걸 비판하면서 “한국의 현실은 비록 급진주의자들의 눈에는 불만스러울지언정 참을성 많은 역사가의 눈에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서구 국가들은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로 성숙하는 데 적어도 200년 이상 걸렸다”면서 “지난 50년간 이룩한 한국의 민주화를 자기 비하적으로 ‘일탈’ ‘파행’ ‘왜곡’으로 보는 시각을 시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선진국과의 비교 중독증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늘 더 높은 곳을 향해 따라잡자는 전투성을 배양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국민적 자기 모멸 또는 자학을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이 큰 성과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계속 자존감 투쟁에 일로매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면 최고병•최대병•최초병은 사라질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사이즈의 문제는 남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토 크기와 인구 크기는 세계 대비 각각 0.078%에 0.73%다. 이걸 모른 척하고 넘어갈 한국인이 아니다.

큰 사이즈에 민감, 얼굴 크기만 예외

한국인의 자존감을 위한 투쟁은 꼭 밖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내부적으로 생성되기도 한다. 그 내부적 생성 요인마저 처음엔 밖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일망정 시간이 흐르면서 내면화된 질서로 자리잡게 된다는 뜻이다. 밖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내적인 권위주의를 낳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질곡에 휘둘린 사람들일수록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핵심은 삶의 모든 것이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내면적 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밖에서 몰아치는 격랑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에 늘 밖과의 비교와 관계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이게 한국 사회에 각종 ‘신드롬’을 양산하는 심리적 기반이기도 하다.
밖과의 관계에선 늘 사이즈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한국인은 사이즈에 대단히 민감한 민족이다. 꼭 크다고 성능까지 좋은 건 아닌데 왜 그렇게 큰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작은 걸 크게 늘리기 위해 별일을 다 한다. 신체의 특정 부위에서부터 아파트 평수에 이르기까지 개조하는 걸 무척 사랑한다. 그래도 얼굴 크기는 작을수록 좋다고 보는 게 기특하다.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 크기로 인격을 재거나 사람을 차별한다는 건 이젠 상식이 됐다. 특히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왜 그렇게 큰 차를 좋아하고 경소형차를 천대하는지 신기할 정도다. 한동안 티코를 조롱하는 개그가 유행했던 걸 생각해보라. 티코의 바퀴가 도로 위의 껌에 붙어 꼼짝도 안 하더라는 둥, 티코가 그랜저를 추월해 어찌된 일인가 알아봤더니 때마침 거세게 분 바람에 날아갔기 때문이라는 둥, 자기 승용차도 없는 사람들까지 주제를 모르고 그걸 개그랍시고 해대며 키득거리곤 했다.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경소형차 이용자의 82%가 차가 작다는 이유로 무시•차별당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총 쏘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다. 10년 전엔 충남 아산시 국도에서 볼보 승용차와 프레스토 승용차가 추월 경쟁을 벌이다 볼보 승용차에 탄 사람이 공기총을 쏴 프레스토 승용차를 탄 사람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왜 볼보가 프레스토를 향해 총을 쐈겠는지 각자 생각해보시라.

사정이 그와 같으니 경소형차 사용 비중이 높을 리 없다. 일본이 20%를 넘는 것에 비해 한국은 4.5%로 일본의 5분의 1 수준에 머물러 있다. 비슷한 이유로 자동차 교체주기도 엄청나게 빠르다. 미국과 일본의 자동차 교체주기와 비교해 한국은 2배 이상 빠르다.

거창한 개념에 매료되기 시작하면…

전국의 자동차 번호판이 통일되면서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자동차 번호판마저 차별의 요인이다. ‘서울 52’나 ‘서울 55’로 시작하는 서울 강남구 번호판을 달고 다니면 고급 식당이나 호텔 등에서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에, 한 해에 신규로 강남구에서 발행하는 자동차 번호판 중 강남 비거주자 비율이 절반을 웃돌았었다.

벯 것은 아름답다”는 신념은 지식계에까지 파고들었다. 이른바 ‘거대담론증’이다. 한양대 교수 임지현은 “남한 지성사의 파국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세련된 자유주의와의 공개된 논쟁 속에서 단련되지 못하고, 밀폐된 공간 속에서 ‘정통’과 ‘최대주의’의 장막 속에 안주했다는 점이다”며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은 한마디로 거대담론 지향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날카로운 지적이지만, 거대담론 지향성은 좌파 지식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거대담론이란 게 과연 무언가? 거대한 걸 이야기하는 걸 거대담론이라고 그러는가? 꼭 그렇진 않다. 실천과의 연계성이 중요하다. 예컨대, 바닥이 더러우면 우선 걸레질부터 하고 찾아온 손님을 모셔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걸레질할 생각은 않고 그 자리에서 그 집의 구조에서부터 창문과 바닥재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입으로만 떠들어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거대담론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니 ‘시대정신’이니 하는 거창한 개념에 매료되기 시작하면 모든 미시적 분석은 쓰레기통에 내던져지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크게 봐서 옳기 때문에 무조건 지지한다는 자세를 갖게 되면, 자기 성찰과 교정은 불가능해진다. 자기 성찰과 교정을 위한 시도는 크게 봐서 나쁜 편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성토의 대상이 된다. 말을 거창하게 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풍토가 조성되지 않는 한 거대담론 증후군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최고•최대•최초주의와 거대담론 증후군은 ‘우쭐’의 산물일 수 있다. ‘우쭐댄다’함은 ‘남을 의식해서 자기 자신을 꾸며서 나타내는 행동’을 말한다. 잘난 척한다, 젠체한다, 폼 잡는다, 목에 힘준다, 거들먹댄다, 으스댄다, 뻐긴다 등등이 그런 경우다. 이런 정의를 내린 심리학자 최상진은 한국인에겐 우쭐대는 기질이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금배지를 달고 다니며 외국 유학생들은 하버드나 스탠퍼드 같은 ‘알아주는 명문대학’을 실속 있는 대학보다 선호하고, 미국에 이민간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에 관계없이 벤츠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이와 유관한 현상으로 읽어볼 수 있다. 근래에 들어, 한국 사람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와 같은 발전도상국을 여행할 때, 돈을 잘 쓰며 ‘우쭐’대는 행세를 하며, 이러한 한국인의 행동에 대해 비판 기사가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는 경제 선진국인 미국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에서도 한국 사람들은 기죽지 않고 활보하면서, ‘미국 별거 없어’라고 자기들 간에 이야기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기가 살았고, 또 어떻게 보면 우쭐댄다고 볼 수 있다.”

황우석에 던진 돌을 자신에게!

물론 우쭐대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 지구상에서 일본인들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한국인들이 유일하다고 하지 않는가. 우쭐대더라도 ‘지속 가능한 우쭐’을 위해 피땀 흘려 노력하면 되는데, 불행 중 다행히도 한국인에겐 그게 있다. 그래서 한국인의 ‘우쭐’은 영원하다.

‘우쭐’은 왕성한 삶의 투쟁 의욕을 키우는 것이기도 하니,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적어도 자존감을 지키고 누리기 위한 한국인의 ‘최고•최대•최초’ 투쟁에 돌을 던지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제 밖과의 관계에서 자기 의미를 찾는 자존감이 이대로 좋은지 생각해볼 때다. 사는 게 너무 피곤하고 살벌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자존감’을 위해 황우석에게 던질 돌을 각자 자기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출처: [한겨레21 2006-02-1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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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끈이론

[우주의 구조]

초끈이론의 전개를 보면서 과거의 천동설과 지동설이 생각났다. 천동설 또한 나름대로 천체의 운동을 잘 설명했으나 지동설보다 불필요하게 복잡했고, 결국 지동설이 맞음이 증명됐다. 초끈이론 또한 뭔가 불필요하게 복잡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컴의 면도날). 진실은 달리 있는게 아닐까, 아직 알아내지 못했던가. 수학이나 물리학의 대가들이 느끼고 말하는 '수학적 아름다움'이 초끈이론에도 있는지.

또 한가지, 과학이 철학화되어감을 느꼈다. 둘 다 결국 검증할 수 없는 이론을 가지고 현실 - 우리가 감각하는 - 을 설명한다.

환원주의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pp.36-40]

"학문에도 일종의 계급질서가 있고, 분야에 따라 이해의 의미도 다르며, 이해의 수준에 대한 상대적인 가치도 서로 비교할 수 있다."

학문의 계급질서는 인문/사회과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학의 순서대로 있고 상위는 하위의 학문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직적, 수평적 이해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환원주의적 사고의 한계와 위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평소에 내가 화학과 물리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었기에 한 번 더 생각해 봐야겠다.

형이상학

[현대물리학이 탐색하는 신의 마음 pp. 37]

"형이상학은 물리학 - 또는 과학 일반 - 과 관련된 주제에 대한 연구를 의미하며, 과학적 주제 그 자체와는 상반된 뜻을 가진다. (중략) 분명 과학은 이러한 주제들에 폭넓게 연관되어 있지만, 경험적 과학만으로는 그러한 문제와 '생명의 의미'에 대한 어떤 물음에 대해서도 올바른 답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명쾌한 정의, 단정이 마음에 든다.

신학과 과학 발달, 동서양의 비교

[현대물리학이 탐색하는 신의 마음 pp.102-104]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 과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성이라는 신의 선물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종교가 긍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요인으로 '환원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는 선형물리계의 이해에 효과적이나 최근의 '전체론적 과학'에서는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동양 사상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말하고 있다.

다른 데에서는 주로 부정적으로 언급됐던 두 가지(종교, 환원주의)가 서양 과학 발달의 주요한 원이라고 분석한 게 흥미롭다.

‘Buy Korea’와 ‘Sell People’에 앞장서는

[특별기획 : X맨은 바로 너!](7) - 국책연구기관
김영수(경상대)

이 글을 쓰기가 참으로 부담스럽다. 대학의 박사급 비정규직들은 국책연구기관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국책연구기관과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도 많고, 또한 국책연구기관의 전문 연구자들을 매도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책연구기관의 성격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참으로 교육정책이 대한민국처럼 많이 바뀌는 나라도 드물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겠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내 자식만큼은 일류 대학에 입학시켜서 출세를 보장받으려 한다. 결코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학에 입학하고 난 이후에 확인하고, 또 다시 국내외 대학원으로 자식을 내보낸다. 어떻게 해서든지 전문가로서의 자격을 확보하게 한다.

국책연구기관에는 이러한 전문가들이 즐비하다. 자기의 영역만큼은 그 누구와도 경쟁할 수 있다는 전문성과 자부심을 가지고서, 국책사업에 필요한 연구들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국가의 Think Tank로 존재한다. 그런데 그러한 연구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노동자 민중들을 착취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국가권력이 노동자 민중들을 억압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심한 경우에는 ‘국가’조차 팔아야만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 내는데 자신의 전문능력을 직접 발휘하기도 한다.

'Buy Korea'와 'Sell People'이라는 상품도 단순히 관료들만의 생산품이 아니라 관료들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국책연구기관의 생산품이다. 물론 이러한 상품을 생산하는데 국책연구기관만이 아니라 대학의 전문 지식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Buy Korea'와 'Sell People'

'대한민국을 팔고 있다. 대한민국이 팔리고 있다.' 예전에 현대그룹의 한 계열사가 팔았던 Buy Korea가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상품이다. 정부는 Buy Korea를 위해 막대한 예산까지 퍼부으면서 Sell People을 위한 전략과 전술을 구축하는데 미쳐있다. 지방자치단체도 마찬가지이다. 정부는 2006년 외국인 투자유치사업과 관련한 산자부의 예산으로 약 845억 원 이상을 배정하였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배정한 자체의 예산까지 합한다면, 아마도 수 천 억 원의 돈이 외국인 투자유치사업으로 쓰이고 있다. 어마어마한 돈까지 들여가면서 대한민국과 노동자 민중들 팔려고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상품이 통째로 판매되는 것인지, 아니면 부분적으로 판매되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정부는 Buy Korea로 대한민국의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사회구성원들이 모두 풍요로울 수 있다니, 대단한 상품이다. 한미FTA의 경우를 보면, 대한민국과 노동자 민중들을 통째로 팔려는 것이 분명하고, 이러한 판매 전략이 '단 한 번의 대박'이라는 꿈을 꾸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등장하였다. 자본과 권력의 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거나 그 힘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박'의 주역으로 나서고 있다.

Buy Korea로 내가 풍요로워질 수 있다니, 앞장서서 영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어깨가 정말로 무거워진다. 남 덕택으로 풍요로워지는 '무임승차'가 아니라, 내가 노력해서 대한민국의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무임승차시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대한민국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까? 정말 대한민국을 살려는 소비자들이 있는 것인가? 모든 장사가 그렇듯이, Buy Korea는 손해를 보면서 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 ‘Buy Korea’는 ‘Sell People’, 즉 노동자 민중들을 시장과 자본의 바다에 내다 파는 것은 아닌가? 아마도 상품을 팔고자 하는 사람이나 사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가 한 번 쯤은 고민할 문제들이다. 고민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거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으면서 상품을 파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Buy Korea나 Sell People이라는 상품을 시장에 내놓고 영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관료들이고, 그 관료들은 수족처럼 다룰 수 있는 책사를 고용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시장에 의해 점령되어야 하고, 자본의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헤엄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노동자·민중들은 바다에서 익사하면 그만이다.

굳이 대한민국의 주인을 논하고 싶지 않지만, Buy Korea라는 상품을 누가 만들었고 왜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한민국을 상품으로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지배세력의 위기상황이든지, 아니면 누군가가 대한민국을 강제로 살려고 하는 상황일 것이다.

전자의 상황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서 비롯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라고 한다면, 후자의 상황은 초국적자본의 독과점화를 추구하는 제국주의 세력의 강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들은 대한민국의 지배세력과 제국주의 세력 간의 융합과정이자 지배 네트워크의 세계화 과정이다. 그 동안 지배 네트워크가 국민국가의 국가기관을 중심으로 형성,유지되어 왔다면, 이제는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세계적 수준의 지배 네트워크가 확장되고 있고, 또한 국민국가 내의 다양한 Think Tank기관이나 전문적인 시민사회단체들을 포섭하는 지배 네트워크가 견고하게 구축되고 있다.

책사들을 제도화한 지배 네트워크

절대 군주를 모시는 유능한 책사들의 이야기는 용인술 혹은 처세술의 수준에서 중국의 고대 소설들에 많이 등장한다. 초야에 묻힌 상태에서 국가와 사회를 좌지우지했던 책사들의 이야기, 훌륭한 군주를 만나서 자신의 지식과 꿈을 웅대하게 펼쳤던 책사들의 이야기, 책사의 의지에 따라 군주의 자리가 유지되거나 퇴출되었던 이야기 등이 인간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권력관계가 인간의 욕망과 의지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 한, 권력관계를 둘러싼 책사의 역할과 기능도 존재한다.

근대화되지 않은 사회의 권력관계에서 책사의 역할과 기능이 개인적인 친소관계로 형성되었다면, 사회체제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책사들의 역할과 기능이 제도화되었다. 권력이나 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의 주위에서 개인적인 수준의 책사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책사의 역할과 기능을 담당할 제도가 국가의 지배 네트워크로 구축되어 있다. 소위 국가의 Think Tank로 간주되는 국책연구기관들이 그것이다.

대한민국은 1999년에 제정된「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각 부처에 산재되어 있던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였다. 국무총리실 산하에 5개의 연구회를 구성하고, 5개의 연구회가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을 관리할 수 있게 하였다. 5개의 연구회는「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국가의 연구사업정책을 지원하고 지식산업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목적을 추구한다.

2007년 현재,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국무총리실 산하의 조직으로 편재된 상태에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한국노동연구원 외 21개의 연구원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기초기술연구회.산업기술연구회.공동기술연구회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의 조직으로 편재된 상태에서 총 21개의 연구원과 2개의 연구소를 관리하고 있다. 연구회 산하로 재편되어 있는 수많은 국책연구기관들은 사회구성원들의 일상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생활요소들을 국가정책으로 전화시켜 내는 책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연구회는 자신의 역할에 맞게 정부로부터 예산을 배정받아 산하의 국책 연구원이나 연구소들을 지원.관리한다.

연구원이나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는 대부분의 수많은 연구자들이나 그러한 연구자들을 지원하고 있는 행정 관리자들은 자신이야말로 Buy Korea와는 무관하게 연구기관의 성격에 조응하는 노동에 종사하면서 사회구성원들에게 공공적 서비스를 최대한 제공하려 한다고 한다. 물론 연구기관의 성격에 따라, 공공적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기관도 존재한다. 문제는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자나 행정 관리자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Buy Korea의 주역으로 존재할 수 있다. 연구기관들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예산으로 운영․관리된다. 정부의 정책을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연구자나 행정 관리자들은 연구기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연구기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수준의 연구들이 연구기관의 요구와 무관하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산업기술의 발전에 공헌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연구기관에서 요구하는 연구를 제출해야만 할 의무를 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국책연구기관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법, 예를 들면 「정부산하기관관리기본법」의 권한을 이용하여 국책연구기관의 성과를 매년 평가하면서 연구자들에게 국책연구자로서의 의무를 강요하고 있고,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연구자들에게 임금의 형태로 받고 있는 연구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DDA 협상이나 한미FTA 협상에서 책사로서의 역할을 주요하게 발휘했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계급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기 보다는 완화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는 노동교육원이나 노동연구원, 그리고 경제성장의 다양한 촉매제들을 만들고자 하는 산업연구원이나 한국개발연구원 등이 그것이다. 이 외의 연구원이나 연구소들도 각 기관의 성격에 조응하는 역할들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자들은 어떠한 성과물을 제시하든지 간에 ‘양비론’적인 시각을 철저하게 유지한다. 국책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제출하고,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방안까지 제출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Buy Korea나 Sell People이라는 상품을 판매하는 것과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국책연구기관들이 정부의 정책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면 말이다. Buy Korea나 Sell People이라는 상품은 자본축적의 위기상황에 내몰린 자본의 요구이자 제국주의 세력의 강요에 순응하는 정부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요인도 존재한다. 국책연구기관들은 국회에서 결정되는 기본적인 예산 이외에 특별예산의 형태인 정부기금을 지원받는다. 예를 들면, 2006년도의 정보통신기금은 약 1조3590억 원이었다. 이 기금은 정부와 사적 자본의 출연으로 형성되는데, 정보통신과 관련된 국책연구기관들은 이 기금 중에서 상당 부분을 지원받는다. 과학기술진흥기금이나 전력산업기반기금 등도 수 백 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사적 자본의 출연금 및 정부의 출연금으로 조성되고, 과학기술 및 전력산업과 관련된 국책연구기관들은 이 기금 중에서 상당 부분을 지원받는다.

정부기금 중에서 연구회가 지원받는 예산의 규모를 예로 들면,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2005년에 2,205억9,100만 원의 예산을 배정받았고, 2006년에 2,448억8,700만 원의 예산을 배정받았다. 이러한 예산이 연구회의 자체 운영, 23개의 연구원에 차등적으로 배정하여 다 소진되지만, 2006년 각 연구원 당 평균 예산은 약 100억 원을 초과한다. 과학기술위원회 산하에 편재되어 있는 총 21개의 연구원과 2개의 연구소 예산을 고려하면, 국책연구기관에 배정되는 예산을 거의 4000억 원 이상일 것이다. 이러한 국책연구기관들은 정부에서 투입하는 예산에 비해 더 많은 산출을 하려고 노력한다. 연구자 개개인의 의지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연구자들이나 행정 관리자들은 연구기관에게 부여되는 각종 기금의 혜택을 누리면서 자신의 연구기반을 유지하거나 강화시키고 있다.

연구전문 노동자들의 공공성

오늘날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산업에 있어서 복잡노동의 확대 및 비육체적 노동자의 증가, 육체적 활동과 정신적 활동을 구별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이나 생산활동이 점차 사회화됨에 따라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새로운 통일이 한층 더 요청되는 게 현실이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지속되고 있는 현실의 노동 분업은 전 세계적 규모에서 시간적·공간적인 통합과 접합을 요구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더 이상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잉여가치의 총량을 확대하려 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체제는 스스로 노동자들 간의 위계적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정신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주의'를 파기시키고 있다.

문제는 연구전문 노동자들 스스로, 특히 박사급의 연구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변화되고 있는 전문노동의 이러한 속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가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국책연구기관으로 하여금 사회적 잉여가치의 총량을 강화.확대하거나 보다 많은 잉여가치를 분배받기 위해 연구전문 노동자들의 노동력만이 아니라 생산직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게 한다. 반면에 국책연구기관에서 종사하고 있는 연구전문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적 갈등의 주체이기를 쉽게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생산직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의 양이 사회적으로 증가하면 할수록 연구전문 노동자들에게 분배되는 잉여가치의 양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착취구조는 연구전문 노동자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전문연구의 자격증으로 간주될 수 있는 박사급의 연구자들은 육체노동에 대한 정신노동의 상대적 우월성, 특히 개별적인 우월의식을 쉽게 버리려 하지 않는다. 연구전문 노동자들은 자신의 전문적인 노동력을 연구기관에 파는 대신, 국책연구기관이 사회적 잉여가치의 총량을 강화.확대하기 위해 노동자 민중들을 착취하는 것에 대해 모르쇠로 대응하는 경향성을 드러낸다.

비물적인 재화의 생산이 집단적 노동과정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개별적인 노동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이 과정에서 서비스재화를 생산자들 스스로가 집단적이고 계급적인 존재기반을 개별적인 의식의 문제로 치환시켜 버리는 경향성과 궤를 같이 한다.

국책연구기관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조합이 존재한다. 최근에 (구)전국과학기술노조와 (구)전국공공.연구전문노조가 통합하여 2007년 3월 27일에 전국공공과학기술연구노동조합을 창립하였다. 이 노조에는 국책연구기관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이고 공공적 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공공기관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가입되어 있다. 이 노조는 '자율적인 연구환경과 경영기반의 구축, 기관의 개혁과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 기관의 사회공공성 강화,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기관으로 재탄생' 등과 같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전국공공과학기술연구노동조합의 이러한 목적을 다른 차원에서 그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정부의 관리와 통제를 벗어나는 국책연구기관의 자율성이 미약하거나 부재하다는 의미, 개혁하고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책연구기관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 노동자 민중들의 이해를 반영할 수 있는 기관의 성격이 미약하였다는 의미, 그리고 국민으로부터의 신뢰가 미약했다는 의미이다. 국책연구기관이 예산의 힘과 법적 권한의 힘을 내세우는 정부의 지배 네트워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책연구기관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조합이 이러한 지배 네트워크를 무너뜨리는 투쟁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투쟁에서 승리한다면, 'Buy Korea'를 거부하는 노동자의 투쟁 진지들이 지배 네트워크의 한 공간에 형성될 것이다. 패배한다면, 연구전문 노동자들은 노동자 민중들을 착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Sell People'의 주역으로 존재할 것이다.

'Buy Korea'와 'Sell People'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을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는, 'Buy Korea'와 'Sell People'은 대한민국의 노동자․민중들을 시장과 자본의 바다에 팔려는 동의어이다. 자본가 계급의 입장에서는, ‘Buy Korea’와 ‘Sell People’은 동의어가 아니다. ‘Buy Korea’라는 상품을 팔아야 시장과 자본의 바다에서 풍요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다. ‘Sell People’이 아니라, 노동자·민중들에게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Buy Korea’와 ‘Sell People’에 내포되어 있는 계급적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들을 완화시키거나 해소시키는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투쟁의 의제 중에 하나가 ‘사회공공성’ 투쟁이다. 또한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연구전문 노동자들이 종종 ‘Buy Korea’와 ‘Sell People’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사회공공성 투쟁’이 단순하게 국가권력이나 국책연구기관에 의존하는 케인즈주의적인 공공성을 넘어선다는 전제, 즉 국가권력이나 국책연구기관의 공공성을 노동자 민중이 주도하는 ‘노동자 민중의 공공성’으로 전이시킨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연구전문 노동자들은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국책연구기관의 계급적 성격을 변화시켜 내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출처: 참세상 2007년06월25일 9시18분 [원문]

2007년 6월 23일 토요일

국기에 대한 쓴 웃음

요즘 들으니 "국기에 대한 맹세"를 그 텍스트를 약간 고칠 뿐 본격적으로는 그냥 그대로 두려 한다고 합디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냥 쓴 웃음이 나오지요. 소련에서 태어난 죄 (?)로,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국기에 대한 온갖 맹세들을 급우들과 함께 수도없이 하곤 했어요. 그런데, 소련이 막상 망하니 이 급우들 중에서는 할복이나 거병은 물론, 약간이나마 신경을 써준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강요되는 맹세들을 달달 외우면 외울수록 냉소만 강화될 뿐이지요. 맹세를 통해 마음 속의 진정한 사랑을 키운 경우를 어디에서 본 분이 계세요?

초등학교3학년, 제 나이 9살. 제가 그 때에 소년공산당 (피오네르) 입단식을 치르면서 빨간 깃발 앞에서 "심신을 바쳐 모든 힘을 쏟아 공산당의 사업을 복무하도록 할 것"을 엄숙히 맹세했지요. 나중에 거의 다달이, 무슨 행사할 때마다 역시 "공산당 사업을 위한 투쟁에 준비돼 있으라!"는 구령에 따라 "네, 항상 준비돼 있습니다!"라고 외치면서 거수경례를 했지요. 아마도, 그 구령을 지금이라도 들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거수경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 앞에서 그렇게도 엄숙한 표정으로 "맹세"를 외쳤던 그 급우들은, 나중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무슨 이야기를 해댔을까요? "아, 저 대머리 발로댜를 보기만 하면 졸나 웃겨 목참겠구먼. 아까 식을 치르면서 겨우 참은 거야" 이 "대머리 발로댜"는 바로 그 깃발에서 그 얼굴을 나타냈던 블라디미르 레닌이었습니다 ("발로댜"는 "블라디미르"의 애칭). 강요된 맹세를 하면서도 국가의 의례에 대한 염증만 키운 것이지요. 결국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어쩔수 없이 거래의 관계인데, 이 관계에서는 국가가 제시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면 아무리 많은 애국 의식들을 강제해봐야 별 쓸모가 없는 것이지요. 구 소련 같으면, 지식 청소년들에게 살아숨쉬는 혁명적 정신도 진정한 자유도 제시하지 못햇으며, 노동계급의 청소년들 보기에는 간부들만 외국에 왔다갔다하면서 부럽게쓰리 잘 사는 불평등한 국가이었습니다. 결국 국가로부터 그 충성에 대한 어떤 가치 있어보이는 보상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에 상당히 냉소해진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어차피 실생활에서 지켜지지도 않는 공산주의 이상들은 냉소와 조소의 대상이 돼도, "맹세의 문화"가 강요했던 일상적인 군사주의 정도는 잘 뿌리를 내렸지요. 제 급우들의 절대 다수는, 아프간에 가서 "야수와 같은 폭도" (무자헤드)들을 잡아죽이는 것을 "진짜 남자다운 일"로 생각했으며, 학교를 방문하여 "애국 애군 미담"을 나누었던 아프간 침략의 상이병들에게 영웅대접을 해주었지요. 이들이 국가를 별로 정의롭고 평등한 것으로 보지 않았지만, 전우애로 꽁꽁 묶여진 "진짜 사나이의 집단", 즉 군부대를 "남성의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지요. "맹세의 문화"는 애국 시민을 키울 수 없어도, 살인훈련에 무신경이 된 꼴통 마초 만들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의 지배자들이 이 "맹세의 문화"를 이처럼 사랑하는 것이지요.

한국 대학생들에게 여론조사해보면 대다수가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북유럽/일본/스위스에서 태어나겠다"고 답합니다. 자랑스러운 태극기에 대한 그 무슨 주문을 외우게 해도, 자랑스러운 태극기의 그늘에서 다시 타어나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안고쳐질 것에요. 국민연금이라고는 용돈 정도 주면서도, 제대로 된 실업수당도 교육/의료 혜택도 주지 않으면서도 남성들에게 유럽에 비해 두배 긴 기간을 여건이 아주 열악한 군에서 보내게 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이게 공정한 거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차피 소수일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주문을 외우게 하는 대신에 사립재단이라도 제대로 감시하여 재단 이월금을 교육 사업에 쓰게 해서 등록금 인상이라도 잡아주었으면 나라에 대한 애착이 강한 시민 키우기에 훨씬 더 주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국기 앞에서의 맹세"의 문화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같은 소수자들을 이지메하는 분위기 만들기에 아주 "기여"할 것입니다. 다들 하나같이 맹세를 외우는 데에 혼자 외우지 않는 사람이 늘 배제 당하고 맙니다. "맹세의 문화"는 자신의 마음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 혼자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악이지요. 맹세라면 같이 하는 것이고, 개인의 판단이란 이미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맹세의 문화"는 자신만의 얼굴이 없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키웁니다. 그게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사명일는지도 모르지요....


출처: 한겨레 박노자글방 2007/06/21 23:08 [원문]

동양에서의 왕조 교체의 이유

[종횡무진 한국사 (하) pp. 35]

농경문명을 중심으로하는 동양적 왕조가 일정한 패턴을 가지며 계속적으로 교체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토지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위해서는 기존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해야 하는데, 그를 위해서는 왕조의 교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체된 토지제도가 그 효력을 발휘하는 동안에는 왕조도 잘 나가다가, 그 효력이 다하는 중기 무렵에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그 영향이 정치에 영향을 미칠 때 왕조가 교체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예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분석 중의 하나인 것 같다.

83세 진융 `아직도 더 배우고 싶다`

캠브리지대 석사 학위 받아
`베이징대서 갑골문 공부`


"중국에 대한 공부가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베이징(北京)대학에 설치된 국학(國學)연구원에서 가르침을 받고 싶어요."

중화권은 물론이고 아시아 지역에서 큰 인기를 누려온 무협소설의 대가 진융(金庸.83.사진)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

1924년 저장(浙江)성 하이닝(海寧)에서 태어난 그의 학문과 중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뜨거웠다. 진융은 "중국 문화 가운데 갑골문(甲骨文:동물의 뼈에 새긴 옛 문자)을 공부하고 싶다"고 의욕을 내비쳤다. 중국을 방문중인 그는 17일 베이징대학 국학연구원 개원 15주년 행사에 참석해 이같은 배움의 의지를 공개했다. 베이징대학 측은 진융이 중국학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화답했다.

이에 따라 진융은 1898년 베이징대학 개교 이래 '최고령 학생'으로 강의를 듣게 될 전망이다. 구체적인 등록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다. 진융은 올해 초 영국 캠브리지대학에서 당나라 역사(唐史)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초 최후의 로마 군단을 연구 주제로 삼으려 했으나 연구에 어려움을 겪다가 주제를 바꿨다. 그는 "베이징에서 공부를 더한 뒤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도 밟고 싶다"며 "학위 때문이 아니라 공부 그 자체가 목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융은 '소오강호(笑傲江湖)' '천룡팔부(天龍八部)'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 '신조협려(神雕俠侶)' 등 중국을 무대로 한 무협소설을 히트시킨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의 작품 중 상당수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특히 우리나라에 '영웅문'으로 소개된 '사조영웅전'은 수백만부가 팔리며 무협소설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전세계에 그의 독자는 3억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작품 '천룡팔부'는 중국 고교 정식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

홍콩의 권위지인 명보(明報)의 설립자이기도 한 그는 1950년대 신문 연재 형식으로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해 70년대 초 '녹정기(鹿鼎記)'를 출간한 뒤 작품활동을 접고 있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zhang@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2007.06.19 04:51 [원문]

2007년 6월 21일 목요일

책) 소오강호 (笑傲江湖)

김용 (박영창 역), 소오강호(전 8권), 중원문화사.

유명한 김용(金庸)이 쓴 무협소설 중 한 작품으로, 김용 작품 중에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다. 예전 임청하, 이연걸 주연의 영화 '동방불패(東方不敗)'의 원작이기도 하다. 이 책의 주제는 정파(正派)와 사파(邪派)란 무엇인가, 그 구별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가 아닐까 싶다. 김용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권력에 대한 욕심이라든지 겉으로만 군자인 척 하는 것 등 다양한 인간 본성에 대한 묘사가 좀 더 자세한 것 같다.

내용은 화산파(華山派)의 수제자인 영호충(令狐沖)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임씨 집안에 비밀리에 전해 내려오는 무공비급 규화보전(葵花寶典)을 둘러싸고 정파와 사파 양측에서 암투를 벌이는 내용이다 (능력부족으로 긴 내용을 적당한 분량으로 줄여쓰지 못해 이 정도로만 생략. 혹시 안 읽어보신 분은 읽어보셔도 후회 안할 거라고 보장. 그만큼 대중성 있음).

김용 소설 중에서 소오강호를 제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 영호충 때문이다. 영호충은 우선 허우대 좋고 얼굴도 잘 생긴 편인, 겉보기에서는 꿀릴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보다 유쾌하고 여유있는 말솜씨, 더구나 두려운 것이 없는 듯한 말투는 자칫 그를 가벼운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진정한 매력은 정파의 가르침 그대로를 따르는 마음과 행동이라 하겠다. 앞서 말한 것처럼 겉보기에는 약간 천박해보이기도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충심으로 신의를 지키며, 남녀 간의 관계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변치 않는 마음을 가지며 희롱하거나 가벼운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의 욕심이나 야망을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이용하지 않으며, 강자의 위협에 결코 굴하지 않는다. 참, 술을 매우 좋아하고 잘 마신다 (술자리를 좋아하지만 술에 약한 나로서는 부럽다).

정리하면 겉으로는 가볍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말그대로 교과서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군자검(君子劍)의 별호를 가진 스승 악불군의 위군자(僞君子)적인 행동과 대비된다.

개인적으로는 소설 중에서는 역사를 다룬 소설을 좋아하고(三國志, 大望 등), 또 김용의 장편소설들은 대개 중국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절묘하게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시는 점이 내가 김용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소오강호에서는 중국 역사상의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느 시기인지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개인적으로 그저 명대 쯤일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김용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무협지답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김용 작품 말고 무협지를 읽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지만 다양한 개성과 가치관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등장해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좀 더 정치적으로 얽히고 섥히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리고 정사(正邪) 구분의 무의미함을 통해 마치 사상적 이데올로기의 공허함을 말하는 듯 하다. 실제로 이 소설이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을 빗대어서 쓴 것이라고 어디서 본 것 같다 (정확히 어디에서 봤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

또한 이 소설의 키워드 중 하나가 앞에서 말한 위군자인데, 좌냉선으로 대표되는 겉으로도 속으로도 권력 지향적인 사람에 비해, 악불군처럼 자기의 야망을 숨기고 겉으로는 초연한 척하는 위군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악불군의 본성에 대해서는 약간의 복선이 나오기도 하지만, 거의 반전에 가깝다). 주인공 영호충은 진짜 군자이나 겉으로 봐서 그것을 쉽게 알기 어렵고, 악불군은 누가봐도 군자의 행동거지나 말을 보이지만 결국에는 위군자인 것이다.

또 한가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심리묘사이다. 흔히 김용의 작품 중에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영웅문 2부로 알려져 있는 신조협려를 꼽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신조협려에서 양과와 소용녀의 사랑보다는, 소오강호에서 영호충의 사매 악영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림의 영호충에 대한 소녀와 같은 동경, 영영의 영호충에 대한 세련되지 못한 애정의 표현 등에서 더 감동을 느꼈었다 (뭐, 원래 익숙치 않은 영역이라... ㅎㅎ 제일 어려운 것은 남녀 간의 마음이로다).

이 소설은 초반에 정파의 유정풍과 마교 곡양의 음악을 통한 목숨을 뛰어넘는 우정 때문에 빚어지는 비극이 등장한다. 소설의 제목 '소오강호'는 이 두 사람이 같이 만든 음악의 제목이다 (그 뜻은 '강호를 호탕하게 비웃는다' 정도?). 그리고 소설의 결말은 정파와 마교의 또 다른 인물인 주인공 영호충과 마교 교주의 딸 영영(盈盈)이 결혼하여, 같이 소오강호를 연주하는 것이다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 이 두 장면을 통해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스포일런가? ㅎㅎ)

국보법은 미국 가면 돌 맞는다

[한겨레] 수정헌법 제1조를 통해 본 국가보안법의 후진성…
“모든 정치적 의견은 토론의 시장에서 정화된다”

▣ 노트러데임(미국)=박용현/ 한겨레 편집부 기자 piao@hani.co.kr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싼 법리 논쟁이 갈수록 볼만하다. 외국에서 바라보니 더욱 그렇고, 미국 로스쿨에서 법의 잣대를 들고 보자니 더더욱 그렇다. 그 점입가경의 극치는 역시 ‘광화문 인공기’나 ‘주체사상연구소’식의 자극성 상황 설정과,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이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는 호들갑이다.

알카에다도 의견 낼 수 있어

미국 인디애나주 노트러데임대학 로스쿨 교수인 리처드 가넷에게 이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하찮은 논란에 불과한 듯했다. 그는 “미국엔 특정 이념을 선전•선동하거나 적국을 찬양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표현•언론•집회의 자유 등을 규정한 수정헌법 제1조는 일개 헌법 조항인데도 독자적인 법 과목을 이룰 정도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 수정헌법 제1조 아래에선, 9•11 동시다발 테러의 참혹한 악몽에도 불구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거나 알카에다에 단순 가입하는 사람조차 처벌할 수 없다는 게 가넷 교수의 설명이다. “현행법에서는 테러단체를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행위에 이르러서야 처벌이 가능합니다.” 이는 이론상의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 이슬람교도들을 향해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미국인을 살해하라”고 지시하는 빈 라덴의 ‘세계이슬람전선 성명’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녀도 이를 문제 삼은 적이 없다. 인권단체와 일부 로스쿨 교수들은 ‘물질적 지원 금지’에 대해 “테러단체로 지목된 단체들도 각종 합법적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만큼 일괄적으로 기부나 원조 행위를 금지해선 안 된다”며 이마저도 지나친 규제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달 초 미국 캔자스주 항소법원에서는 테러에 대한 공포와 개인의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는 미국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판결이 있었다. 평소 빈 라덴을 찬양하고 “미국인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한 이란인 노동자가 9•11 1주년 직후 미국인 동료들에게 “닷새 뒤 미국 전역에 테러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미국을 비판하고 빈 라덴에 대한 지지를 밝힐 권리는 그야말로 보호된다”며 “그러나 마치 임박한 테러에 자신도 가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로써 여성 동료가 불안해서 울 정도로 만든 것은 정치적 의견 표명이 아닌 폭언에 해당한다”고 유죄 이유를 밝혔다. 재판의 초점은 ‘말의 내용이나 관점’이 아니었다. 이 이란인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 판결은 9•11 이후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테러 공포증의 민감도를 말해주는 한편, 그럼에도 정치적 의견의 표명에 그치는 한 어떤 말도 법적인 제재를 받지 않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9 11 이후 미국 정부는 이른바 ‘애국자법’을 통해 테러수사 기관에 지나친 정보 수집 권한을 줌으로써 개인의 사생활을 위협하는가 하면 아랍계 외국인에 대한 차별 강화, 테러 용의자의 변호인 접견권 불허 등으로 인권 상황을 급속히 악화시켜왔다. 이란•콩고•파키스탄 등과 더불어 미성년자까지 사형에 처하는 8개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은 사실 인권에 관한 한 선진국으로 볼 수도 없다.

브란덴버그 기준… 정부 협박한 KKK 인정

그러나 9•11 이후에도 의견과 그 표현을 처벌하는 법만은 만들지 않고 있다. 이는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처벌해야 할 표현의 범위에 대해 확고한 법적 기준을 형성해왔고, 이 기준을 넘어 법을 만들 경우 연방대법원에 의해 위헌으로 판명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중 국내에도 잘 알려진 것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기준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 대상자들에게 징집 거부를 촉구하는 우편물을 발송한 혐의로 미국 사회당 사무총장이 기소된 사건에서 홈즈 연방대법관은 “어떤 의견 표현이 행해지는 상황이나 그 성질로 보아 실질적인 해악을 가져올 것이라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발생하느냐 여부”를 처벌 기준으로 제시했다.

이 기준은 국내에서도 국가보안법 사건 변호인들에 의해 종종 인용되곤 한다. 국가보안법에 걸리면 명백한 위험을 일으키지 않는 행위도 처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행위조차 처벌해야 한다고 보는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이 이 기준을 받아들일 리 없다. 이들은 거의 1세기 전, 그것도 전쟁의 와중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이 그려놓은 표현의 한계선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기준은 이후 홈즈 대법관을 표현의 자유의 대명사로 만들면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보호막이 되지는 못했다. 1950년대 매카시즘에 휩쓸려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소된 이들에게 대대적인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미국 법원은 다시 표현의 자유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69년에 나온 브란덴버그 사건 판결이다. 무장한 KKK(극우 백인단체) 단원들이 모여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정부 요인에 대한 보복도 불사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집회를 다룬 이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비록 폭력이나 불법적인 수단의 사용을 옹호하는 말일지라도, 즉각적인 불법 행위를 선동해서 그런 사태가 실제로 벌어질 만한 상황이 아닌 한 금지돼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이 정도 기준에 이르면, 한총련을 비롯한 국내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거의 대부분 무죄로 기울 게 분명하다.

예를 들어 폭력에 의한 정부의 전복을 주장하더라도 이른 시일 안에 봉기에 나설 것을 선동하고 그런 결과가 곧 예견되지 않는 한 그런 주장은 허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사상의 자유 시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토론할 시간적 여유만 주어진다면 위험한 생각도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충분히 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질서는 처벌의 공포만으로 지켜지지 않으며, 사회의 안전으로 가는 길은 불만과 대안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의 기회 속에 놓여 있다”라는 게 연방대법원의 철학이다.

브란덴버그 기준은 이후 베트남전 당시의 반전시위 사건을 비롯해 모든 불법 행위 선동 사건의 처벌 기준으로 확고히 유지돼오고 있으며, 수정헌법 제1조 교과서에서 첫 판례로 소개하고 있다.
미국 역사에서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과도하게 침해받아왔는지를 연구한 책 <위험한 시대>를 이달 출간한 조프리 스톤 시카고대학 로스쿨 교수는 “브란덴버그 기준이야말로 의견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기 위해 우리가 감내해야 할 최대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는 “반대쪽 의견에 대해 관용하고 자문해보는 태도를 버린다면, 우리는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싸우는 꼴이 될 것”이라면서 “미국 법원은 과거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었고, 앞으로는 안보상 필요성에 따른 표현의 자유 제한을 더욱더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9 11 테러도 ‘표현의 자유’ 꺾지 못해

미국 내에는 이런 기준을 달갑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다수 여론은 굳건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표현의 자유 침해를 감시하는 시민단체인 퍼스트어멘드먼트센터가 내놓은 올해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 보장이 지나치다”는 대답은 조사 대상자 1002명 중 30%에 그친 반면 65%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9•11 테러의 충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2년 전 조사에서도 안보를 위해 표현의 자유를 더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은 과반을 넘지 못했다.

다시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국가보안법 존치론자들은 안보 불안 심리를 부추기느라 여념이 없고 반대편에선 법을 고쳐도 처벌할 건 다 처벌할 수 있다는 논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침해해온 권리는 무엇이고 앞으로 이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는 정작 전면에 떠오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법원을 비롯한 법조계에서는 형법 대체안의 처벌 기준이 모호하고 또 다른 남용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법이 바뀐 뒤에도 죄명만 바뀐 채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여전히 구속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기준을 찾는 적극적인 논의가 시급한 시점이다.

어쩌면 이는 민주주의의 원형을 회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도 ‘이세고리아’라는 표현의 자유 개념이 확고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이세고리아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체제의 근본적 차이는 아테네에서는 스파르타 체제를 찬양할 자유가 있지만, 스파르타에서는 스파르타 이외의 체제를 찬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2300년이 지난 시대에 살고 있다.

유럽, 아시아, 전세계 어디서나… ‘브란덴버그 기준’ 수준의 표현의 자유 보장이 미국만의 것은 아니다. 지난 1995년 국제법 전문가들이 국가 안보와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면밀히 논의한 결과 채택한 ‘요하네스버그 원칙’도 그와 비슷한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 원칙은 이후 유엔의 공인을 받았다.

이 원칙 제1조는 국가 안보의 필요성에 따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더라도 △그 표현이 심각한 위협을 줄 때 △국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제한만 가해야 하며 △그 제한은 민주적인 원칙에 부합해야 한다는 전제를 규정하고 있다. 특히 표현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선 그 표현이 △즉각적인 불법 행위 선동을 의도했고 △그런 불법 행위를 유발할 것 같으며 △그 표현과 불법 행위의 발생 가능성 사이에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세 가지 사실을 정부가 증명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이런 기준은 단지 이론적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많은 나라에서 이미 법적인 원칙으로 자리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선진국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인도 대법원은 이미 지난 1989년 제한할 수 있는 표현의 범위를 이렇게 판시했다. “표현 행위가 유발할 것으로 예상되는 위험이 시간적으로 먼 일이거나 단지 추측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그 표현과 직접적이고 근접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마치 화약통 속의 스파크처럼, 의도하는 행위를 일으킬 만한 표현이어야 한다.” 나이지리아 대법원의 1983년 판결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폭력에 의한 체제 전복 선동으로부터 우리의 공동체를 지킬 중요성이 커질수록,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 또한 더욱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야만 정부가 국민의 뜻에 책임을 지는 것이고 국민이 바라는 변화를 평화적으로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이 가입해 있는 유럽인권재판소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사건이 자주 다뤄지는데, 역시 엄격한 잣대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고 있다.

쿠르드족이 무장투쟁 등 강력한 분리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는 터키에서, 지난 1989년 정부의 쿠르드족 탄압 중단과 쿠르드족의 자유 의지에 근거한 평화적 해결 등을 주장하며 창당된 공산당이 그 강령을 이유로 해산 명령을 받았다. 공산당 지도자들이 터키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정당의 활동이 헌법적 체제를 훼손한다는 정부의 판단만으로는 결사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 특히 정당은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의 작동을 보장하는 데 본질적 역할을 하는 만큼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더욱 보호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터키 영토의 일부를 쿠르드족의 땅으로 지칭하며 쿠르드노동자당의 무장 활동을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처벌당한 언론인의 제소에 대해서도 이 재판소는 “개인의 의견을 주장했을 뿐이고 즉각 무장저항에 나서도록 설득하려 한 의도도 없는 만큼, 이 기사는 쿠르드족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언론의 자유와 정보 접근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출처: 한겨레21 200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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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폭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아 양심이 있느냐?

개봉 전의 기대치를 보려고 왔건만, 이런 영화를 왜 만드느냐, 5.18이 모래시계나 기타등등 많이 만들어졌는데 돈벌려고 또 만드냐, 폭동을 미화하느냐 등등등 개쓰레기만도 못한 글들이 수두룩하구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독재정부가 쿠데타를 인정 못하는 주민을 학살한 것이다. 그리고 더 참혹한 사실은 내가 대학생이 되기 전에 5.18이 뭔지도 얼마나 죽었는지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깡촌 시골학교에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선생님이 외우라는 것은 열심히 외웠고 필요없다는 것은 한 자도 읽지 않았다. 아프리카 여러나라의 주요 수출품을 외우고,수천년전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년도를 외웠다. 땅속 광석들의 종류를 구분하고, 농업시간엔 젖소나 돼지의 임신기간도 외웠다. 하지만 내가 아기일때 이나라에서 수백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다쳤다는 역사는 말하지 않더라.. 폭동인지 투쟁인지 내가 판단할 일인데 나이든 국사선생님은 알 필요조차 없다고 느끼셨나 보다. 고교졸업후 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당시 맞아가며 수년동안 외웠던 암기사항들은 전혀 기억에도 없지만, 대학신입생때 잠깐 배운 5.18의 슬픔은 내게 지식으로 남았다.

요즘도 많은 이들이 북한을 욕하고 일본을 욕하고 남미,아프리카를 비웃는다. 북한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켰고, 일본은 타국을 괴롭히고도 반성이나 사과할 줄 모르며, 아프리카,남미는 끝없는 내전으로 서로를 죽여가며 기아에 허덕이는 한심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웃음과 비난을 날리는 사람들 중에 더한 인간들이 있다.

북한이나 일본으로부터 자신과 국가를 지켜달라며 믿음과 세금을 보냈지만, 주적 김일성과 오십보 백보인 대머리 인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오히려 지켜야 할 대상을 죽이는 일을 벌이고도 반성을 모르는 인간들이다.

북한을 동족을 죽인 빨갱이라면서 자기도 동족을 죽이고 일본이 제대로된 사과를 안한다면서 그들은 사과조차도 없고 지금도 빨갱이폭도이라 매도하며, 제3세계의 가난한 내전국을 비웃으며 우리나라도 그런 참혹한 살육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을 욕하고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바라기 전에 우리부터가 당당해야 하지만, 친일파와 군부의 남은 찌꺼기들은 끝까지 똥칠을 하고 있다.

더이상 폭동이나 간첩들의 음모니 떠들어서 다른 나라들이 비웃을 추잡한 짓거리를 하지말자. 이건 아이들에게 숨기고 이웃나라에 숨기고 자신에게도 숨길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라, 무력과 폭압에도 죽음으로 맞선 자랑스런 역사다. 다른 나라같으면 자랑할 역사를 스스로 지우고 깍아내리고 욕하기 바쁘니 얼마나 추한가. 일본이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문제나 난징학살을 지웠다고 욕하기 전에 우리의 역사나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스스로의 과오를 청산하지 못하는 민족이 타민족의 사과를 바라는 건 넌센스다. 독일은 학살자로서의 과거를 눈물로 사과하고, 파시즘에 반대하다 고문과 노역,살인으로 숨진 열사를 기리며, 경제적 마이너스를 알면서도 통일을 이룩했다. 일본이 독일처럼 못한다고 욕하기 전에 우리부터 독일의 장점을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은 물론 제3세계 가난한 국가들도 억압과 파시즘, 군사독재, 이념의 충돌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탈이데올로기로 발전해 가는데, 아직도 암흑시대를 그리워하고 과거를 조작하기 바쁜 쓰레기들이 한국에 발로 차일 정도로 넘쳐난다는게 정말 부끄럽고 답답하다.

의경복무시절 상관이신 경찰관 중에 특수부대원으로 광주에 계셨던 분이 있었다. 당시의 이야기를 하는 걸 꺼려하셔서 자세한 얘기는 못했지만 네이버의 쓰레기들처럼 폭도니 빨갱이니 하는 소리는 없더라. 그 자리에서 피흘리고 동료가 죽어가는 현장에 계신 분도 말이 없는데, 빈깡통이 요란하다고 경험도 지식도 인격도 모자란 놈들이 더 설치는게 아닌가 한다.

40대면 불혹이고 50이면 지천명의 나이다. 인터넷 익명성의 편의아래 개똥보다 못한 지저분한 생각들을 배설물처럼 쏟아내지말고, 인간적인 글들을 남겨서 인생의 후배들을 감동시키는 건 못하는가?

이제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적은 분들이시여... 누군가들 비난하고 깍아내리고 욕하는데 남은 인생과 열정을 쏟기에는 아까운 시간이 아닌가? 죽을 때까지 누구를 비하하고 당신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 분노해서 자신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건가? 기성세대로서의 존경을 나이로만 받으려 말고 쌓여진 주옥같은 지식과 인생의 철학들로 받으려 노력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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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격양된 감정으로 쓴 두서없는 글이 메인리뷰에 오르니 많이 쑥스럽습니다.

지우고 싶은 생각도 들고 과격한 표현들을 고치고 싶기도 하지만 왠지 자신을 속이는 듯 싶어서 그냥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역사는 외우는게 아니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가기위해 공무원이 되기위해 억지로 외워야 하는 암기사항도 아니어야 하며, 자신의 해박함과 암기력을 자랑하기 위한 지식이 되어서도 안되죠.

이순신장군도 자신의 이긴 전투의 횟수가 몇번이고 대첩들의 순서와 위치, 격파한 일본의 함선이 몇척인지를 달달 외우며 암기하기를 바라시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기를 원하시지도 않겠죠. 다만 자신과 조선의 민초들이 격은 고통과 맞써 싸운 용기들을 가슴속에 담고 있기를 바라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5.18의 열사와 희생자들도 자신들이 영웅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진 않으리라 생각하네요. 다만 그들의 용기와 마지막까지 잃지 않았던 희망들을 잊지 말고 기억해 주기를 바라리라 믿습니다.

그날의 광주에 있었던 민간인도 시민군도 군인도 모두가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혼돈과 공포, 슬픔과 희망을 지금의 후세들과 비경험자들이 느끼지도 완전히 알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매일같이 기억하고 공부할 수도 없죠. 하지만 절대로 잊지만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네이버 영화리뷰에 와서 멋진 글, 재밌는 글, 웃기는 글들을 찾으며 영화의 오락성을 많이 추구했고 장난같은 댓글과 리뷰를 가끔씩 쓰면서 혼자 좋아하며 여흥처럼 이용했었네요.

하지만 "화려한 휴가" 에서는 그런 오락과 재미만을 추구할 수는 없었고 결국 타인들의 독설을 독설로 대응하는 미숙함을 보이며 제가 잊고 있었던 생각들을 적었습니다.

쪽지까지 보내주신 어느 분의 말씀처럼 "화려한 휴가"가 역사와 진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걸,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걸 보여줬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왜곡된 현대사와 과오들이 수정되고, 서로를 미워하고 새로운 갈등을 만드는 그릇된 사회구조가 사라질 수 있도록 새로운 세대인 우리들이 지역과 정치관을 넘어서 서로 노력했으면 합니다.

(많은 추천과 댓글 감사드리며. 다른 역사관과 정치관을 가지신 분들을 심하게 모욕한 점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

출처: 네이버 영화 네티즌 리뷰 natural200 님의 글 (관련영화: 화려한 휴가) [원문]

영화) 빅 피쉬 (Big Fish)

빅 피쉬 (Big Fish, 2003) / 미국 / 드라마, 판타지, 코미디 / 125 분 / 개봉 2004.03.05

감독: 팀 버튼
출연: 이완 맥그리거, 알버트 피니, 빌리 크루덥, 제시카 랭, 헬레나 본햄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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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거짓말에 실망했던 아들이, 그 거짓말이 순전한 거짓말은 아니며 그 속에 자기에 대한 사랑이 들어있었음을 깨닫고 화해하는, 동화같은 가족 영화.

좋아하는 영화감독인 팀 버튼 감독의 작품이다. 나는 팀 버튼 감독의 동화같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기억나는 영화로는 '가위손', '비틀쥬스', '배트맨 1,2', '크리스마스의 악몽', '화성침공', '찰리와 초콜렛 공장' 등이 있다. 위에서 말한대로 세상에는 없는 듯한 환상적인 배경에서 동화같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스타일이 좋다. 왠지 '조니 댑'이나 '위노나 라이더'의 분위기와 딱 맞는 감독같다.

위에서 말한대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인데, 아들은 과거에 대해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사이가 않좋았는데, 알고 보니 아버지의 거짓말은 없었던 이야기를 말했다기 보다는 실제 경험했던 일을 과장해서 말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마을 사람들의 말썽이었던 엄청난 거인은 실제로는 2미터가 넘는 거한이었고 (그래도 크긴 크다), 전쟁 중에 만난 서커스단의 샴쌍둥이는 실제로는 그냥 쌍둥이었고 이런 식이다 (이 사람들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다 확인된다). 아들에게 무미건조한 삶에 대한 꿈을 주기 위해서였을까. 여튼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며 서로 화해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기억에 남는 부분은 영화가 끝날 때 쯤 아버지가 죽을 때, 아버지의 이야기에 등장했던 사람들이 다시 이야기 속의 모습대로 등장해서 아버지가 물고기가 되는 걸 (아버지는 자기가 죽어서 물고기가 될 거라 했다) 도와주는 장면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프러포즈하는 부분에서도 감동했었는데 구체적으로 기억은 안 난다.)

이 영화는 극장에서 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만족해하는 것 같진 않은 분위기였던 것 같다. 싱거운 영화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고, 기존에 팀 버튼을 좋아했던 사람은 특유의 냉소적인 맛이 없는 영화라고 평했다. 하지만 냉소적인 것도 좋아하고 따뜻한 인간미도 좋아하는 (다 좋다는 말?) 나로서는 감동적으로 봤던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거짓말을 싫어하지만 (이 영화의 아들이랑 비슷할까), 이 영화에서 아버지가 하는 거짓말은 싫지 않았다. 삭막한 삶이지만 이렇게 낭만을 갖고 살 수 있다면...

南北 송전선로 59년만에 다시 연결

개성공단 평화변전소 준공..10만kW급

(서울=연합뉴스) 김종수 기자 = 고압 송전선로를 이용한 남.북한간 전기공급길이 다시 열렸다. (jsking@yna.co.kr)

배전방식을 이용한 공급은 이미 2년전부터 이뤄져 왔지만 송전방식의 남북간 전력공급은 북한이 1948년 5월 대남송전을 중단한 뒤 59년만이다.

산업자원부와 한국전력은 21일 개성공단 현지에서 김영주 장관과 이윤성 국회 산업자원위원장, 이원걸 한전 사장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성공단 1단계 구역(330만㎡)에 전력 공급을 담당할 '평화변전소'의 준공식을 가졌다고 밝혔다.

지난해 4월부터 공사를 시작한 개성공단 송.변전설비는 경기도 파주의 문산 변전소에서 군사 분계선을 지나 개성공단까지 총 16㎞구간에 350억원을 투입해 건설됐으며 철탑 48기와 154kV급 송전선로, 개성공단내 옥외변전소 등으로 구성됐다.

전력 공급량은 10만kW급으로 대구 성서공단이나 목포 대불공단(각 12만kW)에 공급되는 전력와 맞먹는 규모이며 한전은 향후 입주기업과 전력수요가 커지면 변압기를 늘려 최대 20만kW까지 공급을 확대할 방침이다.

한전은 2005년 3월부터 개성공단 시범단지와 본단지 일부 입주기업에게 이미 전력을 공급해왔으나 이는 고압으로 전기를 보낸 뒤 변전소에서 변압과정을 거쳐 공급되는 일반적 송전방식이 아니라 문산 변전소에서 변압된 전력을 1만5천kW범위내에서 배전방식으로 공급하는 형태였다.

일제시대에 건설된 발전설비가 대부분 북쪽에 밀집해있던 탓에 남북한간에는 해방 이후에도 송전방식의 전기공급이 이뤄져왔으나 북한은 1948년 5월14일 남측의 요금 미납을 이유로 평양∼수색 변전소간 154kV 송전선로를 통해 남한으로 공급되던 전력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김영주 장관은 이날 축사에서 "남북간 송전선로 연결은 열차 시범운행에 이어 남과 북의 혈맥을 잇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고 "한반도 평화 증진과 남북 공동번영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변전소의 개설과 운영을 맡게 된 한전의 이원걸 사장도 "평화변전소는 남북공동번영의 필수기반시설"이라며 "안정적이고 경제적인 시설운영에 최선을 다해 개성공단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겠다"고 말했다.


출처: 연합뉴스 2007/06/21 10:14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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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양극화 OECD 세번째로 커…사회보장 지출은 꼴찌

(그림: OECD 각국 상용직 임금생활자 소득격차(왼쪽)와 일반세의 사회보장 부문, 크게보시려면 클릭)

OECD 20개국 조사결과 보고서 발표
“상대빈곤율 높아지는데 복지지출 낮다” 우려


소득 격차에 따른 한국의 양극화가 세계적으로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19일(현지시각)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07년 고용전망 보고서’를 보면, 조사 대상 회원국(20개국) 가운데 한국은 소득 격차가 세 번째로 큰 나라로 드러났다.

이 기구는 상용직 임금생활자의 하위 10% 계층에 견줘 상위 10%의 평균소득이 얼마나 많은지를 나타내는 소득 10분위 배율을 통해 격차 정도를 평가했다. 이 조사에서 한국은 2005년 소득 10분위 배율이 4.51로, 헝가리(5.63)·미국(4.86) 다음으로 높았다.

한국은 또 1995년부터 10년 동안 소득 격차가 많이 벌어진 대표적 나라로 꼽혔다. 이 기간 한국의 소득 10분위 배율은 3.64에서 0.87이나 늘었다. 한국은 헝가리(1.67)와 폴란드(0.91)에 이어 세 번째로 격차가 심해졌다.

노르웨이(2.21)·스웨덴(2.33)·핀란드(2.42) 등 북구 쪽은 소득 격차가 가장 덜한 나라로 조사됐다. 조사 대상국 가운데 아일랜드(3.57)와 스페인(3.53)만 지난 10년 동안 소득 격차가 줄어들었다.

이 보고서는 한국이 멕시코·터키와 더불어 “사회 안전망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나라”라고 지적했다. 특히, 한국은 2003년 일반세의 사회보장 부문 사용비율이 3%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국 가운데 꼴찌이며, 평균 43%에 크게 못미쳤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적 비용의 규모가 10% 미만인 나라는 한국과 멕시코뿐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는 또 20일 발표한 ‘한국경제 보고서’에서 최근 들어 한국의 상대빈곤율(가처분소득이 중간계층 소득의 50% 미만)이 크게 늘고 있는데도 사회복지 지출이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는 점을 우려했다. 보고서는 90년대 중반 9%던 한국의 상대빈곤율이 2000년대 들어 급속하게 높아져 이 기구 평균치(10%대 초반)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며, 공적부조 수혜대상을 더 확대해 최저생계비 수준의 소득을 확보하도록 돕는 게 시급하다고 권고했다.

한편, 고용전망 보고서는 세계화의 혜택이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소득 격차와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무역·투자 개방 정책이 전세계 생활수준을 향상시켰다”면서도 “일부 노동자들은 세계화로부터 많은 것을 잃는다”고 짚었다. 조사 대상국의 생산성은 지난 2년 동안 평균 1.5% 늘어났지만, 1인당 실질임금은 2005년 0.6%, 2006년 1.2% 증가에 그쳤다.

이 보고서는 “기술·교통·통신의 발달과 중국·러시아·인도·브라질 등이 제공하는 값싼 노동력으로 세계 경제환경이 변화하고 있다”며, “회원국 정부가 고용과 임금 분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권고했다. 보고서는 또 회원국들이 자유무역을 활성화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노동조건 개선과 사회 안전망 확충을 통해 노동시장을 변화시키는 데도 앞장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외현 최우성 기자 oscar@hani.co.kr

출처: 한겨레신문 2007-06-21 오전 08:35:29 [원문]

누가 싸이에게 돌을 던지랴?

재입대의 악몽을 꾸었다.

탁현민 기자

이렇게 쓰고 싶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회 구석구석 물렁물렁한 곳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유독 준엄한 구석이 하나 있으니 바로 병역문제다.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징병의 나라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 병역문제는 어떤 사건, 사고 보다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누구든 비위의 대상으로 선정되는 순간 거의 '아작'이 난다.

군대 가는 것을 가슴 벅찬 신성한 병역의 의무라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고, 다들 제대하면 오줌도 그쪽으로 안 싼다고 이를 박박 갈면서 제대하고, 제대해서 몇 년 동안 잊지 않고 불러 모으는 예비군 훈련이 지겨워 죽겠는게 대부분의 남자들이다.

그렇게 가고 싶지 않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군대이건만, 누가 어찌어찌해서 면제라거나, 공익으로 빠졌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군대 안 갔다 오면 남자도 아니라느니,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국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느니, 애국심이 없다느니,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까닭을 참 모르겠다.

끌려갔다온 사람들이 안 간 사람들에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면제받거나 대체복무를 하게 된 사람들이 제대로 조국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못 가진 것이 안쓰러워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 가수 싸이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렇다.

검찰에서는 그가 애초의 대체복무 분야와 다른 일을 했고 그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고, 네티즌과 일반 여론은 모범을 보여야 할 연예인이 어떻게든 군대를 안 가려고 꼼수를 썼고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는 사실이 괘씸하다는 것인이다. 군대 갔다 왔고, 가기 싫은 예비군도 다녀왔고, 이제 민방위 3년차에 접어든 입장에서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싸이에게 '다시 군대 가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아니 '일빵빵' 주특기 받고 '60미리' 메고 뛰어 다닐 수도 있는 일이고, 소총수로 왔다가 행정병으로 확 풀려 버릴 수도 있는 곳이 군대 아니었나? 제대로 근무를 안 했다는 것도, 그래 군대라는 곳이 풀리면 다행이고 꼬이면 에라 어떻게든 돌아가는 게 국방부 시계라고 믿으며 2년 2개월(지금은 2년인가) '뺑이 치는 곳' 아니었는가 말이다.

업무를 게을리 했다는 검찰의 엄숙한 발표는 그래, 솔직히 좀 뜨끔했다. 군대 있을 때 업무를 게을리 한 것이 문제라면 나도 어쩌면 다시 군대 생활을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상병 때까지는 병장 눈치 보여 그럭저럭 열심히 하는 '척' 했지만 병장 달면서부터는 어떻게든 짱 박히려 노력 했고, 제대를 앞두고는 '아. 세상에 가장 편한 것은 육군 병장 말 호봉'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업무 태도가 불량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나도 참 할 말이 없다.

그래 물론 이 나라에서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 모두 나나 싸이 같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은 한다. 정말 병역의무를 신성하게 생각하고, 하루하루 '충성'하며 열심히 생활하다 온 사람들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가기 싫고,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가서 그래도 적당히 사고치지 않고 시간 채워 나왔다면 그도 최소한의 의무는 다한 것이다. 아마도 주특기대로 복무하지 않았다고 땡땡이 쳤다고 다시 군대 가라면 아마도 다시 가야할 사람 적지 않을 것이고 기준이 그렇다면 병역비리수사는 전국적으로, 전 방위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네티즌과 여론의 감정은 이해가 가는 측면이 없지 않다. 나 역시 돌아서면 네티즌이고 여론의 한 부분이니 솔직히 "싸이, 그냥 제대로 갔다 오지 꼼수 쓰다가 잘 걸렸다"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근데 그게 솔직히 고백하자면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싸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거나 그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행해야할 사회적 도덕적 책무를 방기했기 때문에 분노해서는 아니더라.

누구는 '뺑이' 치고 삼년 썩었는데(사실 2년 2개월인데 왜들 꼭 삼년이라는지 모르겠다. 나도 마찬가지고) 누구는 군대 안가고 편하게(사실 편한지 아닌지도 잘 모르지만) 있으면서 그마저도 제대로 안했다니까 부아가 치밀어서 그런 것이었다.

글쎄, 내가 군대 있을 땐 '대체복무'라는 것이 없어서 그게 그렇게 편하고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이해하기에는 대체복무도 군대처럼 다 하기 싫고, 가기 싫은 것이지만 우리 사회가 좀 더 발전(?)하면서, 군대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게끔 만들어진 제도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대체복무'중에 제대로 일했느냐? 아니냐? 는 과정 중에 물어야 할 책임이지 제대, 아니 소집해제, 아니 퇴사? 여하튼 끝난 마당에 따질 일은 아닌 것 같다.

제대한지 10년도 넘은 내게 검찰이든 헌병대든 찾아와 '너 93년 복무 중에 사역 나간다고 하고서 PX에서 짱 박혔던 적 있지?' 조사하면 이런 젠장 나도 군대 다시 가야 되는 것이냐?

-- 덧붙히는 글
분명히 이런 분들 계실 것 같아 미리 말해두는데
싸이와는 반면식도 없는 사이다. 당연히 뭐 하나도 받아먹은 것 없다.
군대는, 열심히는 안했지만 여하튼 다들 그렇듯이 제대로 제대 했다.
애국심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은? 죄송스럽지만 그다지... 어쩌랴 먹고살기 고달픈데.

출처: 오마이뉴스 2007-06-21 08:54 (원문)
ⓒ 2007 OhmyNews

2007년 6월 20일 수요일

“이순신동상이 이순신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

창원대 도진순 교수

(사진: 4월28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을 앞두고 충남 아산자율방범연합대원들이 충남 아산 신정호 국민관광단지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세척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 크게, 더 높게만 세워놓은 이순신 장군 동상이 오히려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막고 있다.”

창원대 도진순(사학과) 교수가 19일 오후 경남도의회 회의실에서 도의회 선진교육문화연구회(회장 이유갑)가 마련한 포럼에서 '과거속의 미래 찾기:남해안 시대와 충무공 이순신-동북아 해양평화벨트 구축을 위한 시론'이란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하면서 서두에 강조한 말이다.

도 교수는 전국적으로 인간적인 내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높게, 크게만 세워놓은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에서는 난중일기 곳곳에서 나타난 이충무공이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낸 고통과 전쟁에 대한 고뇌, 각종 질병 등의 모습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또 수병의 주요 무기가 활인데도 활을 든 이순신은 전혀 없고 천편일률적으로 칼을 든 이순신만 있다고도 꼬집었다.

이에 비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칼레의 시민’에서는 사람 그 자체보다 생각이 보이고 영-프 전쟁 당시 도시를 구하기 위해 교수형 집행지를 향해 걸어가는 시민들의 고뇌가 잘 드러나 있다고 도 교수는 지적했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임란 당시 일본 장수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고 좌충우돌형으로 그리는 것 또한 당시 일본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의 막강한 전투력을 오판할 수 있도록 한다고 도 교수는 강조했다.

그는 "이순신을 이런 식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조총과 일본, 세계를 보지 못하게하는 것은 물론 당시 민중과 조선의 현실,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망각하도록 하고 있다"며 "도가 추진하고 있는 이순신 프로젝트도 1천400억원을 들여 다시 이순신만 찾고 있다"고 비판했다.

도 교수는 이어 남해안 일원에 흩어져 있고 제각각 관리되고 있는 임진왜란 유적지와 방치되고 있는 왜성 유적지, 러.일전쟁 유적지, 식민 유적지 등을 묶어 동북아 국제평화와 교류를 기본 개념으로 하는 해양 역사공원으로 만들자는 제안도 했다.

그는 또 일본과 중국의 전쟁 유적지와 연계해 크루즈 투어를 실시하는 방안도 내놓고 궁극적으로 한.중.일의 전쟁 관련 유적과 평화공원 등을 묶어 '동북아 해양평화벨트'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도 교수는 "자신이 아닌 타인, 선인이 아닌 악인, 영광이 아닌 치욕, 영웅이 아닌 범인(凡人)의 유적을 어떻게 기념하고 기억할 것인가가 화두"라며 "함부르크의 반파시즘 기념관과 일본 오키나와(沖繩) 평화공원의 사례처럼 치욕의 역사는 없애는것이 아니라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진: 영국 런던 빅토리아 타워 가든에 있는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들’(The Burghers of Calais). 위키피디아 이미지)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들’이란?

1884년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인 칼레시의 시장으로부터 1347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당시 영국에 시 전체가 포위되었을 때 도시를 구한 영웅들의 조각상 제작을 의뢰받았다.

전쟁 당시 칼레는 1년 가까이 영국의 공격에 버텼으나 도시 절멸의 위기 앞에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영국왕 에드워드3세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며 도시 대표들의 목숨을 요구했다. 불안에 떤 칼레 시민들 중에서 자원자가 나섰다. 칼레 최고의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였다. 이후 칼레의 지도자와 귀족들이 줄줄이 뒤를 이어 자발적으로 나섰다. 모두 6명의 의인이었다. 시민을 위해 스스로 희생에 나선 이들이 칼레를 구했다.

로댕은 숭고한 역사를 담은 작품 완성에 10년이란 세월을 투자했다. 칼레 시민들은 거장 로댕의 손길이 칼레와 그 시민들을 구한 ‘영웅’을 용감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한 조각상으로 나타내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로댕이 완성한 작품은 칼레 시민들의 기대와 달랐다. 도시의 함락을 앞두고 목숨을 내놓으러 나선 6명의 인물은 공포와 고뇌에 가득차 있었다. 영웅이 아니라, 머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숙인 채 고독과 공포에 처해 고뇌하는 사람들이었다. 로댕은 6명의 인물들을 제각각 흩어지게 배열하면서도 전체적인 통일성 속에 인물마다 고유한 표정과 움직임이 살아 있게 만들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연합


출처: [한겨레신문 2007-06-19 오후 07:30:30]

2007년 6월 19일 화요일

출연연 연구원 ‘진짜’ 퇴출된다

‘절대평가’로 연구평가의 형평성 맞춰야

최근 서울시와 울산시, 그리고 행정자치부가 무능하고 불성실한 공무원 퇴출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에서도 연구원 퇴출을 둘러싼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실제로 대전의 한 출연연에 근무해 온 A연구원은 6월말까지만 출근한다.

그는 ‘삼진아웃제’에 의해 퇴출되는 것이다. 삼진아웃제란 △연구비 수주실적 △특허∙논문 출원 △기술이전 수입 등을 근거로 한 개인역량 평가에서 3년 연속 하위 평점을 받은 연구원은 기관과 고용계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해당 기관을 떠나는 제도다. A연구원은 지난 3년간 하위 평점을 받은 것에 대해 사유서를 준비해 재심을 청구했지만 연구원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용지물’이던 출연연 퇴출제

(▲ 최근 바이오 분야에서 근무하던 출연연의 한 연구원이 ‘삼진아웃제’에 의해 기관을 떠날 예정이다. ⓒ동아사이언스)

출연연의 연구원 퇴출제는 갑자기 생겨난 제도가 아니다. 대부분의 출연연은 퇴출에 대한 자체 규정이 있으나 이를 제대로 실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가령 2년 연속 최하위 점수를 받은 연구원은 적성과 전공을 최대한 고려해 다른 연구팀으로 옮기거나 뒤쳐진 기술을 만회하도록 해외연수를 가기도 한다. 심지어 모 출연연의 관계자는 “3년 연속 하위 5%에 들더라도 한 차례 기회를 더 준다”고 밝혔다. 이처럼 실적이 부진해도 연구소를 떠나는 이가 드물어 삼진아웃제는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하지만 최근 출연연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한국화학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4~5년 전부터 연구성과가 아닌 연구비 수주실적으로 평가가 강화되면서 훌륭한 연구를 해놓고도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고 말했다. IMF 사태 이후 비정규직 연구원이 많아지고 연봉제가 도입되면서 연구원에 대한 평가가 강화된 때문이다. 또한 연구비 취득이 개인평가 부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해 우수한 논문을 발표하거나 특허를 출원해도 해당 연구비의 금액이 적으면 낮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1996년 연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연구과제중심제도’(PBS, Project Based System) 시행이 이런 문제를 불러왔다고 지적하는 연구원도 있다. 10년 넘게 근무한 출연연의 한 책임연구원은 “연구과제 수주에 매달리다보니 ‘보따리 장사’라 불린다”며 “인건비의 40%까지만 정부가 대주고 나머지는 연구원이 직접 수주 받은 연구과제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기관에서도 연구비 확보를 평가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PBS보다는 ‘상대평가’가 문제라는 목소리가 더 크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과거 절대평가를 할 때는 퇴출 연구원에 대한 평가결과에 다른 연구원들도 공감하는 분위기였다”며 “현재 연구원을 S∙A∙B∙C∙D등급별 강제 배분하는 상대평가는 오히려 연구원들의 반감을 사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팀의 속한 연구원의 실적이 모두 높을 경우에도 일정 비율은 낮은 등급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다.

“밥벌이 얼마나 했나”가 평가기준?

조성재 출연연연구발전협의회 회장은 “연구원이 생산해야할 본질적 가치는 ‘연구성과’”라며 “연구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인 ‘돈’으로 평가되는 현실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다시 말해 연구에 집중해야 할 연구원에게 “네 밥벌이 얼마나 했냐”고 따진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란 얘기다.

(▲ 대덕의 밤은 깊지만 출연연에 근무하는 연구원들의 열정은 환하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조 회장은 “5~10년 전에는 우수한 평가를 받던 연구원의 연구분야가 사회적 필요성이 떨어진다면 최근 3년간 연구과제를 수주하지 못할 수도 있다”며 “이런 논리라면 지금 잘 나가는 연구원도 언제든 퇴출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공공기술연구회 산하의 한 연구원은 “연구과제의 액수가 작고 학문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적은 기초과학을 탐구하는 전공자는 살아남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물론 적은 연구비로 과제를 수행해 ‘사이언스’나 ‘네이처’, ‘셀’ 같은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기존에 알려진 생약의 효과를 재검증하거나 양약에서 인정하지 않는 사상의학의 과학화를 추구하는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선 다른 분야의 평가잣대로 다룰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 또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기술개발 속도가 빠른 IT분야에선 45세가 넘으면 자기발전에 한계를 느낀다”며 “연구 분야별 특성을 반영해 평가하거나 적성과 능력에 맞춰 일할 수 있는 연구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출연연의 연구원들은 내부경쟁을 해야 조직이 발전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자신의 미래도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즉 현재의 ‘퇴출제’에 적극 찬성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출연연의 한 연구원은 “변호사는 자식에게 자신의 직업을 권할 수 있어도 과학자는 그럴 수 없다”며 “과학자가 연구에 전념한 만큼 보상받는 시스템이 갖춰질 때 적당히 연구하는 문화도 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출처: 서금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2007-06-19 오후 5:21:48

‘음악’에 푹 빠진 과학자

“우리 연구실은 ‘음악을 좋아한다’ ‘악기연주를 잘한다’고 받아주지 않습니다. 수학이나 물리를 잘해야지. 하지만 입학하면 제가 말을 바꾸죠. 명색이 소리를 연구하는데 악기 하나씩은 연주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연구실의 모든 학생들에게 악기를 배우도록 하고 연말마다 연주회를 여는 과학자가 있다. 바로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성굉모(60) 교수다. 그를 찾아 뉴미디어연구실의 지하계단을 내려가자 어둠 속에서 은은한 색소폰 소리가 흘러나왔다. 흔히 볼 수 있는 공대 분위기와는 색다른 풍경이다.

‘모범생’이어서 이루지 못한 꿈

(ⓒ동아사이언스)

성 교수의 전공은 공기를 통해 전파되는 진동이 인간의 귀에 소리로 들리는 과정을 연구하는 ‘음향학’이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독일 아헨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83년 귀국해 전자공학과(현 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또 음대 겸임교수직을 맡아 악기의 물리적 구조와 소리가 나는 원리 같은 음악음향학을 20년 넘게 강의하고 있다. 이렇듯 음악을 좋아하는 그가 음대에 가지 않고 공대에 간 이유는 뭘까.

“중학시절 안익태 선생처럼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는 꿈을 가졌죠. 하지만 모범생(?)이어서 꿈을 이룰 수 없었어요.” 음악이론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던 열네 살 소년에게 음악 선생은 작곡공부를 권유했다. 하지만 생활고에 허덕이던 1960년대 부모와 교장 선생은 결사반대를 하고 나섰다. 전교 1, 2등을 하는 학생에게 과학자가 훨씬 낫다는 이유에서다. 성 교수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던 모범생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 교수는 “역사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다”며 “음향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 것을 행복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1971년 독일 아헨공대에 유학을 간 그는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세부전공으로 음향학을 선택했다. 성 교수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좋았고 감성의 영역인 소리를 물리적인 공학으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지도교수는 바이올린 연주에 수준급이어서 다른 음대 교수들과 현악4중주를 연주할 정도였다.

독일에서 지도교수와 바이올린의 음질 개선을 연구한 그는 귀국한 뒤에도 악기와 관련된 연구를 꾸준히 수행해 왔다. 특히 성 교수는 “우리나라 향가를 경성제국대 일본인 교수가 처음 해독했다는 사실은 치욕”이라며 “국악 연구를 우리가 안하면 누가 하느냐”고 반문했다. 이 때문에 성 교수는 국립국악원과 함께 국악기의 계량이나 국악기가 내는 소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음의 높낮이에 대한 표준음을 설정하기도 했다.

‘위스키’ 마시며 관람하는 연주회

(▲ 성 교수는 음악에 대한 열정이 충만한 사람들과 함께 ‘젤로소 윈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다. ⓒ동아사이언스)

“성인이 된 뒤 악기를 배우려는 사람에겐 기타나 아코디언, 색소폰을 다룰 것을 권합니다. 쉽게 배울 수 있고 어떤 장르든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죠.” 현재 성 교수가 매일같이 연습하는 악기는 색소폰이다. 색소폰은 교회나 성당에선 종교음악을 연주할 수 있고 캄캄한 무대에선 찐득한 음악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표현력이 뛰어나다고 그는 귀띔했다.

성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색소폰만 모두 6개. 소프라노 색소폰, 알토 색소폰, 테너 색소폰처럼 다양한 악기를 갖고 있다. 그의 집에는 트럼펫과 튜바, 클라리넷 등 20여개가 넘는 악기가 더 있다고 한다. 이를 반영하듯 성 교수는 프로와 수준급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모인 ‘젤로소 윈드 오케스트라’의 단장까지 맡고 있다. 그리스어로 ‘젤로스’(zelos)는 열정이란 뜻이다. 이름대로 음악에 대한 열정이 충만한 사람들이다.

“학생들이 소리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연주자가 무대에 오를 때 느끼는 가슴 떨림도 맛봐야 합니다.” 보통 음향학을 연구하는 다른 나라의 연구실은 조촐한 연주회를 갖지만 성 교수의 연구실은 제자의 가족들을 초청해 성대한 연주회를 연다. 한 해는 학교 대강당을 빌려 콘서트를 열고 또 한 해는 학교 후문에 위치한 재즈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색다른 콘서트를 갖는다.

성 교수는 “우리나라는 개인적인 취향이 있어야만 과학자가 예술을 이해할 수 있다”며 “외국에선 음악이 생활의 일부니까 어린이들도 ‘나도 클라리넷이나 트럼펫 들고 취악대에 들어가야지’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문화선진국인 유럽 각국은 마을마다 ‘윈드앙상블’(Wind Ensemble, 입으로 불어서 소리 내는 악기로 이뤄진 연주단)이 있다. 나아가 성 교수는 “유럽에서 음악이 생활인 것처럼 일반인에게 과학을 친숙하게 하려면 문과, 이과, 예체능의 구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처: 서금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뉴스등록시간 : 2007-06-19 오후 3:1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