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씨 학위조작 사건의 파문이 함축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다. 그것은 개인의 거짓말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어떤지를 확인하는 데 외적 ‘형식’이면 충분하다고 간주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전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왜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게 되었을까?
다소 과장된 해석일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진리의 기준을 우리 스스로 안에서 찾지 못하고 밖에서, 그것도 ‘대국’에서 찾아온 데 큰 문화적 원인이 있다. 실제로 유학, 불학, 도가 사상 같은 한국의 전통사상이라는 것은 다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던가. 한국 최대의 사상가라고 하는 퇴계의 철학이 중국 성리학과 얼마나 다르던가. ‘작은 중국’(小中華)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오기도 하지 않았던가. 한결같이 중국에서 배워오면서 그렇게 천년을 지내오지 않았던가.
근대에 들어 선진적인 것의 기준을 일본적인 데에서 찾기도 하다가, 이제는 미국을 위시한 구미 국가를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국가적인 일에 미국 눈치를 보지 않은 적이 있던가. 미국에 가까울수록 앞서가는 것이고 그만큼 객관적인 삶의 기준이 되는 분위기가 여전하지 않던가. ‘썩 그럴듯하다’, ‘멋지다’를 의미하는 ‘근사’하다는 말이 사실상 서양적인 것, 외국 것에 ‘가깝고(近) 비슷하다(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이런 우리네 정서를 잘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역사상 우리 안에 제대로 된 것이 있다고 자긍심을 가져본 적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동안 중국을 베껴온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면, 오늘날 그 무게중심은 미국을 위시한 서양적인 데로 옮겨가고 말았다. 미국의 삼류급 선교사들이 전해준 삼류 기독교를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실상이기도 하니 말이다. 어떤 목사가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사실만으로 교회 성장의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로마보다 더 로마적이라는 비아냥을 가끔 듣기도 하는 한국 가톨릭이나, 중국에는 이미 없어진 공자제사(석전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한국 유교의 상황도 사상이나 문명을 주체적으로 소화하기보다는 큰 것을 베끼며 섬기고(事大), 그대로 모방해온 우리의 현주소를 잘 말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사대주의’의 전형 아니던가. 얼마나 주체적인가, 얼마나 무르익었는가, 얼마나 지행합일적인가 등이 기준이 아니라, 대국에 있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내가 얼마나 대국과 가까운 사람인가가 사실상 권위를 결정하는 역할을 해왔으니, 신정아씨의 예일대 학위 조작 사건은 사실상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상은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사례들이다. 형식에 맞으면 내용이 좀 부실해도 그 형식만으로 충분히 화제가 된다. 화제의 중심에 서기위해서라도 내가 중국을, 일본을, 구미를 좀 아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형식을 갖추는 일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는 첩경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학문하는 이들의 독서 습관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어떤 책을 읽을 때, 과연 그 책이 읽을 가치가 있는지를 아는 제일 솔직한 방법은 당연히 그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읽기도 전에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는 간편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책의 날개에 써있는 저자의 이력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때 학술서의 경우라면 저자가 어디서 공부했느냐, 학위 취득 대학이나 국가가 어디냐 살펴보되, 특히 미국에서 공부했으면 일단 읽을 가치가 있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 책에는 미국 학계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그걸 읽은 것만으로도 내가 미국과 가까운 존재가 되며, 그만큼 남들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거리도 더 생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몇 마디 영어를 섞어가며 태생적인 영어 콤플렉스를 지닌 한국인의 정서를 슬쩍 건드리는 순간 그것만으로도 그이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능력자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얼마나 큰 나라와 가까운 존재인지로 사회적 신분을 결정해온 우리의 오랜 문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신정아씨가 굳이 예일대 학위증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것이 신정아씨 혼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라면 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그이가 학위를 위조하도고 당당해하는 것은 자기 주변에 그런 사람이 또 있거나 적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형식이 내용과 동일시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면 충분한 사회, 분명히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저급 문화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때 이런 글을 쓰는 나는 이러한 삼류문화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음에는 나는 왜 박사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써보련다.
-- 덧붙히는 글
이 기사를 쓴 이찬수 교수는 7년 동안 재직한 강남대에서 부당하게 해직되고 현재는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출처: 오마이뉴스 인권실천시민연대(cshr) 기자 2007-07-27 06:41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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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3일 월요일
탈레반 피랍사건, 교회는 왜 비하되는가?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위험수위’입니다. 인정많은 한국인들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에 냉혹한 반응을 보인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구출은 해와야겠지만, 구출 비용은 세금을 쓰지 말고 그들에게 받아내야 한다”거나, “자기들 소원대로 죽게 됐는데(순교), 내버려둬라”는 반응, “이슬람 사회에 기독교 선교하러 간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는 반응 등, 기독교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네요.
피랍된 이들이 교회 차원에서 무모하게 봉사활동을 위해 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탈레반’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피랍된 당사자와 교회를 비난하고 있는겁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일상에 만연한 일부 ‘교회’들의 폭력적인 선교 방식과 횡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에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 본질적으로 살펴본다면 개신교 신자와 비신자의 간극이 더 이상 멀어질 수 없을만큼 멀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개신교 관계자나 신자들이 모두가 폭력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 이들의 좀 더 건강하고 상식적인 신앙생활이 더 부각돼, 간극이 좁혀지길 바라는 마음이 듭니다.
개신교, 왜 그들은 ‘개독교’라는 표현의 대명사가 됐으며, 이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더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걸까요?
교회도 ‘먹고 살아야’ 하다 보니
혹시 집에 계신 분이라면 창문을 한번 열어보시길 바랍니다. 고층아파트 사시는 분이라면, 좀 귀찮더라도 더더욱 권해봅니다. 자, 뭔가가 ‘많이’ 보일겁니다. 뭘까요? 예, 교회의 십자가일겁니다.
골목마다 하나씩 있는게 교회입니다. 비교적 큰 교회도 많지만, 영세한 교회도 많습니다. 자, 대한민국에 이렇게 많은게 교회입니다.
이게 본질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들으면 화날지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만, ‘종교’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이 숱한 교회들 틈에서 더 많은 신자들을 모아 헌금을 받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거리로 나갈 수 밖에 없겠죠? 이때부터는 경쟁입니다. 더 많은 전단지를 뿌려야 하고, 대중교통수단에서도 남이 듣던말던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알려야 하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알려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적·종교적 책임에 앞서 출석교인을 늘리는 일이 우선이 돼버렸습니다.
그 많고 많은 교회 중에서 1/10만 이런 일에 나서도, 우리가 자주 겪는 ‘폭력적인 선교방식’은 일상이 될 수 밖에 없는겁니다.
하지만, 종교란 ‘강요’하고 ‘세뇌’한다고 해서 선택되는게 아니죠? 가끔, 그렇게 ‘세뇌’돼 집문서까지 갖다바치는 분들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관이 있고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걸 안다면, 이런 짓 자제해야 됩니다.
교회가 잊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의 다원성
기독교는 원래 선민의식이 강한 종교입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의 유대는 로마제국 치하에 있었습니다. 본래부터 선민의식이 강하고 종교적으로는 다소 독선적이던 유대인들과, 종교적으로 다원성을 추구했던 로마제국과의 충돌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런 정세에서 활동했던 분이 예수였고, 실제로 내부논쟁 속에서 수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외부의 압력에 대처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히 ‘감정적인 프리미엄’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절대자가 된 것이고, 예수 역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 ‘감정적인 프리미엄’에는, ‘선택받은 자’라는 자부심이 반영돼 있습니다. 그게 후대에 와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변질된 거죠. 앞서 이야기한, 대중교통수단 내의 ‘선교’도 ‘어린 양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사명’으로 받아들인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회의 존재 목적 중 하나도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과 성장”입니다. 그 ‘나라’를 세우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머릿수’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린답시고 하는 짓이 결국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돼버린 겁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의지가 있는 분들끼리 알아서 믿으시면 됩니다. 괜히 남 눈살 찌푸리게 할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불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까지 보냅니다.
가톨릭을 대표하는 김수환 추기경과 조계종 총무원장이 손을 맞잡고 음악공연을 관람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연출합니다. 그런걸 보면, 개신교의 일부 폭력적인 선교방식이 더 부각될 수 밖에 없는겁니다. 개신교, 이제 좀 더 ‘아름답게’ 처신해야 합니다.
일부 ‘정치목사’들의 준동
사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태생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물과 기름같은 사이일 수도 있습니다.
원래,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북한에서 흥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그러면서 ‘탄압’당해 월남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되는데에도 교회 세력의 지원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 ‘한기총’이라는 개신교 극우파의 탄생과 성장은 그런 정서로부터 비롯되는겁니다. 누가 욕하든 말든, 이분들은 성조기 흔들면서 열렬한 반공을 표합니다. ‘한기총’은 이 정서를 활용해 성장한 것이고, 정치에도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이 ‘정치목사’들은 대형교회들의 담임목사들이 많고, 부패를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형교회이기에 주목받을 수 없었고,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의 고발도 ‘이미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거기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까지 같이 생각해볼까요? 비신자가 바라보는 개신교의 이미지는 ‘부패집단’일 수 밖에 없는겁니다.
교회, 이제 그만 ‘자체정화’해야
앞서 이야기했듯이 결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체정화’하는겁니다. 남들이 해결해 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보고 결정하세요. 과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양심적으로 믿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싸우세요. 전체의 이미지를 먹칠하는 저 일상의 폭력과 싸워야만 합니다.
개신교도 원래는, 가톨릭의 ‘면죄부 남발’ 등의 부패에 반발한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했던 종파잖습니까? 태생 자체가 ‘부패와의 싸움’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있어 ‘부패와 폭력’과의 싸움은 숙명인 것입니다.
그 숙명을 알고, 자신의 양심을 믿어 싸운다면, 외부의 비신자들도 당신들에게 환호를 보내며 명분을 보내줄 겁니다. 어차피, 하나님이라는 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분이잖습니까?
그런 분을 믿으신다면, 비록 비신자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분’을 생각하며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당신들의 양심 속 하나님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저 일상의 폭력에 묻어가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양심의 힘을 믿으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선택은 무엇일까요?
출처: 박형준 님 블로그 [원문]
“구출은 해와야겠지만, 구출 비용은 세금을 쓰지 말고 그들에게 받아내야 한다”거나, “자기들 소원대로 죽게 됐는데(순교), 내버려둬라”는 반응, “이슬람 사회에 기독교 선교하러 간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는 반응 등, 기독교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네요.
피랍된 이들이 교회 차원에서 무모하게 봉사활동을 위해 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탈레반’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피랍된 당사자와 교회를 비난하고 있는겁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일상에 만연한 일부 ‘교회’들의 폭력적인 선교 방식과 횡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에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 본질적으로 살펴본다면 개신교 신자와 비신자의 간극이 더 이상 멀어질 수 없을만큼 멀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개신교 관계자나 신자들이 모두가 폭력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 이들의 좀 더 건강하고 상식적인 신앙생활이 더 부각돼, 간극이 좁혀지길 바라는 마음이 듭니다.
개신교, 왜 그들은 ‘개독교’라는 표현의 대명사가 됐으며, 이런 일이 일어났음에도 더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걸까요?
교회도 ‘먹고 살아야’ 하다 보니
혹시 집에 계신 분이라면 창문을 한번 열어보시길 바랍니다. 고층아파트 사시는 분이라면, 좀 귀찮더라도 더더욱 권해봅니다. 자, 뭔가가 ‘많이’ 보일겁니다. 뭘까요? 예, 교회의 십자가일겁니다.
골목마다 하나씩 있는게 교회입니다. 비교적 큰 교회도 많지만, 영세한 교회도 많습니다. 자, 대한민국에 이렇게 많은게 교회입니다.
이게 본질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이 들으면 화날지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만, ‘종교’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이 숱한 교회들 틈에서 더 많은 신자들을 모아 헌금을 받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거리로 나갈 수 밖에 없겠죠? 이때부터는 경쟁입니다. 더 많은 전단지를 뿌려야 하고, 대중교통수단에서도 남이 듣던말던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알려야 하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알려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적·종교적 책임에 앞서 출석교인을 늘리는 일이 우선이 돼버렸습니다.
그 많고 많은 교회 중에서 1/10만 이런 일에 나서도, 우리가 자주 겪는 ‘폭력적인 선교방식’은 일상이 될 수 밖에 없는겁니다.
하지만, 종교란 ‘강요’하고 ‘세뇌’한다고 해서 선택되는게 아니죠? 가끔, 그렇게 ‘세뇌’돼 집문서까지 갖다바치는 분들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관이 있고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걸 안다면, 이런 짓 자제해야 됩니다.
교회가 잊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의 다원성
기독교는 원래 선민의식이 강한 종교입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의 유대는 로마제국 치하에 있었습니다. 본래부터 선민의식이 강하고 종교적으로는 다소 독선적이던 유대인들과, 종교적으로 다원성을 추구했던 로마제국과의 충돌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런 정세에서 활동했던 분이 예수였고, 실제로 내부논쟁 속에서 수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외부의 압력에 대처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히 ‘감정적인 프리미엄’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절대자가 된 것이고, 예수 역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 ‘감정적인 프리미엄’에는, ‘선택받은 자’라는 자부심이 반영돼 있습니다. 그게 후대에 와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변질된 거죠. 앞서 이야기한, 대중교통수단 내의 ‘선교’도 ‘어린 양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사명’으로 받아들인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회의 존재 목적 중 하나도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과 성장”입니다. 그 ‘나라’를 세우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머릿수’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린답시고 하는 짓이 결국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돼버린 겁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의지가 있는 분들끼리 알아서 믿으시면 됩니다. 괜히 남 눈살 찌푸리게 할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불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까지 보냅니다.
가톨릭을 대표하는 김수환 추기경과 조계종 총무원장이 손을 맞잡고 음악공연을 관람하는 아름다운 모습도 연출합니다. 그런걸 보면, 개신교의 일부 폭력적인 선교방식이 더 부각될 수 밖에 없는겁니다. 개신교, 이제 좀 더 ‘아름답게’ 처신해야 합니다.
일부 ‘정치목사’들의 준동
사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태생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물과 기름같은 사이일 수도 있습니다.
원래,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북한에서 흥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그러면서 ‘탄압’당해 월남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되는데에도 교회 세력의 지원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 ‘한기총’이라는 개신교 극우파의 탄생과 성장은 그런 정서로부터 비롯되는겁니다. 누가 욕하든 말든, 이분들은 성조기 흔들면서 열렬한 반공을 표합니다. ‘한기총’은 이 정서를 활용해 성장한 것이고, 정치에도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이 ‘정치목사’들은 대형교회들의 담임목사들이 많고, 부패를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형교회이기에 주목받을 수 없었고,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의 고발도 ‘이미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거기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까지 같이 생각해볼까요? 비신자가 바라보는 개신교의 이미지는 ‘부패집단’일 수 밖에 없는겁니다.
교회, 이제 그만 ‘자체정화’해야
앞서 이야기했듯이 결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체정화’하는겁니다. 남들이 해결해 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보고 결정하세요. 과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양심적으로 믿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싸우세요. 전체의 이미지를 먹칠하는 저 일상의 폭력과 싸워야만 합니다.
개신교도 원래는, 가톨릭의 ‘면죄부 남발’ 등의 부패에 반발한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했던 종파잖습니까? 태생 자체가 ‘부패와의 싸움’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있어 ‘부패와 폭력’과의 싸움은 숙명인 것입니다.
그 숙명을 알고, 자신의 양심을 믿어 싸운다면, 외부의 비신자들도 당신들에게 환호를 보내며 명분을 보내줄 겁니다. 어차피, 하나님이라는 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분이잖습니까?
그런 분을 믿으신다면, 비록 비신자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분’을 생각하며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당신들의 양심 속 하나님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저 일상의 폭력에 묻어가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양심의 힘을 믿으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선택은 무엇일까요?
출처: 박형준 님 블로그 [원문]
2007년 6월 30일 토요일
국가경쟁력과 대학입시
요즘 대학입시제도에 대해서 말이 많다. 대학들이 좋은 학생들을 유치한다는 명목 하에 학교 간에 차이가 있는 내신의 비율을 낮추겠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고교평준화 제도도 폐지하고 고등학교 간의 학력차를 인정하자고 한다.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그네들이 좋아하는 경쟁력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소위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학교육이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교육이 잘 이루어져 봤자 국제 학력 경연 대회에서 좋은 성적 받는 것 정도일까? 대학 간에 대학의 구성원들(교수, 학생)끼리의 경쟁을 통해 열심히 노력해야 더 좋은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각 개인들도 나태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학의 간판이 곧 능력의 척도가 된 상황에서는 어떻게 될까. 우선 주변을 보면 확실히 소위 명문대 출신들은 능력이 뛰어나다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은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기업에서 명문대를 선호하는 이유도 짐작이 간다 (학연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이렇게 출신 대학이 능력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이유는, 잘 갖춰져 있는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에 대한 줄세우기 제도 때문이 아닐까. 대학들은 좋은 학생들의 유치를 통한 명문대로서의 위치 유지를, 학생들은 학교 간판을 통해 사회에서 유리한 출발 보장을 원한다. 대학이나 학생들의 이러한 욕심은 당연한 거고 큰 문제는 없다 생각한다. 그런데 앞서 말한대로 잘 되어 있는 줄세우기 제도, 문화 때문에, 학생들은 앞줄에 서고 싶어하고 대학들은 앞줄에서부터 뽑아가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출신대학 = 능력)이라는 공식이 생기게 된다.
우리 내부끼리가 아닌 대외 경쟁력의 제고를 위해서는 각 구성원들이 나태, 안주하지 않고 노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경쟁이 필수이다 (이렇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경쟁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말한대로 여기에서는 경쟁력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 하지만 이렇게 (출신대학 = 능력)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면 당연히 경쟁이나 노력이 줄어들게 된다. 상위권 대학은 보장되어 있으니, 하위권 대학들은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니 당연히 노력을 하지 않게되고,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 대외 경쟁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바람직한 것은 대학 간판을 통해 보장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각 대학이나 그 구성원들은 열심히 뛸 수 밖에 없고, 그를 통해 대외 경쟁력은 자연스레 높아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 눈에 보이는 공통된 기준을 없애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도농간이나 지역간의 학력차이가 존재하지 않고, 또 국가적으로 공통적인 시험이 없다면 학생들이나 대학은 내신이라는 기준 밖에 없을 것이다. 각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좋은 순위를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대학들은 좋은 학생들을 뽑기 위해 내신은 물론 다른 능력도 알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고안할 것이다 (면접이나 본고사 등). 더 중요한 것은 대학간의 서열이 애매하다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다음 경쟁을 위해, 대학은 대학대로 학생들을 기업 등에서 원하는 인재로 만들기 위해, 대학생들은 대학생대로 예전처럼 대학이라는 간판이 없으니 능력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연속적인 경쟁으로 계속 노력을 해야하니, 전 국가적으로 보면 대외경쟁력이 쑥쑥 높아질 것이다.
좀 무리한 가정을 통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요지는 국가의 대외경쟁력을 위해서는, 밖에서는 통하지도 않고 국내에서만 통하는, 대학이나 고등학생들의 줄세우기를 없애서 그들 간에 계속적인 경쟁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점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 교육의 연속성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고등학교 교육의 중요성과, 대학 간 순위가 애매할 경우 국가가 보유하고 교육역량을 어느 한 곳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교육의 연속성을 생각해도 고등학교 교육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고 (내 경험으로는 대학교 가서 열심히 하면 된다. 지금 필요 이상으로 고등학교 공부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앞에 말한 인생의 상당 부분을 결정하게 되는 대학교에 들어갈 때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본적인 인성이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양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교육역량의 집중은 예전 박통 때처럼 국가적으로 인적, 물적 역량이 부족할 때나 통할 이야기이고(그때는 오히려 대학 서열을 통해 소수 대학에 집중하는 것이 경쟁력 측면에서 나았을 것이다), 고급 인력이 넘쳐나는 요즘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생각한다.
이렇게 대외경쟁력을 기준으로 생각해도 요즘 대학들이나 기득권들이 대입제도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들은 타당성이 없으며, 결국 기득권을 가진 집단(소위 명문대들, 그리고 좋은 교육환경을 자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소리일 뿐이라 생각된다.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그네들이 좋아하는 경쟁력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소위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학교육이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교육이 잘 이루어져 봤자 국제 학력 경연 대회에서 좋은 성적 받는 것 정도일까? 대학 간에 대학의 구성원들(교수, 학생)끼리의 경쟁을 통해 열심히 노력해야 더 좋은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각 개인들도 나태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학의 간판이 곧 능력의 척도가 된 상황에서는 어떻게 될까. 우선 주변을 보면 확실히 소위 명문대 출신들은 능력이 뛰어나다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은 능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기업에서 명문대를 선호하는 이유도 짐작이 간다 (학연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이렇게 출신 대학이 능력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이유는, 잘 갖춰져 있는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에 대한 줄세우기 제도 때문이 아닐까. 대학들은 좋은 학생들의 유치를 통한 명문대로서의 위치 유지를, 학생들은 학교 간판을 통해 사회에서 유리한 출발 보장을 원한다. 대학이나 학생들의 이러한 욕심은 당연한 거고 큰 문제는 없다 생각한다. 그런데 앞서 말한대로 잘 되어 있는 줄세우기 제도, 문화 때문에, 학생들은 앞줄에 서고 싶어하고 대학들은 앞줄에서부터 뽑아가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출신대학 = 능력)이라는 공식이 생기게 된다.
우리 내부끼리가 아닌 대외 경쟁력의 제고를 위해서는 각 구성원들이 나태, 안주하지 않고 노력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경쟁이 필수이다 (이렇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경쟁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말한대로 여기에서는 경쟁력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자). 하지만 이렇게 (출신대학 = 능력)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면 당연히 경쟁이나 노력이 줄어들게 된다. 상위권 대학은 보장되어 있으니, 하위권 대학들은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니 당연히 노력을 하지 않게되고,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 대외 경쟁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바람직한 것은 대학 간판을 통해 보장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각 대학이나 그 구성원들은 열심히 뛸 수 밖에 없고, 그를 통해 대외 경쟁력은 자연스레 높아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 눈에 보이는 공통된 기준을 없애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도농간이나 지역간의 학력차이가 존재하지 않고, 또 국가적으로 공통적인 시험이 없다면 학생들이나 대학은 내신이라는 기준 밖에 없을 것이다. 각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좋은 순위를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고, 대학들은 좋은 학생들을 뽑기 위해 내신은 물론 다른 능력도 알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고안할 것이다 (면접이나 본고사 등). 더 중요한 것은 대학간의 서열이 애매하다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다음 경쟁을 위해, 대학은 대학대로 학생들을 기업 등에서 원하는 인재로 만들기 위해, 대학생들은 대학생대로 예전처럼 대학이라는 간판이 없으니 능력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연속적인 경쟁으로 계속 노력을 해야하니, 전 국가적으로 보면 대외경쟁력이 쑥쑥 높아질 것이다.
좀 무리한 가정을 통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요지는 국가의 대외경쟁력을 위해서는, 밖에서는 통하지도 않고 국내에서만 통하는, 대학이나 고등학생들의 줄세우기를 없애서 그들 간에 계속적인 경쟁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점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고등학교 교육과 대학 교육의 연속성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고등학교 교육의 중요성과, 대학 간 순위가 애매할 경우 국가가 보유하고 교육역량을 어느 한 곳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교육의 연속성을 생각해도 고등학교 교육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고 (내 경험으로는 대학교 가서 열심히 하면 된다. 지금 필요 이상으로 고등학교 공부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앞에 말한 인생의 상당 부분을 결정하게 되는 대학교에 들어갈 때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본적인 인성이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양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교육역량의 집중은 예전 박통 때처럼 국가적으로 인적, 물적 역량이 부족할 때나 통할 이야기이고(그때는 오히려 대학 서열을 통해 소수 대학에 집중하는 것이 경쟁력 측면에서 나았을 것이다), 고급 인력이 넘쳐나는 요즘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생각한다.
이렇게 대외경쟁력을 기준으로 생각해도 요즘 대학들이나 기득권들이 대입제도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들은 타당성이 없으며, 결국 기득권을 가진 집단(소위 명문대들, 그리고 좋은 교육환경을 자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소리일 뿐이라 생각된다.
2007년 6월 26일 화요일
한국 정치 ‘아부의 정석 10’
적 만들고 명분은 그럴듯하게…
아부에 면역되면 자기교정 능력 없어져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따져보자고 한다. 좋은 일이지만 더 시급한 게 있다.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어떻게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가? 이게 가장 중요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 김영삼·김대중 정권의 말기가 비참했던 것도 바로 이런 문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그런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
한나라당의 내분이 실감나게 보여준 건 ‘줄서기’와 ‘줄세우기’였다. 한나라당 집권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지도자의 오류를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이는 한나라당만의 문제도 아니고 역대 정권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 정치의 문제다. 대통령제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더욱 근원적인 것이다.
‘당파성’에 대한 엄청난 착각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 동시에 그 힘을 숭배하는 이중성을 잠시 접고, 정치를 정직하게 바라보자. 아니 우리 자신부터 보자. 우리는 공정성에 대단히 취약하거나 서투른 사람들이다. ‘호감’과 ‘반감’이 공정성을 먹어버린다. 공정한 규칙은 모든 집단에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이 진술에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걸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지지하는 집단엔 관대한 반면, 내가 반대하는 집단엔 엄격하다. 이걸 ‘당파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정성이 없거나 약하니, 사회적 갈등은 합리적 해소의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늘 문자 그대로 이전투구(泥田鬪狗)로 갈 수밖에 없다. 이미 갈라진 편의 대세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조율하거나 바꾸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는 자기 편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똑같은 짓이라도 상대편이 하면 타도해야 할 반민주적 작태지만, 우리 편이 하면 개혁을 위한 불가피성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되면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지도자의 비위를 맞추려는 아부꾼만 난무하게 된다. 아무리 같은 편이라도 아부를 지적해 비판할 수 있을 정도의 긴장이 그 집단 내에 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부, 이거 의외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한국 정치의 급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시절 주변의 아부꾼들에 의해 ‘세기의 태양’ ‘구국의 태양’ ‘인류의 등대’ ‘현대의 성자’ 등으로 극찬됐다. 우리는 지금 그걸 보고 어이없어하며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진보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우리는 ‘태양’ ‘등대’ ‘성자’ 같은 언어 구사의 촌스러움에 대해 웃는 것이지, 아부 자체를 멀리할 정도로 진보하진 않았다.
미국 언론인 리처드 스텐겔은 <아부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아부의 정석’으로 “그럴듯하게 하라”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말라” “칭찬과 동시에 부탁하지 말라” “여러 사람에게 같은 칭찬을 되풀이하지 말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 등을 들었다.
다 좋은 말이지만, 아부의 기술이 미국보다 더 발달한 한국에선 한 차원 더 높게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다.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는 ‘기술’이 아니라 기본 조건이다. 인터넷 덕분에 이젠 아부가 주로 공론장에서 행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정교한 이론과 실무가 필요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아부의 정석’은 다음 10가지다.
모든 의견에 무조건 끄덕끄덕하라
첫째, 명분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라. 이건 그냥 “그럴듯하게 하라”는 말과 비슷한 것 같지만,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이다. 한국인은 명분에 약하다. 자신이 아부를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반드시 거창한 명분과 연결해야 한다.
둘째, 신선하게 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않는 걸로는 부족하다.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독창성을 발휘해야 한다. 궤변이라도 파격적인 이설(異說)을 제시하는 아부가 평범한 아부보다 훨씬 더 큰 파괴력이 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한다.
셋째,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는 한국에선 안 통한다. 아부꾼들 사이에도 경쟁이 있기 때문에 보스의 머릿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려면 무조건 동의하는 건 필수다.
넷째, 거대하고 흉악한 적을 창출하라. 보스에 대한 아부를 적에 대한 증오의 그늘에 가려지게 할 수 있는 동시에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최일선에서 그 적과 싸우는 ‘투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면 적어도 보스에 대한 아부로 인해 욕먹을 일은 없다.
다섯째, 보스를 불쌍하게 보이도록 만들어라. 아주 훌륭한 분인데 그 진면목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고 슬픈 표정을 지어라. 이건 아부 효과와 더불어 자신이 보스를 잘 아는 ‘실세’라는 효과를 내는 일석이조(一石二鳥)다.
여섯째, 당당하게 호통치면서 아부하라. 이른바 적반하장(賊反荷杖) 수법이다. 보스를 미화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말고 보스에 대한 비판도 박살내는 호전성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너무도 당당한 자세에 압도돼 그건 아부가 아니라 소신과 양심의 표현일 거라고 믿게 된다.
일곱째, 자신이 아부로 얻은 걸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사람들은 아부꾼의 당당한 자세에 압도되다가도 어느 순간 아부꾼이 아부로 큰 이익을 취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해체하기 위해 자신은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무소유’ 정신의 화신인 양 쇼를 할 필요가 있다.
여덟째, 보스를 ‘싸가지’ 없게 평가하는 쇼맨십을 발휘하라. 기질상 결코 아부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만천하에 과시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아부의 효과도 높아진다. 물론 이 수법은 그런 정도는 암묵적 이해를 해줄 수 있을 정도로 보스의 신뢰를 얻은 다음에 구사해야 한다.
아홉째, 자신도 괴롭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아무리 쇼를 잘해도 아부에 대한 비판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 비판에 과장되게 반응하면서, 왜 자신의 진정성을 이리도 몰라주는지 안타깝고 서글프다고 징징 우는 소리를 하라. 역사가 알아줄지 모르겠다는 등 헛소리를 해대는 것도 좋겠다.
열째, 자신에게도 아부하는 사람들을 키워라. 이는 아부의 힘을 증강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부에 대한 비판을 원천봉쇄하는 효과를 낳는다. 비판자들이 아부꾼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의 집단공격이 무서워 아부꾼을 비판하는 걸 삼가게 된다는 것이다. 명심하라. 아부의 순간은 쓸망정 그 열매는 달고 영원하다.
선거 뒤엔 ‘조폭 공동체 의식’
혹 이야기가 너무 심각해질까봐 잠시 좀 웃자고 과장되게 표현했지만, 이상에서 말한 ‘아부의 정석’은 한국 정치에 자기교정 능력이 없는 이유를 시사해주기엔 족하다. 전 사회 영역에 걸쳐 ‘보스 1극 권력집중 체제’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아부는 생존과 성장의 필수이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러한 아부에 면역돼 있다. 정치 분야에선 상대편 내부의 아부엔 혐오를 드러내지만, 우리 편 내부의 아부엔 열광한다.
왜 그런 정신상태가 가능한가? 무슨 선거든 선거판 현장을 수일간 체험학습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정치는 고립돼 있는 ‘섬’과 같다. 어깨띠를 두르고 시장을 돌아다녀보라. 악수를 자주 거절당하는 건 기본이고 등에 대고 욕하는 소리마저 쉽게 들을 수 있다.
유권자는 냉담하다 못해 살벌하고, 언론은 사사건건 흠만 잡아내 보도하려고 발버둥친다. 경쟁자들은 온갖 인신공격에 흑색선전까지 마다하지 않으니, 이쪽도 앉아서 당할 순 없어 같은 수법으로 맞받아쳐야 한다. 이거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선거에 출마한 적이 없다면 감히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명언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말이지 후보들은 보기에 불쌍하다. 충성할 참모진 구성하랴, 선거자금 마련하랴, 유권자들의 냉대에도 미소 지으랴, 존경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후보들은 당선된 뒤에 유권자들에게 복수한다. 자신을 위해 충성한 사람들에게 ‘낙하산’을 태워주고, 돈 댄 사람들에게 들통나지 않게 특혜를 주고, 자신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한다. 이른바 ‘조폭 공동체 의식’이다. 이 의식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아부’란 단어는 아예 없다. 조직원이 보스에게 무조건 충성과 찬양을 바치는 건 아부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본질이다.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는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고위 공직은 개인적인 ‘코리안드림’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쟁탈해야 할 이권이요, 비즈니스가 된다. 물론 이는 ‘줄서기’와 지도자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이유가 된다.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떤 고난을 겪고 희생을 했는지 알아?” 하는 마음이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오고, 이게 또 정치혐오를 낳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한국 정치는 복수혈전이다. 우리는 고위 공직자들에게 공복(公僕)이 될 걸 요구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과연 그런 요구를 할 자격이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특히 ‘바람 정치’가 문제다. 유권자들이 바람에 휩쓸리는 건 일시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도 있지만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정치 발전엔 치명적이다. 바람만 잘 타면, 바람이 부는 쪽으로 줄만 잘 서면, 길 가다 금배지를 주울 수도 있는 풍토는 유권자들이 만든 것이지 정치인들이 만든 게 아니다. 유권자들이 그렇게 해놓고선 정치인들의 줄서기를 비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그 어떤 바람에 휩쓸리더라도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을 평가해 옥석을 구분해주는 정도의 성의를 보이면 모르겠는데, 그것마저 없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평소 ‘개판’을 쳤더라도 바람과 줄만 잘 타면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공할 수도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누가 ‘줄서기’를 두려워하겠는가? 정당을 장난감처럼 여겨 깨부수고 다시 만들고 또 깨부수고 다시 만드는 작태를 삼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바람정치’의 좋은 점이라는 것도 반독재 투쟁 시절에나 의미가 있었지만, 아직도 그 습속은 계속되고 있다. 반감을 토대로 삼은 ‘역바람정치’도 ‘바람정치’의 일종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지도자 추종주의다. 지도자 추종주의가 계속되는 한,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길이 없다. 한국 정치가 ‘기대와 환멸’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다는 진단은 바로 지도자 추종주의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란 국민 뜯어먹기’라는 역발상
그럼에도 시민사회의 모든 담론은 정치인만 욕하고 유권자들의 성찰을 촉구하는 건 전무하다. 물론 유권자들이 그러는 건 역사와 구조의 그 어떤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보자면 정치인들에겐 면책 사유가 없겠는가? 정치인 못지않게 유권자들도 성찰의 주체가 되어 마땅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의 복수’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역설 같지만, 발상의 전환도 해봄직하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냉소와 혐오를 보내는 이유는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교과서적 원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 전제를 믿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연연해하는가?
반대로 정치란 원래 ‘국민 뜯어먹기’를 주업으로 삼는 고등 사기 행위라는 걸 전제로 삼아보자. 개혁을 내세운 집단들도 반개혁 세력과의 대치 국면을 조성해 ‘증오의 마케팅’ 공세로 자기들이 누리는 기득권과 특권을 계속 독식하려는 사기꾼에 불과하며, 한국엔 여야가 아니라 ‘엘리트 대 비엘리트’ 또는 ‘출세한 사람 대 출세하지 못한 사람’의 구도만 있을 뿐이라는 신념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그런 자세를 가지면 한국 정치에도 아름다운 사람과 장면이 많다는 데 주목하면서 정치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
좀더 현실적인 수준에서 대안을 모색해보자면, 정치 외풍에서 자유로운 ‘중립지대’를 늘려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각급 지도자의 인사·예산권의 상당 부분을 시민사회의 자율체제로 돌려 정치의 영향력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있겠지만, 그건 한국 시민사회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니 인내를 갖고 하나씩 고쳐나가는 게 옳다. ‘정치의 복수’를 피해보고 싶은 마음에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펴보긴 했지만, 어디까지 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출처: 한겨레21 [원본]
아부에 면역되면 자기교정 능력 없어져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따져보자고 한다. 좋은 일이지만 더 시급한 게 있다.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어떻게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가? 이게 가장 중요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 김영삼·김대중 정권의 말기가 비참했던 것도 바로 이런 문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그런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
한나라당의 내분이 실감나게 보여준 건 ‘줄서기’와 ‘줄세우기’였다. 한나라당 집권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지도자의 오류를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이는 한나라당만의 문제도 아니고 역대 정권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 정치의 문제다. 대통령제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더욱 근원적인 것이다.
△ 한국 정치가 지도자의 오류를 통제할 수 없는 근본적 원인 중 하나가 아부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무회의에 앞서 넥타이를 매지 않고 나오면, 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공무원이 따라한다.(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당파성’에 대한 엄청난 착각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 동시에 그 힘을 숭배하는 이중성을 잠시 접고, 정치를 정직하게 바라보자. 아니 우리 자신부터 보자. 우리는 공정성에 대단히 취약하거나 서투른 사람들이다. ‘호감’과 ‘반감’이 공정성을 먹어버린다. 공정한 규칙은 모든 집단에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이 진술에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걸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지지하는 집단엔 관대한 반면, 내가 반대하는 집단엔 엄격하다. 이걸 ‘당파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정성이 없거나 약하니, 사회적 갈등은 합리적 해소의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늘 문자 그대로 이전투구(泥田鬪狗)로 갈 수밖에 없다. 이미 갈라진 편의 대세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조율하거나 바꾸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는 자기 편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똑같은 짓이라도 상대편이 하면 타도해야 할 반민주적 작태지만, 우리 편이 하면 개혁을 위한 불가피성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되면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지도자의 비위를 맞추려는 아부꾼만 난무하게 된다. 아무리 같은 편이라도 아부를 지적해 비판할 수 있을 정도의 긴장이 그 집단 내에 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부, 이거 의외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한국 정치의 급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시절 주변의 아부꾼들에 의해 ‘세기의 태양’ ‘구국의 태양’ ‘인류의 등대’ ‘현대의 성자’ 등으로 극찬됐다. 우리는 지금 그걸 보고 어이없어하며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진보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우리는 ‘태양’ ‘등대’ ‘성자’ 같은 언어 구사의 촌스러움에 대해 웃는 것이지, 아부 자체를 멀리할 정도로 진보하진 않았다.
미국 언론인 리처드 스텐겔은 <아부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아부의 정석’으로 “그럴듯하게 하라”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말라” “칭찬과 동시에 부탁하지 말라” “여러 사람에게 같은 칭찬을 되풀이하지 말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 등을 들었다.
다 좋은 말이지만, 아부의 기술이 미국보다 더 발달한 한국에선 한 차원 더 높게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다.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는 ‘기술’이 아니라 기본 조건이다. 인터넷 덕분에 이젠 아부가 주로 공론장에서 행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정교한 이론과 실무가 필요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아부의 정석’은 다음 10가지다.
모든 의견에 무조건 끄덕끄덕하라
첫째, 명분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라. 이건 그냥 “그럴듯하게 하라”는 말과 비슷한 것 같지만,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이다. 한국인은 명분에 약하다. 자신이 아부를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반드시 거창한 명분과 연결해야 한다.
둘째, 신선하게 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않는 걸로는 부족하다.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독창성을 발휘해야 한다. 궤변이라도 파격적인 이설(異說)을 제시하는 아부가 평범한 아부보다 훨씬 더 큰 파괴력이 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한다.
셋째,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는 한국에선 안 통한다. 아부꾼들 사이에도 경쟁이 있기 때문에 보스의 머릿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려면 무조건 동의하는 건 필수다.
넷째, 거대하고 흉악한 적을 창출하라. 보스에 대한 아부를 적에 대한 증오의 그늘에 가려지게 할 수 있는 동시에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최일선에서 그 적과 싸우는 ‘투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면 적어도 보스에 대한 아부로 인해 욕먹을 일은 없다.
다섯째, 보스를 불쌍하게 보이도록 만들어라. 아주 훌륭한 분인데 그 진면목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고 슬픈 표정을 지어라. 이건 아부 효과와 더불어 자신이 보스를 잘 아는 ‘실세’라는 효과를 내는 일석이조(一石二鳥)다.
여섯째, 당당하게 호통치면서 아부하라. 이른바 적반하장(賊反荷杖) 수법이다. 보스를 미화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말고 보스에 대한 비판도 박살내는 호전성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너무도 당당한 자세에 압도돼 그건 아부가 아니라 소신과 양심의 표현일 거라고 믿게 된다.
일곱째, 자신이 아부로 얻은 걸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사람들은 아부꾼의 당당한 자세에 압도되다가도 어느 순간 아부꾼이 아부로 큰 이익을 취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해체하기 위해 자신은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무소유’ 정신의 화신인 양 쇼를 할 필요가 있다.
여덟째, 보스를 ‘싸가지’ 없게 평가하는 쇼맨십을 발휘하라. 기질상 결코 아부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만천하에 과시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아부의 효과도 높아진다. 물론 이 수법은 그런 정도는 암묵적 이해를 해줄 수 있을 정도로 보스의 신뢰를 얻은 다음에 구사해야 한다.
△ 유권자의 무관심은 자랑이 아니다.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온다. 정치인들이 선거철 시장에 들러 유권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아홉째, 자신도 괴롭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아무리 쇼를 잘해도 아부에 대한 비판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 비판에 과장되게 반응하면서, 왜 자신의 진정성을 이리도 몰라주는지 안타깝고 서글프다고 징징 우는 소리를 하라. 역사가 알아줄지 모르겠다는 등 헛소리를 해대는 것도 좋겠다.
열째, 자신에게도 아부하는 사람들을 키워라. 이는 아부의 힘을 증강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부에 대한 비판을 원천봉쇄하는 효과를 낳는다. 비판자들이 아부꾼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의 집단공격이 무서워 아부꾼을 비판하는 걸 삼가게 된다는 것이다. 명심하라. 아부의 순간은 쓸망정 그 열매는 달고 영원하다.
선거 뒤엔 ‘조폭 공동체 의식’
혹 이야기가 너무 심각해질까봐 잠시 좀 웃자고 과장되게 표현했지만, 이상에서 말한 ‘아부의 정석’은 한국 정치에 자기교정 능력이 없는 이유를 시사해주기엔 족하다. 전 사회 영역에 걸쳐 ‘보스 1극 권력집중 체제’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아부는 생존과 성장의 필수이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러한 아부에 면역돼 있다. 정치 분야에선 상대편 내부의 아부엔 혐오를 드러내지만, 우리 편 내부의 아부엔 열광한다.
왜 그런 정신상태가 가능한가? 무슨 선거든 선거판 현장을 수일간 체험학습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정치는 고립돼 있는 ‘섬’과 같다. 어깨띠를 두르고 시장을 돌아다녀보라. 악수를 자주 거절당하는 건 기본이고 등에 대고 욕하는 소리마저 쉽게 들을 수 있다.
유권자는 냉담하다 못해 살벌하고, 언론은 사사건건 흠만 잡아내 보도하려고 발버둥친다. 경쟁자들은 온갖 인신공격에 흑색선전까지 마다하지 않으니, 이쪽도 앉아서 당할 순 없어 같은 수법으로 맞받아쳐야 한다. 이거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선거에 출마한 적이 없다면 감히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명언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말이지 후보들은 보기에 불쌍하다. 충성할 참모진 구성하랴, 선거자금 마련하랴, 유권자들의 냉대에도 미소 지으랴, 존경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후보들은 당선된 뒤에 유권자들에게 복수한다. 자신을 위해 충성한 사람들에게 ‘낙하산’을 태워주고, 돈 댄 사람들에게 들통나지 않게 특혜를 주고, 자신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한다. 이른바 ‘조폭 공동체 의식’이다. 이 의식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아부’란 단어는 아예 없다. 조직원이 보스에게 무조건 충성과 찬양을 바치는 건 아부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본질이다.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는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고위 공직은 개인적인 ‘코리안드림’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쟁탈해야 할 이권이요, 비즈니스가 된다. 물론 이는 ‘줄서기’와 지도자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이유가 된다.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떤 고난을 겪고 희생을 했는지 알아?” 하는 마음이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오고, 이게 또 정치혐오를 낳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한국 정치는 복수혈전이다. 우리는 고위 공직자들에게 공복(公僕)이 될 걸 요구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과연 그런 요구를 할 자격이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특히 ‘바람 정치’가 문제다. 유권자들이 바람에 휩쓸리는 건 일시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도 있지만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정치 발전엔 치명적이다. 바람만 잘 타면, 바람이 부는 쪽으로 줄만 잘 서면, 길 가다 금배지를 주울 수도 있는 풍토는 유권자들이 만든 것이지 정치인들이 만든 게 아니다. 유권자들이 그렇게 해놓고선 정치인들의 줄서기를 비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그 어떤 바람에 휩쓸리더라도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을 평가해 옥석을 구분해주는 정도의 성의를 보이면 모르겠는데, 그것마저 없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평소 ‘개판’을 쳤더라도 바람과 줄만 잘 타면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공할 수도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누가 ‘줄서기’를 두려워하겠는가? 정당을 장난감처럼 여겨 깨부수고 다시 만들고 또 깨부수고 다시 만드는 작태를 삼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바람정치’의 좋은 점이라는 것도 반독재 투쟁 시절에나 의미가 있었지만, 아직도 그 습속은 계속되고 있다. 반감을 토대로 삼은 ‘역바람정치’도 ‘바람정치’의 일종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지도자 추종주의다. 지도자 추종주의가 계속되는 한,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길이 없다. 한국 정치가 ‘기대와 환멸’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다는 진단은 바로 지도자 추종주의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란 국민 뜯어먹기’라는 역발상
그럼에도 시민사회의 모든 담론은 정치인만 욕하고 유권자들의 성찰을 촉구하는 건 전무하다. 물론 유권자들이 그러는 건 역사와 구조의 그 어떤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보자면 정치인들에겐 면책 사유가 없겠는가? 정치인 못지않게 유권자들도 성찰의 주체가 되어 마땅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의 복수’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역설 같지만, 발상의 전환도 해봄직하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냉소와 혐오를 보내는 이유는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교과서적 원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 전제를 믿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연연해하는가?
반대로 정치란 원래 ‘국민 뜯어먹기’를 주업으로 삼는 고등 사기 행위라는 걸 전제로 삼아보자. 개혁을 내세운 집단들도 반개혁 세력과의 대치 국면을 조성해 ‘증오의 마케팅’ 공세로 자기들이 누리는 기득권과 특권을 계속 독식하려는 사기꾼에 불과하며, 한국엔 여야가 아니라 ‘엘리트 대 비엘리트’ 또는 ‘출세한 사람 대 출세하지 못한 사람’의 구도만 있을 뿐이라는 신념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그런 자세를 가지면 한국 정치에도 아름다운 사람과 장면이 많다는 데 주목하면서 정치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
좀더 현실적인 수준에서 대안을 모색해보자면, 정치 외풍에서 자유로운 ‘중립지대’를 늘려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각급 지도자의 인사·예산권의 상당 부분을 시민사회의 자율체제로 돌려 정치의 영향력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있겠지만, 그건 한국 시민사회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니 인내를 갖고 하나씩 고쳐나가는 게 옳다. ‘정치의 복수’를 피해보고 싶은 마음에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펴보긴 했지만, 어디까지 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출처: 한겨레21 [원본]
2007년 6월 25일 월요일
최고•최대•최초, 행복하십니까?
[한겨레] [강준만의 세상읽기]
초고층 건물에 집착하고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으로 인격을 재는 한국인…좌파 지식인들도 거대담론 증후군…
‘지속가능한 우쭐’을 위해 성찰이 필요하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 사회는 오래전부터 ‘동양 최고’ ‘동양 최대’ ‘동양 최초’ ‘세계 최고’ ‘세계 최대’ ‘세계 최초’ 등과 같은 ‘최고병’ ‘최대병’ ‘최초병’을 앓아왔다. 역사적으로 너무 당한 경험이 많아서인지 한국인들은 최고•최대•최초주의에 한이 맺혔다. 최고•최대•최초를 향해 목숨 걸고 질주한다. 황우석 사건에 대해 말이 많지만, 남 이야기인 척하진 말자. 그거 우리 이야기고 내 이야기다.
초고층건물론의 원조는 이건희 회장
최고•최대•최초주의가 한국 고유의 것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예컨대, 하늘로 치솟은 초고층 빌딩을 가리키는 마천루를 만드는 경쟁은 서양인들이 먼저 시작했다. 유럽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은 1932년 뉴욕에 102층짜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만들어놓고 유럽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거 세계 최고다. 너네 이런 것 없지?” 이에 열받은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대해 말하는 뉴욕 사람에게선 시민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자기네 시정(市政)에 대해서도 항상 그런 자부심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라고 썼다.
자부심에 집착하다 실패한 경우도 있다. 북한은 88 서울올림픽에 자극을 받아 89년 제13차 평양청년축전을 과도한 비용을 낭비해가면서 치렀는데 이때부터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기업과 합작으로 평양에 세우려다 중단한 105층짜리 유경호텔이 그런 과시 사업의 하나였다. 지금도 평양에는 공사가 중단된 105층의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최근 들어 ‘세계 최대’ ‘세계 최고’ ‘세계 최초’에 집착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두바이다. 아랍에미리트에 소속된, 인구 120만 명의 작은 토후국이다. 세계에 이름을 알릴 길이 없어 거대한 토목공사로 ‘세계 최대’ ‘세계 최고’ ‘세계 최초’의 기록을 만들어내느라 여념이 없다. 국가 홍보 전략인 셈이다.
두바이의 그런 집착은 ‘콤플렉스’가 아니라 ‘실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국은 실질을 말하기엔 제법 큰 나라가 돼버렸다. 한국은 여전히 자부심과 자존심에 집착한다. 그래서 초고층 건물을 짓자는 이야기도 계속 나오고 있다.
애국심이 강한 소설가 이문열은 여러 나라들이 저마다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초고층 건물로 국가적 자긍심을 고취하기도 하고 경제성장을 과시하기도 하는데, 서울도 지금쯤은 세계가 돌아볼 만한 초고층 건물 하나쯤 가져도 좋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초고층건물론의 원조는 삼성 회장 이건희다. 이건희는 지금의 타워팰리스 자리에 원래 102층짜리 초대형 사옥을 지으려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69층짜리 타워팰리스로 만족해야 했다. 이건희는 최고•최대•최초주의의 전도사이기도 하다. 사실 이게 바로 그가 인기를 누리는 비결이다. 그의 어록을 살펴보면 ‘최고•최대•최초’라는 단어들이 난무한다. 그와 삼성의 오빠부대 요원들도 ‘반도체 세계 1위’ ‘LCD 세계 1위’ ‘휴대폰 세계 3위’ 등과 같은 순위를 들먹이기에 바쁘다.
한국 민주주의도 과도하게 폄하?
사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다. 올림픽 시상식에서 은메달 받고서도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선수는 한국인밖에 없다. 이것 하나로 다 정리된다. 이런 현실이 시사하듯이, 한국의 최고병•최대병•최초병이 조만간 치유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간 많은 걸 이루었지만 아직도 한국인의 자부심 또는 자존감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2005년 6월 취업 포털 잡링크에 따르면 대학생을 대상으로 국적 포기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5.8%가 ‘필요하다면 국적을 포기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이화여대 학보사가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5년 9월 이대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출생 전 자신의 의지로 조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62%의 학생이 선택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왜 그럴까? 한국이 그만큼 형편없는 나라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비교 대상에 문제가 있다. 신문도 좋고 학자들의 논문도 좋다. 국가 간 비교 사례를 보라. 예외 없이 선진국과의 비교 일색이다.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나라와 비교하는 법은 없다. 비교 대상은 죽으나 사나 미국, 일본, 유럽이다. 그거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제공되는 비교 연구 자료가 그것밖에 없으니 그런 경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늘 비교만 했다 하면 선진국과 비교하는 버릇은 빨리빨리 정신에 따른 과욕일까? 한국 민주주의도 그런 비교 대상이 돼 과도하게 폄하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주장을 펴는 대표적인 학자는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강정인이다.
강정인은 ‘서구 민주화 경험에 비춰본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라는 논문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짧은 역사는 생각하지 않고 서구 중심주의적 시각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폄하하는 걸 비판하면서 “한국의 현실은 비록 급진주의자들의 눈에는 불만스러울지언정 참을성 많은 역사가의 눈에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서구 국가들은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로 성숙하는 데 적어도 200년 이상 걸렸다”면서 “지난 50년간 이룩한 한국의 민주화를 자기 비하적으로 ‘일탈’ ‘파행’ ‘왜곡’으로 보는 시각을 시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선진국과의 비교 중독증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늘 더 높은 곳을 향해 따라잡자는 전투성을 배양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국민적 자기 모멸 또는 자학을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이 큰 성과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계속 자존감 투쟁에 일로매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면 최고병•최대병•최초병은 사라질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사이즈의 문제는 남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토 크기와 인구 크기는 세계 대비 각각 0.078%에 0.73%다. 이걸 모른 척하고 넘어갈 한국인이 아니다.
큰 사이즈에 민감, 얼굴 크기만 예외
한국인의 자존감을 위한 투쟁은 꼭 밖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내부적으로 생성되기도 한다. 그 내부적 생성 요인마저 처음엔 밖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일망정 시간이 흐르면서 내면화된 질서로 자리잡게 된다는 뜻이다. 밖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내적인 권위주의를 낳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질곡에 휘둘린 사람들일수록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핵심은 삶의 모든 것이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내면적 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밖에서 몰아치는 격랑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에 늘 밖과의 비교와 관계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이게 한국 사회에 각종 ‘신드롬’을 양산하는 심리적 기반이기도 하다.
밖과의 관계에선 늘 사이즈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한국인은 사이즈에 대단히 민감한 민족이다. 꼭 크다고 성능까지 좋은 건 아닌데 왜 그렇게 큰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작은 걸 크게 늘리기 위해 별일을 다 한다. 신체의 특정 부위에서부터 아파트 평수에 이르기까지 개조하는 걸 무척 사랑한다. 그래도 얼굴 크기는 작을수록 좋다고 보는 게 기특하다.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 크기로 인격을 재거나 사람을 차별한다는 건 이젠 상식이 됐다. 특히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왜 그렇게 큰 차를 좋아하고 경소형차를 천대하는지 신기할 정도다. 한동안 티코를 조롱하는 개그가 유행했던 걸 생각해보라. 티코의 바퀴가 도로 위의 껌에 붙어 꼼짝도 안 하더라는 둥, 티코가 그랜저를 추월해 어찌된 일인가 알아봤더니 때마침 거세게 분 바람에 날아갔기 때문이라는 둥, 자기 승용차도 없는 사람들까지 주제를 모르고 그걸 개그랍시고 해대며 키득거리곤 했다.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경소형차 이용자의 82%가 차가 작다는 이유로 무시•차별당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총 쏘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다. 10년 전엔 충남 아산시 국도에서 볼보 승용차와 프레스토 승용차가 추월 경쟁을 벌이다 볼보 승용차에 탄 사람이 공기총을 쏴 프레스토 승용차를 탄 사람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왜 볼보가 프레스토를 향해 총을 쐈겠는지 각자 생각해보시라.
사정이 그와 같으니 경소형차 사용 비중이 높을 리 없다. 일본이 20%를 넘는 것에 비해 한국은 4.5%로 일본의 5분의 1 수준에 머물러 있다. 비슷한 이유로 자동차 교체주기도 엄청나게 빠르다. 미국과 일본의 자동차 교체주기와 비교해 한국은 2배 이상 빠르다.
거창한 개념에 매료되기 시작하면…
전국의 자동차 번호판이 통일되면서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자동차 번호판마저 차별의 요인이다. ‘서울 52’나 ‘서울 55’로 시작하는 서울 강남구 번호판을 달고 다니면 고급 식당이나 호텔 등에서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에, 한 해에 신규로 강남구에서 발행하는 자동차 번호판 중 강남 비거주자 비율이 절반을 웃돌았었다.
벯 것은 아름답다”는 신념은 지식계에까지 파고들었다. 이른바 ‘거대담론증’이다. 한양대 교수 임지현은 “남한 지성사의 파국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세련된 자유주의와의 공개된 논쟁 속에서 단련되지 못하고, 밀폐된 공간 속에서 ‘정통’과 ‘최대주의’의 장막 속에 안주했다는 점이다”며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은 한마디로 거대담론 지향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날카로운 지적이지만, 거대담론 지향성은 좌파 지식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거대담론이란 게 과연 무언가? 거대한 걸 이야기하는 걸 거대담론이라고 그러는가? 꼭 그렇진 않다. 실천과의 연계성이 중요하다. 예컨대, 바닥이 더러우면 우선 걸레질부터 하고 찾아온 손님을 모셔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걸레질할 생각은 않고 그 자리에서 그 집의 구조에서부터 창문과 바닥재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입으로만 떠들어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거대담론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니 ‘시대정신’이니 하는 거창한 개념에 매료되기 시작하면 모든 미시적 분석은 쓰레기통에 내던져지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크게 봐서 옳기 때문에 무조건 지지한다는 자세를 갖게 되면, 자기 성찰과 교정은 불가능해진다. 자기 성찰과 교정을 위한 시도는 크게 봐서 나쁜 편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성토의 대상이 된다. 말을 거창하게 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풍토가 조성되지 않는 한 거대담론 증후군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최고•최대•최초주의와 거대담론 증후군은 ‘우쭐’의 산물일 수 있다. ‘우쭐댄다’함은 ‘남을 의식해서 자기 자신을 꾸며서 나타내는 행동’을 말한다. 잘난 척한다, 젠체한다, 폼 잡는다, 목에 힘준다, 거들먹댄다, 으스댄다, 뻐긴다 등등이 그런 경우다. 이런 정의를 내린 심리학자 최상진은 한국인에겐 우쭐대는 기질이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금배지를 달고 다니며 외국 유학생들은 하버드나 스탠퍼드 같은 ‘알아주는 명문대학’을 실속 있는 대학보다 선호하고, 미국에 이민간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에 관계없이 벤츠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이와 유관한 현상으로 읽어볼 수 있다. 근래에 들어, 한국 사람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와 같은 발전도상국을 여행할 때, 돈을 잘 쓰며 ‘우쭐’대는 행세를 하며, 이러한 한국인의 행동에 대해 비판 기사가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는 경제 선진국인 미국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에서도 한국 사람들은 기죽지 않고 활보하면서, ‘미국 별거 없어’라고 자기들 간에 이야기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기가 살았고, 또 어떻게 보면 우쭐댄다고 볼 수 있다.”
황우석에 던진 돌을 자신에게!
물론 우쭐대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 지구상에서 일본인들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한국인들이 유일하다고 하지 않는가. 우쭐대더라도 ‘지속 가능한 우쭐’을 위해 피땀 흘려 노력하면 되는데, 불행 중 다행히도 한국인에겐 그게 있다. 그래서 한국인의 ‘우쭐’은 영원하다.
‘우쭐’은 왕성한 삶의 투쟁 의욕을 키우는 것이기도 하니,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적어도 자존감을 지키고 누리기 위한 한국인의 ‘최고•최대•최초’ 투쟁에 돌을 던지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제 밖과의 관계에서 자기 의미를 찾는 자존감이 이대로 좋은지 생각해볼 때다. 사는 게 너무 피곤하고 살벌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자존감’을 위해 황우석에게 던질 돌을 각자 자기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출처: [한겨레21 2006-02-1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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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층 건물에 집착하고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으로 인격을 재는 한국인…좌파 지식인들도 거대담론 증후군…
‘지속가능한 우쭐’을 위해 성찰이 필요하다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 사회는 오래전부터 ‘동양 최고’ ‘동양 최대’ ‘동양 최초’ ‘세계 최고’ ‘세계 최대’ ‘세계 최초’ 등과 같은 ‘최고병’ ‘최대병’ ‘최초병’을 앓아왔다. 역사적으로 너무 당한 경험이 많아서인지 한국인들은 최고•최대•최초주의에 한이 맺혔다. 최고•최대•최초를 향해 목숨 걸고 질주한다. 황우석 사건에 대해 말이 많지만, 남 이야기인 척하진 말자. 그거 우리 이야기고 내 이야기다.
초고층건물론의 원조는 이건희 회장
최고•최대•최초주의가 한국 고유의 것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예컨대, 하늘로 치솟은 초고층 빌딩을 가리키는 마천루를 만드는 경쟁은 서양인들이 먼저 시작했다. 유럽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은 1932년 뉴욕에 102층짜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만들어놓고 유럽인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거 세계 최고다. 너네 이런 것 없지?” 이에 열받은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대해 말하는 뉴욕 사람에게선 시민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자기네 시정(市政)에 대해서도 항상 그런 자부심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라고 썼다.
자부심에 집착하다 실패한 경우도 있다. 북한은 88 서울올림픽에 자극을 받아 89년 제13차 평양청년축전을 과도한 비용을 낭비해가면서 치렀는데 이때부터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기업과 합작으로 평양에 세우려다 중단한 105층짜리 유경호텔이 그런 과시 사업의 하나였다. 지금도 평양에는 공사가 중단된 105층의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최근 들어 ‘세계 최대’ ‘세계 최고’ ‘세계 최초’에 집착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두바이다. 아랍에미리트에 소속된, 인구 120만 명의 작은 토후국이다. 세계에 이름을 알릴 길이 없어 거대한 토목공사로 ‘세계 최대’ ‘세계 최고’ ‘세계 최초’의 기록을 만들어내느라 여념이 없다. 국가 홍보 전략인 셈이다.
두바이의 그런 집착은 ‘콤플렉스’가 아니라 ‘실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국은 실질을 말하기엔 제법 큰 나라가 돼버렸다. 한국은 여전히 자부심과 자존심에 집착한다. 그래서 초고층 건물을 짓자는 이야기도 계속 나오고 있다.
애국심이 강한 소설가 이문열은 여러 나라들이 저마다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초고층 건물로 국가적 자긍심을 고취하기도 하고 경제성장을 과시하기도 하는데, 서울도 지금쯤은 세계가 돌아볼 만한 초고층 건물 하나쯤 가져도 좋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초고층건물론의 원조는 삼성 회장 이건희다. 이건희는 지금의 타워팰리스 자리에 원래 102층짜리 초대형 사옥을 지으려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69층짜리 타워팰리스로 만족해야 했다. 이건희는 최고•최대•최초주의의 전도사이기도 하다. 사실 이게 바로 그가 인기를 누리는 비결이다. 그의 어록을 살펴보면 ‘최고•최대•최초’라는 단어들이 난무한다. 그와 삼성의 오빠부대 요원들도 ‘반도체 세계 1위’ ‘LCD 세계 1위’ ‘휴대폰 세계 3위’ 등과 같은 순위를 들먹이기에 바쁘다.
한국 민주주의도 과도하게 폄하?
사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다. 올림픽 시상식에서 은메달 받고서도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선수는 한국인밖에 없다. 이것 하나로 다 정리된다. 이런 현실이 시사하듯이, 한국의 최고병•최대병•최초병이 조만간 치유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간 많은 걸 이루었지만 아직도 한국인의 자부심 또는 자존감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2005년 6월 취업 포털 잡링크에 따르면 대학생을 대상으로 국적 포기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5.8%가 ‘필요하다면 국적을 포기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이화여대 학보사가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5년 9월 이대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출생 전 자신의 의지로 조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62%의 학생이 선택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왜 그럴까? 한국이 그만큼 형편없는 나라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비교 대상에 문제가 있다. 신문도 좋고 학자들의 논문도 좋다. 국가 간 비교 사례를 보라. 예외 없이 선진국과의 비교 일색이다.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나라와 비교하는 법은 없다. 비교 대상은 죽으나 사나 미국, 일본, 유럽이다. 그거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제공되는 비교 연구 자료가 그것밖에 없으니 그런 경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늘 비교만 했다 하면 선진국과 비교하는 버릇은 빨리빨리 정신에 따른 과욕일까? 한국 민주주의도 그런 비교 대상이 돼 과도하게 폄하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주장을 펴는 대표적인 학자는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강정인이다.
강정인은 ‘서구 민주화 경험에 비춰본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라는 논문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짧은 역사는 생각하지 않고 서구 중심주의적 시각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폄하하는 걸 비판하면서 “한국의 현실은 비록 급진주의자들의 눈에는 불만스러울지언정 참을성 많은 역사가의 눈에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서구 국가들은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로 성숙하는 데 적어도 200년 이상 걸렸다”면서 “지난 50년간 이룩한 한국의 민주화를 자기 비하적으로 ‘일탈’ ‘파행’ ‘왜곡’으로 보는 시각을 시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선진국과의 비교 중독증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늘 더 높은 곳을 향해 따라잡자는 전투성을 배양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국민적 자기 모멸 또는 자학을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이 큰 성과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계속 자존감 투쟁에 일로매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면 최고병•최대병•최초병은 사라질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사이즈의 문제는 남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토 크기와 인구 크기는 세계 대비 각각 0.078%에 0.73%다. 이걸 모른 척하고 넘어갈 한국인이 아니다.
큰 사이즈에 민감, 얼굴 크기만 예외
한국인의 자존감을 위한 투쟁은 꼭 밖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내부적으로 생성되기도 한다. 그 내부적 생성 요인마저 처음엔 밖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일망정 시간이 흐르면서 내면화된 질서로 자리잡게 된다는 뜻이다. 밖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내적인 권위주의를 낳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질곡에 휘둘린 사람들일수록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권위주의적 성격의 핵심은 삶의 모든 것이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내면적 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밖에서 몰아치는 격랑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에 늘 밖과의 비교와 관계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이게 한국 사회에 각종 ‘신드롬’을 양산하는 심리적 기반이기도 하다.
밖과의 관계에선 늘 사이즈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한국인은 사이즈에 대단히 민감한 민족이다. 꼭 크다고 성능까지 좋은 건 아닌데 왜 그렇게 큰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작은 걸 크게 늘리기 위해 별일을 다 한다. 신체의 특정 부위에서부터 아파트 평수에 이르기까지 개조하는 걸 무척 사랑한다. 그래도 얼굴 크기는 작을수록 좋다고 보는 게 기특하다.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 크기로 인격을 재거나 사람을 차별한다는 건 이젠 상식이 됐다. 특히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왜 그렇게 큰 차를 좋아하고 경소형차를 천대하는지 신기할 정도다. 한동안 티코를 조롱하는 개그가 유행했던 걸 생각해보라. 티코의 바퀴가 도로 위의 껌에 붙어 꼼짝도 안 하더라는 둥, 티코가 그랜저를 추월해 어찌된 일인가 알아봤더니 때마침 거세게 분 바람에 날아갔기 때문이라는 둥, 자기 승용차도 없는 사람들까지 주제를 모르고 그걸 개그랍시고 해대며 키득거리곤 했다.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경소형차 이용자의 82%가 차가 작다는 이유로 무시•차별당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총 쏘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다. 10년 전엔 충남 아산시 국도에서 볼보 승용차와 프레스토 승용차가 추월 경쟁을 벌이다 볼보 승용차에 탄 사람이 공기총을 쏴 프레스토 승용차를 탄 사람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왜 볼보가 프레스토를 향해 총을 쐈겠는지 각자 생각해보시라.
사정이 그와 같으니 경소형차 사용 비중이 높을 리 없다. 일본이 20%를 넘는 것에 비해 한국은 4.5%로 일본의 5분의 1 수준에 머물러 있다. 비슷한 이유로 자동차 교체주기도 엄청나게 빠르다. 미국과 일본의 자동차 교체주기와 비교해 한국은 2배 이상 빠르다.
거창한 개념에 매료되기 시작하면…
전국의 자동차 번호판이 통일되면서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자동차 번호판마저 차별의 요인이다. ‘서울 52’나 ‘서울 55’로 시작하는 서울 강남구 번호판을 달고 다니면 고급 식당이나 호텔 등에서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에, 한 해에 신규로 강남구에서 발행하는 자동차 번호판 중 강남 비거주자 비율이 절반을 웃돌았었다.
벯 것은 아름답다”는 신념은 지식계에까지 파고들었다. 이른바 ‘거대담론증’이다. 한양대 교수 임지현은 “남한 지성사의 파국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세련된 자유주의와의 공개된 논쟁 속에서 단련되지 못하고, 밀폐된 공간 속에서 ‘정통’과 ‘최대주의’의 장막 속에 안주했다는 점이다”며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은 한마디로 거대담론 지향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날카로운 지적이지만, 거대담론 지향성은 좌파 지식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거대담론이란 게 과연 무언가? 거대한 걸 이야기하는 걸 거대담론이라고 그러는가? 꼭 그렇진 않다. 실천과의 연계성이 중요하다. 예컨대, 바닥이 더러우면 우선 걸레질부터 하고 찾아온 손님을 모셔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걸레질할 생각은 않고 그 자리에서 그 집의 구조에서부터 창문과 바닥재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입으로만 떠들어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거대담론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니 ‘시대정신’이니 하는 거창한 개념에 매료되기 시작하면 모든 미시적 분석은 쓰레기통에 내던져지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크게 봐서 옳기 때문에 무조건 지지한다는 자세를 갖게 되면, 자기 성찰과 교정은 불가능해진다. 자기 성찰과 교정을 위한 시도는 크게 봐서 나쁜 편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성토의 대상이 된다. 말을 거창하게 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풍토가 조성되지 않는 한 거대담론 증후군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최고•최대•최초주의와 거대담론 증후군은 ‘우쭐’의 산물일 수 있다. ‘우쭐댄다’함은 ‘남을 의식해서 자기 자신을 꾸며서 나타내는 행동’을 말한다. 잘난 척한다, 젠체한다, 폼 잡는다, 목에 힘준다, 거들먹댄다, 으스댄다, 뻐긴다 등등이 그런 경우다. 이런 정의를 내린 심리학자 최상진은 한국인에겐 우쭐대는 기질이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금배지를 달고 다니며 외국 유학생들은 하버드나 스탠퍼드 같은 ‘알아주는 명문대학’을 실속 있는 대학보다 선호하고, 미국에 이민간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에 관계없이 벤츠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이와 유관한 현상으로 읽어볼 수 있다. 근래에 들어, 한국 사람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와 같은 발전도상국을 여행할 때, 돈을 잘 쓰며 ‘우쭐’대는 행세를 하며, 이러한 한국인의 행동에 대해 비판 기사가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는 경제 선진국인 미국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에서도 한국 사람들은 기죽지 않고 활보하면서, ‘미국 별거 없어’라고 자기들 간에 이야기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기가 살았고, 또 어떻게 보면 우쭐댄다고 볼 수 있다.”
황우석에 던진 돌을 자신에게!
물론 우쭐대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 지구상에서 일본인들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한국인들이 유일하다고 하지 않는가. 우쭐대더라도 ‘지속 가능한 우쭐’을 위해 피땀 흘려 노력하면 되는데, 불행 중 다행히도 한국인에겐 그게 있다. 그래서 한국인의 ‘우쭐’은 영원하다.
‘우쭐’은 왕성한 삶의 투쟁 의욕을 키우는 것이기도 하니,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적어도 자존감을 지키고 누리기 위한 한국인의 ‘최고•최대•최초’ 투쟁에 돌을 던지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제 밖과의 관계에서 자기 의미를 찾는 자존감이 이대로 좋은지 생각해볼 때다. 사는 게 너무 피곤하고 살벌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자존감’을 위해 황우석에게 던질 돌을 각자 자기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출처: [한겨레21 2006-02-1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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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y Korea’와 ‘Sell People’에 앞장서는
[특별기획 : X맨은 바로 너!](7) - 국책연구기관
김영수(경상대)
이 글을 쓰기가 참으로 부담스럽다. 대학의 박사급 비정규직들은 국책연구기관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국책연구기관과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도 많고, 또한 국책연구기관의 전문 연구자들을 매도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책연구기관의 성격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참으로 교육정책이 대한민국처럼 많이 바뀌는 나라도 드물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겠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내 자식만큼은 일류 대학에 입학시켜서 출세를 보장받으려 한다. 결코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학에 입학하고 난 이후에 확인하고, 또 다시 국내외 대학원으로 자식을 내보낸다. 어떻게 해서든지 전문가로서의 자격을 확보하게 한다.
국책연구기관에는 이러한 전문가들이 즐비하다. 자기의 영역만큼은 그 누구와도 경쟁할 수 있다는 전문성과 자부심을 가지고서, 국책사업에 필요한 연구들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국가의 Think Tank로 존재한다. 그런데 그러한 연구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노동자 민중들을 착취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국가권력이 노동자 민중들을 억압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심한 경우에는 ‘국가’조차 팔아야만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 내는데 자신의 전문능력을 직접 발휘하기도 한다.
'Buy Korea'와 'Sell People'이라는 상품도 단순히 관료들만의 생산품이 아니라 관료들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국책연구기관의 생산품이다. 물론 이러한 상품을 생산하는데 국책연구기관만이 아니라 대학의 전문 지식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Buy Korea'와 'Sell People'
'대한민국을 팔고 있다. 대한민국이 팔리고 있다.' 예전에 현대그룹의 한 계열사가 팔았던 Buy Korea가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상품이다. 정부는 Buy Korea를 위해 막대한 예산까지 퍼부으면서 Sell People을 위한 전략과 전술을 구축하는데 미쳐있다. 지방자치단체도 마찬가지이다. 정부는 2006년 외국인 투자유치사업과 관련한 산자부의 예산으로 약 845억 원 이상을 배정하였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배정한 자체의 예산까지 합한다면, 아마도 수 천 억 원의 돈이 외국인 투자유치사업으로 쓰이고 있다. 어마어마한 돈까지 들여가면서 대한민국과 노동자 민중들 팔려고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상품이 통째로 판매되는 것인지, 아니면 부분적으로 판매되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정부는 Buy Korea로 대한민국의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사회구성원들이 모두 풍요로울 수 있다니, 대단한 상품이다. 한미FTA의 경우를 보면, 대한민국과 노동자 민중들을 통째로 팔려는 것이 분명하고, 이러한 판매 전략이 '단 한 번의 대박'이라는 꿈을 꾸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등장하였다. 자본과 권력의 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거나 그 힘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박'의 주역으로 나서고 있다.
Buy Korea로 내가 풍요로워질 수 있다니, 앞장서서 영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어깨가 정말로 무거워진다. 남 덕택으로 풍요로워지는 '무임승차'가 아니라, 내가 노력해서 대한민국의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무임승차시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대한민국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까? 정말 대한민국을 살려는 소비자들이 있는 것인가? 모든 장사가 그렇듯이, Buy Korea는 손해를 보면서 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 ‘Buy Korea’는 ‘Sell People’, 즉 노동자 민중들을 시장과 자본의 바다에 내다 파는 것은 아닌가? 아마도 상품을 팔고자 하는 사람이나 사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가 한 번 쯤은 고민할 문제들이다. 고민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거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으면서 상품을 파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Buy Korea나 Sell People이라는 상품을 시장에 내놓고 영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관료들이고, 그 관료들은 수족처럼 다룰 수 있는 책사를 고용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시장에 의해 점령되어야 하고, 자본의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헤엄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노동자·민중들은 바다에서 익사하면 그만이다.
굳이 대한민국의 주인을 논하고 싶지 않지만, Buy Korea라는 상품을 누가 만들었고 왜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한민국을 상품으로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지배세력의 위기상황이든지, 아니면 누군가가 대한민국을 강제로 살려고 하는 상황일 것이다.
전자의 상황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서 비롯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라고 한다면, 후자의 상황은 초국적자본의 독과점화를 추구하는 제국주의 세력의 강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들은 대한민국의 지배세력과 제국주의 세력 간의 융합과정이자 지배 네트워크의 세계화 과정이다. 그 동안 지배 네트워크가 국민국가의 국가기관을 중심으로 형성,유지되어 왔다면, 이제는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세계적 수준의 지배 네트워크가 확장되고 있고, 또한 국민국가 내의 다양한 Think Tank기관이나 전문적인 시민사회단체들을 포섭하는 지배 네트워크가 견고하게 구축되고 있다.
책사들을 제도화한 지배 네트워크
절대 군주를 모시는 유능한 책사들의 이야기는 용인술 혹은 처세술의 수준에서 중국의 고대 소설들에 많이 등장한다. 초야에 묻힌 상태에서 국가와 사회를 좌지우지했던 책사들의 이야기, 훌륭한 군주를 만나서 자신의 지식과 꿈을 웅대하게 펼쳤던 책사들의 이야기, 책사의 의지에 따라 군주의 자리가 유지되거나 퇴출되었던 이야기 등이 인간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권력관계가 인간의 욕망과 의지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 한, 권력관계를 둘러싼 책사의 역할과 기능도 존재한다.
근대화되지 않은 사회의 권력관계에서 책사의 역할과 기능이 개인적인 친소관계로 형성되었다면, 사회체제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책사들의 역할과 기능이 제도화되었다. 권력이나 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의 주위에서 개인적인 수준의 책사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책사의 역할과 기능을 담당할 제도가 국가의 지배 네트워크로 구축되어 있다. 소위 국가의 Think Tank로 간주되는 국책연구기관들이 그것이다.
대한민국은 1999년에 제정된「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각 부처에 산재되어 있던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였다. 국무총리실 산하에 5개의 연구회를 구성하고, 5개의 연구회가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을 관리할 수 있게 하였다. 5개의 연구회는「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국가의 연구사업정책을 지원하고 지식산업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목적을 추구한다.
2007년 현재,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국무총리실 산하의 조직으로 편재된 상태에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한국노동연구원 외 21개의 연구원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기초기술연구회.산업기술연구회.공동기술연구회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의 조직으로 편재된 상태에서 총 21개의 연구원과 2개의 연구소를 관리하고 있다. 연구회 산하로 재편되어 있는 수많은 국책연구기관들은 사회구성원들의 일상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생활요소들을 국가정책으로 전화시켜 내는 책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연구회는 자신의 역할에 맞게 정부로부터 예산을 배정받아 산하의 국책 연구원이나 연구소들을 지원.관리한다.
연구원이나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는 대부분의 수많은 연구자들이나 그러한 연구자들을 지원하고 있는 행정 관리자들은 자신이야말로 Buy Korea와는 무관하게 연구기관의 성격에 조응하는 노동에 종사하면서 사회구성원들에게 공공적 서비스를 최대한 제공하려 한다고 한다. 물론 연구기관의 성격에 따라, 공공적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기관도 존재한다. 문제는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자나 행정 관리자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Buy Korea의 주역으로 존재할 수 있다. 연구기관들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예산으로 운영․관리된다. 정부의 정책을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연구자나 행정 관리자들은 연구기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연구기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수준의 연구들이 연구기관의 요구와 무관하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산업기술의 발전에 공헌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연구기관에서 요구하는 연구를 제출해야만 할 의무를 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국책연구기관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법, 예를 들면 「정부산하기관관리기본법」의 권한을 이용하여 국책연구기관의 성과를 매년 평가하면서 연구자들에게 국책연구자로서의 의무를 강요하고 있고,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연구자들에게 임금의 형태로 받고 있는 연구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DDA 협상이나 한미FTA 협상에서 책사로서의 역할을 주요하게 발휘했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계급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기 보다는 완화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는 노동교육원이나 노동연구원, 그리고 경제성장의 다양한 촉매제들을 만들고자 하는 산업연구원이나 한국개발연구원 등이 그것이다. 이 외의 연구원이나 연구소들도 각 기관의 성격에 조응하는 역할들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자들은 어떠한 성과물을 제시하든지 간에 ‘양비론’적인 시각을 철저하게 유지한다. 국책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제출하고,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방안까지 제출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Buy Korea나 Sell People이라는 상품을 판매하는 것과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국책연구기관들이 정부의 정책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면 말이다. Buy Korea나 Sell People이라는 상품은 자본축적의 위기상황에 내몰린 자본의 요구이자 제국주의 세력의 강요에 순응하는 정부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요인도 존재한다. 국책연구기관들은 국회에서 결정되는 기본적인 예산 이외에 특별예산의 형태인 정부기금을 지원받는다. 예를 들면, 2006년도의 정보통신기금은 약 1조3590억 원이었다. 이 기금은 정부와 사적 자본의 출연으로 형성되는데, 정보통신과 관련된 국책연구기관들은 이 기금 중에서 상당 부분을 지원받는다. 과학기술진흥기금이나 전력산업기반기금 등도 수 백 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사적 자본의 출연금 및 정부의 출연금으로 조성되고, 과학기술 및 전력산업과 관련된 국책연구기관들은 이 기금 중에서 상당 부분을 지원받는다.
정부기금 중에서 연구회가 지원받는 예산의 규모를 예로 들면,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2005년에 2,205억9,100만 원의 예산을 배정받았고, 2006년에 2,448억8,700만 원의 예산을 배정받았다. 이러한 예산이 연구회의 자체 운영, 23개의 연구원에 차등적으로 배정하여 다 소진되지만, 2006년 각 연구원 당 평균 예산은 약 100억 원을 초과한다. 과학기술위원회 산하에 편재되어 있는 총 21개의 연구원과 2개의 연구소 예산을 고려하면, 국책연구기관에 배정되는 예산을 거의 4000억 원 이상일 것이다. 이러한 국책연구기관들은 정부에서 투입하는 예산에 비해 더 많은 산출을 하려고 노력한다. 연구자 개개인의 의지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연구자들이나 행정 관리자들은 연구기관에게 부여되는 각종 기금의 혜택을 누리면서 자신의 연구기반을 유지하거나 강화시키고 있다.
연구전문 노동자들의 공공성
오늘날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산업에 있어서 복잡노동의 확대 및 비육체적 노동자의 증가, 육체적 활동과 정신적 활동을 구별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이나 생산활동이 점차 사회화됨에 따라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새로운 통일이 한층 더 요청되는 게 현실이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지속되고 있는 현실의 노동 분업은 전 세계적 규모에서 시간적·공간적인 통합과 접합을 요구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더 이상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잉여가치의 총량을 확대하려 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체제는 스스로 노동자들 간의 위계적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정신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주의'를 파기시키고 있다.
문제는 연구전문 노동자들 스스로, 특히 박사급의 연구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변화되고 있는 전문노동의 이러한 속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가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국책연구기관으로 하여금 사회적 잉여가치의 총량을 강화.확대하거나 보다 많은 잉여가치를 분배받기 위해 연구전문 노동자들의 노동력만이 아니라 생산직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게 한다. 반면에 국책연구기관에서 종사하고 있는 연구전문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적 갈등의 주체이기를 쉽게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생산직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의 양이 사회적으로 증가하면 할수록 연구전문 노동자들에게 분배되는 잉여가치의 양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착취구조는 연구전문 노동자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전문연구의 자격증으로 간주될 수 있는 박사급의 연구자들은 육체노동에 대한 정신노동의 상대적 우월성, 특히 개별적인 우월의식을 쉽게 버리려 하지 않는다. 연구전문 노동자들은 자신의 전문적인 노동력을 연구기관에 파는 대신, 국책연구기관이 사회적 잉여가치의 총량을 강화.확대하기 위해 노동자 민중들을 착취하는 것에 대해 모르쇠로 대응하는 경향성을 드러낸다.
비물적인 재화의 생산이 집단적 노동과정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개별적인 노동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이 과정에서 서비스재화를 생산자들 스스로가 집단적이고 계급적인 존재기반을 개별적인 의식의 문제로 치환시켜 버리는 경향성과 궤를 같이 한다.
국책연구기관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조합이 존재한다. 최근에 (구)전국과학기술노조와 (구)전국공공.연구전문노조가 통합하여 2007년 3월 27일에 전국공공과학기술연구노동조합을 창립하였다. 이 노조에는 국책연구기관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이고 공공적 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공공기관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가입되어 있다. 이 노조는 '자율적인 연구환경과 경영기반의 구축, 기관의 개혁과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 기관의 사회공공성 강화,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기관으로 재탄생' 등과 같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전국공공과학기술연구노동조합의 이러한 목적을 다른 차원에서 그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정부의 관리와 통제를 벗어나는 국책연구기관의 자율성이 미약하거나 부재하다는 의미, 개혁하고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책연구기관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 노동자 민중들의 이해를 반영할 수 있는 기관의 성격이 미약하였다는 의미, 그리고 국민으로부터의 신뢰가 미약했다는 의미이다. 국책연구기관이 예산의 힘과 법적 권한의 힘을 내세우는 정부의 지배 네트워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책연구기관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조합이 이러한 지배 네트워크를 무너뜨리는 투쟁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투쟁에서 승리한다면, 'Buy Korea'를 거부하는 노동자의 투쟁 진지들이 지배 네트워크의 한 공간에 형성될 것이다. 패배한다면, 연구전문 노동자들은 노동자 민중들을 착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Sell People'의 주역으로 존재할 것이다.
'Buy Korea'와 'Sell People'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을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는, 'Buy Korea'와 'Sell People'은 대한민국의 노동자․민중들을 시장과 자본의 바다에 팔려는 동의어이다. 자본가 계급의 입장에서는, ‘Buy Korea’와 ‘Sell People’은 동의어가 아니다. ‘Buy Korea’라는 상품을 팔아야 시장과 자본의 바다에서 풍요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다. ‘Sell People’이 아니라, 노동자·민중들에게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Buy Korea’와 ‘Sell People’에 내포되어 있는 계급적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들을 완화시키거나 해소시키는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투쟁의 의제 중에 하나가 ‘사회공공성’ 투쟁이다. 또한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연구전문 노동자들이 종종 ‘Buy Korea’와 ‘Sell People’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사회공공성 투쟁’이 단순하게 국가권력이나 국책연구기관에 의존하는 케인즈주의적인 공공성을 넘어선다는 전제, 즉 국가권력이나 국책연구기관의 공공성을 노동자 민중이 주도하는 ‘노동자 민중의 공공성’으로 전이시킨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연구전문 노동자들은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국책연구기관의 계급적 성격을 변화시켜 내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출처: 참세상 2007년06월25일 9시18분 [원문]
김영수(경상대)
이 글을 쓰기가 참으로 부담스럽다. 대학의 박사급 비정규직들은 국책연구기관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국책연구기관과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도 많고, 또한 국책연구기관의 전문 연구자들을 매도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책연구기관의 성격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참으로 교육정책이 대한민국처럼 많이 바뀌는 나라도 드물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겠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내 자식만큼은 일류 대학에 입학시켜서 출세를 보장받으려 한다. 결코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학에 입학하고 난 이후에 확인하고, 또 다시 국내외 대학원으로 자식을 내보낸다. 어떻게 해서든지 전문가로서의 자격을 확보하게 한다.
국책연구기관에는 이러한 전문가들이 즐비하다. 자기의 영역만큼은 그 누구와도 경쟁할 수 있다는 전문성과 자부심을 가지고서, 국책사업에 필요한 연구들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국가의 Think Tank로 존재한다. 그런데 그러한 연구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노동자 민중들을 착취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국가권력이 노동자 민중들을 억압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심한 경우에는 ‘국가’조차 팔아야만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 내는데 자신의 전문능력을 직접 발휘하기도 한다.
'Buy Korea'와 'Sell People'이라는 상품도 단순히 관료들만의 생산품이 아니라 관료들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국책연구기관의 생산품이다. 물론 이러한 상품을 생산하는데 국책연구기관만이 아니라 대학의 전문 지식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Buy Korea'와 'Sell People'
'대한민국을 팔고 있다. 대한민국이 팔리고 있다.' 예전에 현대그룹의 한 계열사가 팔았던 Buy Korea가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상품이다. 정부는 Buy Korea를 위해 막대한 예산까지 퍼부으면서 Sell People을 위한 전략과 전술을 구축하는데 미쳐있다. 지방자치단체도 마찬가지이다. 정부는 2006년 외국인 투자유치사업과 관련한 산자부의 예산으로 약 845억 원 이상을 배정하였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배정한 자체의 예산까지 합한다면, 아마도 수 천 억 원의 돈이 외국인 투자유치사업으로 쓰이고 있다. 어마어마한 돈까지 들여가면서 대한민국과 노동자 민중들 팔려고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상품이 통째로 판매되는 것인지, 아니면 부분적으로 판매되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정부는 Buy Korea로 대한민국의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사회구성원들이 모두 풍요로울 수 있다니, 대단한 상품이다. 한미FTA의 경우를 보면, 대한민국과 노동자 민중들을 통째로 팔려는 것이 분명하고, 이러한 판매 전략이 '단 한 번의 대박'이라는 꿈을 꾸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등장하였다. 자본과 권력의 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거나 그 힘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박'의 주역으로 나서고 있다.
Buy Korea로 내가 풍요로워질 수 있다니, 앞장서서 영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어깨가 정말로 무거워진다. 남 덕택으로 풍요로워지는 '무임승차'가 아니라, 내가 노력해서 대한민국의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무임승차시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대한민국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까? 정말 대한민국을 살려는 소비자들이 있는 것인가? 모든 장사가 그렇듯이, Buy Korea는 손해를 보면서 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 ‘Buy Korea’는 ‘Sell People’, 즉 노동자 민중들을 시장과 자본의 바다에 내다 파는 것은 아닌가? 아마도 상품을 팔고자 하는 사람이나 사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가 한 번 쯤은 고민할 문제들이다. 고민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거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으면서 상품을 파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Buy Korea나 Sell People이라는 상품을 시장에 내놓고 영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관료들이고, 그 관료들은 수족처럼 다룰 수 있는 책사를 고용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시장에 의해 점령되어야 하고, 자본의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헤엄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노동자·민중들은 바다에서 익사하면 그만이다.
굳이 대한민국의 주인을 논하고 싶지 않지만, Buy Korea라는 상품을 누가 만들었고 왜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한민국을 상품으로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지배세력의 위기상황이든지, 아니면 누군가가 대한민국을 강제로 살려고 하는 상황일 것이다.
전자의 상황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서 비롯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라고 한다면, 후자의 상황은 초국적자본의 독과점화를 추구하는 제국주의 세력의 강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들은 대한민국의 지배세력과 제국주의 세력 간의 융합과정이자 지배 네트워크의 세계화 과정이다. 그 동안 지배 네트워크가 국민국가의 국가기관을 중심으로 형성,유지되어 왔다면, 이제는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세계적 수준의 지배 네트워크가 확장되고 있고, 또한 국민국가 내의 다양한 Think Tank기관이나 전문적인 시민사회단체들을 포섭하는 지배 네트워크가 견고하게 구축되고 있다.
책사들을 제도화한 지배 네트워크
절대 군주를 모시는 유능한 책사들의 이야기는 용인술 혹은 처세술의 수준에서 중국의 고대 소설들에 많이 등장한다. 초야에 묻힌 상태에서 국가와 사회를 좌지우지했던 책사들의 이야기, 훌륭한 군주를 만나서 자신의 지식과 꿈을 웅대하게 펼쳤던 책사들의 이야기, 책사의 의지에 따라 군주의 자리가 유지되거나 퇴출되었던 이야기 등이 인간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권력관계가 인간의 욕망과 의지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 한, 권력관계를 둘러싼 책사의 역할과 기능도 존재한다.
근대화되지 않은 사회의 권력관계에서 책사의 역할과 기능이 개인적인 친소관계로 형성되었다면, 사회체제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책사들의 역할과 기능이 제도화되었다. 권력이나 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의 주위에서 개인적인 수준의 책사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책사의 역할과 기능을 담당할 제도가 국가의 지배 네트워크로 구축되어 있다. 소위 국가의 Think Tank로 간주되는 국책연구기관들이 그것이다.
대한민국은 1999년에 제정된「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각 부처에 산재되어 있던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였다. 국무총리실 산하에 5개의 연구회를 구성하고, 5개의 연구회가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을 관리할 수 있게 하였다. 5개의 연구회는「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국가의 연구사업정책을 지원하고 지식산업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목적을 추구한다.
2007년 현재,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국무총리실 산하의 조직으로 편재된 상태에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한국노동연구원 외 21개의 연구원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기초기술연구회.산업기술연구회.공동기술연구회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의 조직으로 편재된 상태에서 총 21개의 연구원과 2개의 연구소를 관리하고 있다. 연구회 산하로 재편되어 있는 수많은 국책연구기관들은 사회구성원들의 일상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생활요소들을 국가정책으로 전화시켜 내는 책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연구회는 자신의 역할에 맞게 정부로부터 예산을 배정받아 산하의 국책 연구원이나 연구소들을 지원.관리한다.
연구원이나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는 대부분의 수많은 연구자들이나 그러한 연구자들을 지원하고 있는 행정 관리자들은 자신이야말로 Buy Korea와는 무관하게 연구기관의 성격에 조응하는 노동에 종사하면서 사회구성원들에게 공공적 서비스를 최대한 제공하려 한다고 한다. 물론 연구기관의 성격에 따라, 공공적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기관도 존재한다. 문제는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자나 행정 관리자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Buy Korea의 주역으로 존재할 수 있다. 연구기관들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예산으로 운영․관리된다. 정부의 정책을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연구자나 행정 관리자들은 연구기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연구기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수준의 연구들이 연구기관의 요구와 무관하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산업기술의 발전에 공헌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연구기관에서 요구하는 연구를 제출해야만 할 의무를 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국책연구기관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법, 예를 들면 「정부산하기관관리기본법」의 권한을 이용하여 국책연구기관의 성과를 매년 평가하면서 연구자들에게 국책연구자로서의 의무를 강요하고 있고,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연구자들에게 임금의 형태로 받고 있는 연구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DDA 협상이나 한미FTA 협상에서 책사로서의 역할을 주요하게 발휘했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계급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기 보다는 완화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는 노동교육원이나 노동연구원, 그리고 경제성장의 다양한 촉매제들을 만들고자 하는 산업연구원이나 한국개발연구원 등이 그것이다. 이 외의 연구원이나 연구소들도 각 기관의 성격에 조응하는 역할들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자들은 어떠한 성과물을 제시하든지 간에 ‘양비론’적인 시각을 철저하게 유지한다. 국책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제출하고,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방안까지 제출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Buy Korea나 Sell People이라는 상품을 판매하는 것과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국책연구기관들이 정부의 정책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면 말이다. Buy Korea나 Sell People이라는 상품은 자본축적의 위기상황에 내몰린 자본의 요구이자 제국주의 세력의 강요에 순응하는 정부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요인도 존재한다. 국책연구기관들은 국회에서 결정되는 기본적인 예산 이외에 특별예산의 형태인 정부기금을 지원받는다. 예를 들면, 2006년도의 정보통신기금은 약 1조3590억 원이었다. 이 기금은 정부와 사적 자본의 출연으로 형성되는데, 정보통신과 관련된 국책연구기관들은 이 기금 중에서 상당 부분을 지원받는다. 과학기술진흥기금이나 전력산업기반기금 등도 수 백 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사적 자본의 출연금 및 정부의 출연금으로 조성되고, 과학기술 및 전력산업과 관련된 국책연구기관들은 이 기금 중에서 상당 부분을 지원받는다.
정부기금 중에서 연구회가 지원받는 예산의 규모를 예로 들면,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는 2005년에 2,205억9,100만 원의 예산을 배정받았고, 2006년에 2,448억8,700만 원의 예산을 배정받았다. 이러한 예산이 연구회의 자체 운영, 23개의 연구원에 차등적으로 배정하여 다 소진되지만, 2006년 각 연구원 당 평균 예산은 약 100억 원을 초과한다. 과학기술위원회 산하에 편재되어 있는 총 21개의 연구원과 2개의 연구소 예산을 고려하면, 국책연구기관에 배정되는 예산을 거의 4000억 원 이상일 것이다. 이러한 국책연구기관들은 정부에서 투입하는 예산에 비해 더 많은 산출을 하려고 노력한다. 연구자 개개인의 의지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연구자들이나 행정 관리자들은 연구기관에게 부여되는 각종 기금의 혜택을 누리면서 자신의 연구기반을 유지하거나 강화시키고 있다.
연구전문 노동자들의 공공성
오늘날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산업에 있어서 복잡노동의 확대 및 비육체적 노동자의 증가, 육체적 활동과 정신적 활동을 구별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이나 생산활동이 점차 사회화됨에 따라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새로운 통일이 한층 더 요청되는 게 현실이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지속되고 있는 현실의 노동 분업은 전 세계적 규모에서 시간적·공간적인 통합과 접합을 요구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더 이상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잉여가치의 총량을 확대하려 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체제는 스스로 노동자들 간의 위계적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정신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주의'를 파기시키고 있다.
문제는 연구전문 노동자들 스스로, 특히 박사급의 연구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변화되고 있는 전문노동의 이러한 속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가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국책연구기관으로 하여금 사회적 잉여가치의 총량을 강화.확대하거나 보다 많은 잉여가치를 분배받기 위해 연구전문 노동자들의 노동력만이 아니라 생산직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게 한다. 반면에 국책연구기관에서 종사하고 있는 연구전문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적 갈등의 주체이기를 쉽게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생산직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의 양이 사회적으로 증가하면 할수록 연구전문 노동자들에게 분배되는 잉여가치의 양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착취구조는 연구전문 노동자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전문연구의 자격증으로 간주될 수 있는 박사급의 연구자들은 육체노동에 대한 정신노동의 상대적 우월성, 특히 개별적인 우월의식을 쉽게 버리려 하지 않는다. 연구전문 노동자들은 자신의 전문적인 노동력을 연구기관에 파는 대신, 국책연구기관이 사회적 잉여가치의 총량을 강화.확대하기 위해 노동자 민중들을 착취하는 것에 대해 모르쇠로 대응하는 경향성을 드러낸다.
비물적인 재화의 생산이 집단적 노동과정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개별적인 노동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이 과정에서 서비스재화를 생산자들 스스로가 집단적이고 계급적인 존재기반을 개별적인 의식의 문제로 치환시켜 버리는 경향성과 궤를 같이 한다.
국책연구기관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조합이 존재한다. 최근에 (구)전국과학기술노조와 (구)전국공공.연구전문노조가 통합하여 2007년 3월 27일에 전국공공과학기술연구노동조합을 창립하였다. 이 노조에는 국책연구기관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이고 공공적 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공공기관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가입되어 있다. 이 노조는 '자율적인 연구환경과 경영기반의 구축, 기관의 개혁과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 기관의 사회공공성 강화,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기관으로 재탄생' 등과 같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전국공공과학기술연구노동조합의 이러한 목적을 다른 차원에서 그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 정부의 관리와 통제를 벗어나는 국책연구기관의 자율성이 미약하거나 부재하다는 의미, 개혁하고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책연구기관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 노동자 민중들의 이해를 반영할 수 있는 기관의 성격이 미약하였다는 의미, 그리고 국민으로부터의 신뢰가 미약했다는 의미이다. 국책연구기관이 예산의 힘과 법적 권한의 힘을 내세우는 정부의 지배 네트워크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책연구기관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조합이 이러한 지배 네트워크를 무너뜨리는 투쟁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투쟁에서 승리한다면, 'Buy Korea'를 거부하는 노동자의 투쟁 진지들이 지배 네트워크의 한 공간에 형성될 것이다. 패배한다면, 연구전문 노동자들은 노동자 민중들을 착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Sell People'의 주역으로 존재할 것이다.
'Buy Korea'와 'Sell People'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을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는, 'Buy Korea'와 'Sell People'은 대한민국의 노동자․민중들을 시장과 자본의 바다에 팔려는 동의어이다. 자본가 계급의 입장에서는, ‘Buy Korea’와 ‘Sell People’은 동의어가 아니다. ‘Buy Korea’라는 상품을 팔아야 시장과 자본의 바다에서 풍요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다. ‘Sell People’이 아니라, 노동자·민중들에게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Buy Korea’와 ‘Sell People’에 내포되어 있는 계급적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들을 완화시키거나 해소시키는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투쟁의 의제 중에 하나가 ‘사회공공성’ 투쟁이다. 또한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연구전문 노동자들이 종종 ‘Buy Korea’와 ‘Sell People’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사회공공성 투쟁’이 단순하게 국가권력이나 국책연구기관에 의존하는 케인즈주의적인 공공성을 넘어선다는 전제, 즉 국가권력이나 국책연구기관의 공공성을 노동자 민중이 주도하는 ‘노동자 민중의 공공성’으로 전이시킨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연구전문 노동자들은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국책연구기관의 계급적 성격을 변화시켜 내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출처: 참세상 2007년06월25일 9시18분 [원문]
2007년 6월 21일 목요일
국보법은 미국 가면 돌 맞는다
[한겨레] 수정헌법 제1조를 통해 본 국가보안법의 후진성…
“모든 정치적 의견은 토론의 시장에서 정화된다”
▣ 노트러데임(미국)=박용현/ 한겨레 편집부 기자 piao@hani.co.kr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싼 법리 논쟁이 갈수록 볼만하다. 외국에서 바라보니 더욱 그렇고, 미국 로스쿨에서 법의 잣대를 들고 보자니 더더욱 그렇다. 그 점입가경의 극치는 역시 ‘광화문 인공기’나 ‘주체사상연구소’식의 자극성 상황 설정과,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이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는 호들갑이다.
알카에다도 의견 낼 수 있어
미국 인디애나주 노트러데임대학 로스쿨 교수인 리처드 가넷에게 이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하찮은 논란에 불과한 듯했다. 그는 “미국엔 특정 이념을 선전•선동하거나 적국을 찬양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표현•언론•집회의 자유 등을 규정한 수정헌법 제1조는 일개 헌법 조항인데도 독자적인 법 과목을 이룰 정도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 수정헌법 제1조 아래에선, 9•11 동시다발 테러의 참혹한 악몽에도 불구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거나 알카에다에 단순 가입하는 사람조차 처벌할 수 없다는 게 가넷 교수의 설명이다. “현행법에서는 테러단체를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행위에 이르러서야 처벌이 가능합니다.” 이는 이론상의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 이슬람교도들을 향해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미국인을 살해하라”고 지시하는 빈 라덴의 ‘세계이슬람전선 성명’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녀도 이를 문제 삼은 적이 없다. 인권단체와 일부 로스쿨 교수들은 ‘물질적 지원 금지’에 대해 “테러단체로 지목된 단체들도 각종 합법적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만큼 일괄적으로 기부나 원조 행위를 금지해선 안 된다”며 이마저도 지나친 규제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달 초 미국 캔자스주 항소법원에서는 테러에 대한 공포와 개인의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는 미국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판결이 있었다. 평소 빈 라덴을 찬양하고 “미국인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한 이란인 노동자가 9•11 1주년 직후 미국인 동료들에게 “닷새 뒤 미국 전역에 테러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미국을 비판하고 빈 라덴에 대한 지지를 밝힐 권리는 그야말로 보호된다”며 “그러나 마치 임박한 테러에 자신도 가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로써 여성 동료가 불안해서 울 정도로 만든 것은 정치적 의견 표명이 아닌 폭언에 해당한다”고 유죄 이유를 밝혔다. 재판의 초점은 ‘말의 내용이나 관점’이 아니었다. 이 이란인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 판결은 9•11 이후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테러 공포증의 민감도를 말해주는 한편, 그럼에도 정치적 의견의 표명에 그치는 한 어떤 말도 법적인 제재를 받지 않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9 11 이후 미국 정부는 이른바 ‘애국자법’을 통해 테러수사 기관에 지나친 정보 수집 권한을 줌으로써 개인의 사생활을 위협하는가 하면 아랍계 외국인에 대한 차별 강화, 테러 용의자의 변호인 접견권 불허 등으로 인권 상황을 급속히 악화시켜왔다. 이란•콩고•파키스탄 등과 더불어 미성년자까지 사형에 처하는 8개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은 사실 인권에 관한 한 선진국으로 볼 수도 없다.
브란덴버그 기준… 정부 협박한 KKK 인정
그러나 9•11 이후에도 의견과 그 표현을 처벌하는 법만은 만들지 않고 있다. 이는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처벌해야 할 표현의 범위에 대해 확고한 법적 기준을 형성해왔고, 이 기준을 넘어 법을 만들 경우 연방대법원에 의해 위헌으로 판명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중 국내에도 잘 알려진 것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기준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 대상자들에게 징집 거부를 촉구하는 우편물을 발송한 혐의로 미국 사회당 사무총장이 기소된 사건에서 홈즈 연방대법관은 “어떤 의견 표현이 행해지는 상황이나 그 성질로 보아 실질적인 해악을 가져올 것이라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발생하느냐 여부”를 처벌 기준으로 제시했다.
이 기준은 국내에서도 국가보안법 사건 변호인들에 의해 종종 인용되곤 한다. 국가보안법에 걸리면 명백한 위험을 일으키지 않는 행위도 처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행위조차 처벌해야 한다고 보는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이 이 기준을 받아들일 리 없다. 이들은 거의 1세기 전, 그것도 전쟁의 와중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이 그려놓은 표현의 한계선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기준은 이후 홈즈 대법관을 표현의 자유의 대명사로 만들면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보호막이 되지는 못했다. 1950년대 매카시즘에 휩쓸려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소된 이들에게 대대적인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미국 법원은 다시 표현의 자유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69년에 나온 브란덴버그 사건 판결이다. 무장한 KKK(극우 백인단체) 단원들이 모여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정부 요인에 대한 보복도 불사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집회를 다룬 이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비록 폭력이나 불법적인 수단의 사용을 옹호하는 말일지라도, 즉각적인 불법 행위를 선동해서 그런 사태가 실제로 벌어질 만한 상황이 아닌 한 금지돼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이 정도 기준에 이르면, 한총련을 비롯한 국내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거의 대부분 무죄로 기울 게 분명하다.
예를 들어 폭력에 의한 정부의 전복을 주장하더라도 이른 시일 안에 봉기에 나설 것을 선동하고 그런 결과가 곧 예견되지 않는 한 그런 주장은 허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사상의 자유 시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토론할 시간적 여유만 주어진다면 위험한 생각도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충분히 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질서는 처벌의 공포만으로 지켜지지 않으며, 사회의 안전으로 가는 길은 불만과 대안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의 기회 속에 놓여 있다”라는 게 연방대법원의 철학이다.
브란덴버그 기준은 이후 베트남전 당시의 반전시위 사건을 비롯해 모든 불법 행위 선동 사건의 처벌 기준으로 확고히 유지돼오고 있으며, 수정헌법 제1조 교과서에서 첫 판례로 소개하고 있다.
미국 역사에서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과도하게 침해받아왔는지를 연구한 책 <위험한 시대>를 이달 출간한 조프리 스톤 시카고대학 로스쿨 교수는 “브란덴버그 기준이야말로 의견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기 위해 우리가 감내해야 할 최대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는 “반대쪽 의견에 대해 관용하고 자문해보는 태도를 버린다면, 우리는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싸우는 꼴이 될 것”이라면서 “미국 법원은 과거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었고, 앞으로는 안보상 필요성에 따른 표현의 자유 제한을 더욱더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9 11 테러도 ‘표현의 자유’ 꺾지 못해
미국 내에는 이런 기준을 달갑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다수 여론은 굳건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표현의 자유 침해를 감시하는 시민단체인 퍼스트어멘드먼트센터가 내놓은 올해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 보장이 지나치다”는 대답은 조사 대상자 1002명 중 30%에 그친 반면 65%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9•11 테러의 충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2년 전 조사에서도 안보를 위해 표현의 자유를 더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은 과반을 넘지 못했다.
다시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국가보안법 존치론자들은 안보 불안 심리를 부추기느라 여념이 없고 반대편에선 법을 고쳐도 처벌할 건 다 처벌할 수 있다는 논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침해해온 권리는 무엇이고 앞으로 이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는 정작 전면에 떠오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법원을 비롯한 법조계에서는 형법 대체안의 처벌 기준이 모호하고 또 다른 남용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법이 바뀐 뒤에도 죄명만 바뀐 채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여전히 구속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기준을 찾는 적극적인 논의가 시급한 시점이다.
어쩌면 이는 민주주의의 원형을 회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도 ‘이세고리아’라는 표현의 자유 개념이 확고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이세고리아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체제의 근본적 차이는 아테네에서는 스파르타 체제를 찬양할 자유가 있지만, 스파르타에서는 스파르타 이외의 체제를 찬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2300년이 지난 시대에 살고 있다.
유럽, 아시아, 전세계 어디서나… ‘브란덴버그 기준’ 수준의 표현의 자유 보장이 미국만의 것은 아니다. 지난 1995년 국제법 전문가들이 국가 안보와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면밀히 논의한 결과 채택한 ‘요하네스버그 원칙’도 그와 비슷한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 원칙은 이후 유엔의 공인을 받았다.
이 원칙 제1조는 국가 안보의 필요성에 따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더라도 △그 표현이 심각한 위협을 줄 때 △국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제한만 가해야 하며 △그 제한은 민주적인 원칙에 부합해야 한다는 전제를 규정하고 있다. 특히 표현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선 그 표현이 △즉각적인 불법 행위 선동을 의도했고 △그런 불법 행위를 유발할 것 같으며 △그 표현과 불법 행위의 발생 가능성 사이에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세 가지 사실을 정부가 증명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이런 기준은 단지 이론적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많은 나라에서 이미 법적인 원칙으로 자리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선진국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인도 대법원은 이미 지난 1989년 제한할 수 있는 표현의 범위를 이렇게 판시했다. “표현 행위가 유발할 것으로 예상되는 위험이 시간적으로 먼 일이거나 단지 추측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그 표현과 직접적이고 근접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마치 화약통 속의 스파크처럼, 의도하는 행위를 일으킬 만한 표현이어야 한다.” 나이지리아 대법원의 1983년 판결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폭력에 의한 체제 전복 선동으로부터 우리의 공동체를 지킬 중요성이 커질수록,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 또한 더욱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야만 정부가 국민의 뜻에 책임을 지는 것이고 국민이 바라는 변화를 평화적으로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이 가입해 있는 유럽인권재판소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사건이 자주 다뤄지는데, 역시 엄격한 잣대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고 있다.
쿠르드족이 무장투쟁 등 강력한 분리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는 터키에서, 지난 1989년 정부의 쿠르드족 탄압 중단과 쿠르드족의 자유 의지에 근거한 평화적 해결 등을 주장하며 창당된 공산당이 그 강령을 이유로 해산 명령을 받았다. 공산당 지도자들이 터키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정당의 활동이 헌법적 체제를 훼손한다는 정부의 판단만으로는 결사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 특히 정당은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의 작동을 보장하는 데 본질적 역할을 하는 만큼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더욱 보호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터키 영토의 일부를 쿠르드족의 땅으로 지칭하며 쿠르드노동자당의 무장 활동을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처벌당한 언론인의 제소에 대해서도 이 재판소는 “개인의 의견을 주장했을 뿐이고 즉각 무장저항에 나서도록 설득하려 한 의도도 없는 만큼, 이 기사는 쿠르드족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언론의 자유와 정보 접근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출처: 한겨레21 200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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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치적 의견은 토론의 시장에서 정화된다”
▣ 노트러데임(미국)=박용현/ 한겨레 편집부 기자 piao@hani.co.kr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싼 법리 논쟁이 갈수록 볼만하다. 외국에서 바라보니 더욱 그렇고, 미국 로스쿨에서 법의 잣대를 들고 보자니 더더욱 그렇다. 그 점입가경의 극치는 역시 ‘광화문 인공기’나 ‘주체사상연구소’식의 자극성 상황 설정과,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이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는 호들갑이다.
알카에다도 의견 낼 수 있어
미국 인디애나주 노트러데임대학 로스쿨 교수인 리처드 가넷에게 이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하찮은 논란에 불과한 듯했다. 그는 “미국엔 특정 이념을 선전•선동하거나 적국을 찬양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표현•언론•집회의 자유 등을 규정한 수정헌법 제1조는 일개 헌법 조항인데도 독자적인 법 과목을 이룰 정도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 수정헌법 제1조 아래에선, 9•11 동시다발 테러의 참혹한 악몽에도 불구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거나 알카에다에 단순 가입하는 사람조차 처벌할 수 없다는 게 가넷 교수의 설명이다. “현행법에서는 테러단체를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행위에 이르러서야 처벌이 가능합니다.” 이는 이론상의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 이슬람교도들을 향해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미국인을 살해하라”고 지시하는 빈 라덴의 ‘세계이슬람전선 성명’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녀도 이를 문제 삼은 적이 없다. 인권단체와 일부 로스쿨 교수들은 ‘물질적 지원 금지’에 대해 “테러단체로 지목된 단체들도 각종 합법적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만큼 일괄적으로 기부나 원조 행위를 금지해선 안 된다”며 이마저도 지나친 규제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달 초 미국 캔자스주 항소법원에서는 테러에 대한 공포와 개인의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는 미국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판결이 있었다. 평소 빈 라덴을 찬양하고 “미국인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한 이란인 노동자가 9•11 1주년 직후 미국인 동료들에게 “닷새 뒤 미국 전역에 테러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미국을 비판하고 빈 라덴에 대한 지지를 밝힐 권리는 그야말로 보호된다”며 “그러나 마치 임박한 테러에 자신도 가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로써 여성 동료가 불안해서 울 정도로 만든 것은 정치적 의견 표명이 아닌 폭언에 해당한다”고 유죄 이유를 밝혔다. 재판의 초점은 ‘말의 내용이나 관점’이 아니었다. 이 이란인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 판결은 9•11 이후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테러 공포증의 민감도를 말해주는 한편, 그럼에도 정치적 의견의 표명에 그치는 한 어떤 말도 법적인 제재를 받지 않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9 11 이후 미국 정부는 이른바 ‘애국자법’을 통해 테러수사 기관에 지나친 정보 수집 권한을 줌으로써 개인의 사생활을 위협하는가 하면 아랍계 외국인에 대한 차별 강화, 테러 용의자의 변호인 접견권 불허 등으로 인권 상황을 급속히 악화시켜왔다. 이란•콩고•파키스탄 등과 더불어 미성년자까지 사형에 처하는 8개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은 사실 인권에 관한 한 선진국으로 볼 수도 없다.
브란덴버그 기준… 정부 협박한 KKK 인정
그러나 9•11 이후에도 의견과 그 표현을 처벌하는 법만은 만들지 않고 있다. 이는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처벌해야 할 표현의 범위에 대해 확고한 법적 기준을 형성해왔고, 이 기준을 넘어 법을 만들 경우 연방대법원에 의해 위헌으로 판명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중 국내에도 잘 알려진 것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기준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 대상자들에게 징집 거부를 촉구하는 우편물을 발송한 혐의로 미국 사회당 사무총장이 기소된 사건에서 홈즈 연방대법관은 “어떤 의견 표현이 행해지는 상황이나 그 성질로 보아 실질적인 해악을 가져올 것이라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발생하느냐 여부”를 처벌 기준으로 제시했다.
이 기준은 국내에서도 국가보안법 사건 변호인들에 의해 종종 인용되곤 한다. 국가보안법에 걸리면 명백한 위험을 일으키지 않는 행위도 처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행위조차 처벌해야 한다고 보는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이 이 기준을 받아들일 리 없다. 이들은 거의 1세기 전, 그것도 전쟁의 와중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이 그려놓은 표현의 한계선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기준은 이후 홈즈 대법관을 표현의 자유의 대명사로 만들면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보호막이 되지는 못했다. 1950년대 매카시즘에 휩쓸려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소된 이들에게 대대적인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미국 법원은 다시 표현의 자유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69년에 나온 브란덴버그 사건 판결이다. 무장한 KKK(극우 백인단체) 단원들이 모여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정부 요인에 대한 보복도 불사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집회를 다룬 이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비록 폭력이나 불법적인 수단의 사용을 옹호하는 말일지라도, 즉각적인 불법 행위를 선동해서 그런 사태가 실제로 벌어질 만한 상황이 아닌 한 금지돼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이 정도 기준에 이르면, 한총련을 비롯한 국내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거의 대부분 무죄로 기울 게 분명하다.
예를 들어 폭력에 의한 정부의 전복을 주장하더라도 이른 시일 안에 봉기에 나설 것을 선동하고 그런 결과가 곧 예견되지 않는 한 그런 주장은 허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사상의 자유 시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토론할 시간적 여유만 주어진다면 위험한 생각도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충분히 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질서는 처벌의 공포만으로 지켜지지 않으며, 사회의 안전으로 가는 길은 불만과 대안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의 기회 속에 놓여 있다”라는 게 연방대법원의 철학이다.
브란덴버그 기준은 이후 베트남전 당시의 반전시위 사건을 비롯해 모든 불법 행위 선동 사건의 처벌 기준으로 확고히 유지돼오고 있으며, 수정헌법 제1조 교과서에서 첫 판례로 소개하고 있다.
미국 역사에서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과도하게 침해받아왔는지를 연구한 책 <위험한 시대>를 이달 출간한 조프리 스톤 시카고대학 로스쿨 교수는 “브란덴버그 기준이야말로 의견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기 위해 우리가 감내해야 할 최대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는 “반대쪽 의견에 대해 관용하고 자문해보는 태도를 버린다면, 우리는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싸우는 꼴이 될 것”이라면서 “미국 법원은 과거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었고, 앞으로는 안보상 필요성에 따른 표현의 자유 제한을 더욱더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9 11 테러도 ‘표현의 자유’ 꺾지 못해
미국 내에는 이런 기준을 달갑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다수 여론은 굳건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표현의 자유 침해를 감시하는 시민단체인 퍼스트어멘드먼트센터가 내놓은 올해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 보장이 지나치다”는 대답은 조사 대상자 1002명 중 30%에 그친 반면 65%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9•11 테러의 충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2년 전 조사에서도 안보를 위해 표현의 자유를 더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은 과반을 넘지 못했다.
다시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국가보안법 존치론자들은 안보 불안 심리를 부추기느라 여념이 없고 반대편에선 법을 고쳐도 처벌할 건 다 처벌할 수 있다는 논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침해해온 권리는 무엇이고 앞으로 이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는 정작 전면에 떠오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법원을 비롯한 법조계에서는 형법 대체안의 처벌 기준이 모호하고 또 다른 남용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법이 바뀐 뒤에도 죄명만 바뀐 채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여전히 구속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기준을 찾는 적극적인 논의가 시급한 시점이다.
어쩌면 이는 민주주의의 원형을 회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도 ‘이세고리아’라는 표현의 자유 개념이 확고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이세고리아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체제의 근본적 차이는 아테네에서는 스파르타 체제를 찬양할 자유가 있지만, 스파르타에서는 스파르타 이외의 체제를 찬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2300년이 지난 시대에 살고 있다.
유럽, 아시아, 전세계 어디서나… ‘브란덴버그 기준’ 수준의 표현의 자유 보장이 미국만의 것은 아니다. 지난 1995년 국제법 전문가들이 국가 안보와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면밀히 논의한 결과 채택한 ‘요하네스버그 원칙’도 그와 비슷한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 원칙은 이후 유엔의 공인을 받았다.
이 원칙 제1조는 국가 안보의 필요성에 따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더라도 △그 표현이 심각한 위협을 줄 때 △국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제한만 가해야 하며 △그 제한은 민주적인 원칙에 부합해야 한다는 전제를 규정하고 있다. 특히 표현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선 그 표현이 △즉각적인 불법 행위 선동을 의도했고 △그런 불법 행위를 유발할 것 같으며 △그 표현과 불법 행위의 발생 가능성 사이에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세 가지 사실을 정부가 증명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이런 기준은 단지 이론적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많은 나라에서 이미 법적인 원칙으로 자리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선진국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인도 대법원은 이미 지난 1989년 제한할 수 있는 표현의 범위를 이렇게 판시했다. “표현 행위가 유발할 것으로 예상되는 위험이 시간적으로 먼 일이거나 단지 추측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그 표현과 직접적이고 근접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마치 화약통 속의 스파크처럼, 의도하는 행위를 일으킬 만한 표현이어야 한다.” 나이지리아 대법원의 1983년 판결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폭력에 의한 체제 전복 선동으로부터 우리의 공동체를 지킬 중요성이 커질수록,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 또한 더욱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야만 정부가 국민의 뜻에 책임을 지는 것이고 국민이 바라는 변화를 평화적으로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이 가입해 있는 유럽인권재판소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사건이 자주 다뤄지는데, 역시 엄격한 잣대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고 있다.
쿠르드족이 무장투쟁 등 강력한 분리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는 터키에서, 지난 1989년 정부의 쿠르드족 탄압 중단과 쿠르드족의 자유 의지에 근거한 평화적 해결 등을 주장하며 창당된 공산당이 그 강령을 이유로 해산 명령을 받았다. 공산당 지도자들이 터키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정당의 활동이 헌법적 체제를 훼손한다는 정부의 판단만으로는 결사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 특히 정당은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의 작동을 보장하는 데 본질적 역할을 하는 만큼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더욱 보호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터키 영토의 일부를 쿠르드족의 땅으로 지칭하며 쿠르드노동자당의 무장 활동을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처벌당한 언론인의 제소에 대해서도 이 재판소는 “개인의 의견을 주장했을 뿐이고 즉각 무장저항에 나서도록 설득하려 한 의도도 없는 만큼, 이 기사는 쿠르드족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언론의 자유와 정보 접근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출처: 한겨레21 200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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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폭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아 양심이 있느냐?
개봉 전의 기대치를 보려고 왔건만, 이런 영화를 왜 만드느냐, 5.18이 모래시계나 기타등등 많이 만들어졌는데 돈벌려고 또 만드냐, 폭동을 미화하느냐 등등등 개쓰레기만도 못한 글들이 수두룩하구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독재정부가 쿠데타를 인정 못하는 주민을 학살한 것이다. 그리고 더 참혹한 사실은 내가 대학생이 되기 전에 5.18이 뭔지도 얼마나 죽었는지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깡촌 시골학교에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선생님이 외우라는 것은 열심히 외웠고 필요없다는 것은 한 자도 읽지 않았다. 아프리카 여러나라의 주요 수출품을 외우고,수천년전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년도를 외웠다. 땅속 광석들의 종류를 구분하고, 농업시간엔 젖소나 돼지의 임신기간도 외웠다. 하지만 내가 아기일때 이나라에서 수백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다쳤다는 역사는 말하지 않더라.. 폭동인지 투쟁인지 내가 판단할 일인데 나이든 국사선생님은 알 필요조차 없다고 느끼셨나 보다. 고교졸업후 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당시 맞아가며 수년동안 외웠던 암기사항들은 전혀 기억에도 없지만, 대학신입생때 잠깐 배운 5.18의 슬픔은 내게 지식으로 남았다.
요즘도 많은 이들이 북한을 욕하고 일본을 욕하고 남미,아프리카를 비웃는다. 북한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켰고, 일본은 타국을 괴롭히고도 반성이나 사과할 줄 모르며, 아프리카,남미는 끝없는 내전으로 서로를 죽여가며 기아에 허덕이는 한심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웃음과 비난을 날리는 사람들 중에 더한 인간들이 있다.
북한이나 일본으로부터 자신과 국가를 지켜달라며 믿음과 세금을 보냈지만, 주적 김일성과 오십보 백보인 대머리 인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오히려 지켜야 할 대상을 죽이는 일을 벌이고도 반성을 모르는 인간들이다.
북한을 동족을 죽인 빨갱이라면서 자기도 동족을 죽이고 일본이 제대로된 사과를 안한다면서 그들은 사과조차도 없고 지금도 빨갱이폭도이라 매도하며, 제3세계의 가난한 내전국을 비웃으며 우리나라도 그런 참혹한 살육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을 욕하고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바라기 전에 우리부터가 당당해야 하지만, 친일파와 군부의 남은 찌꺼기들은 끝까지 똥칠을 하고 있다.
더이상 폭동이나 간첩들의 음모니 떠들어서 다른 나라들이 비웃을 추잡한 짓거리를 하지말자. 이건 아이들에게 숨기고 이웃나라에 숨기고 자신에게도 숨길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라, 무력과 폭압에도 죽음으로 맞선 자랑스런 역사다. 다른 나라같으면 자랑할 역사를 스스로 지우고 깍아내리고 욕하기 바쁘니 얼마나 추한가. 일본이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문제나 난징학살을 지웠다고 욕하기 전에 우리의 역사나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스스로의 과오를 청산하지 못하는 민족이 타민족의 사과를 바라는 건 넌센스다. 독일은 학살자로서의 과거를 눈물로 사과하고, 파시즘에 반대하다 고문과 노역,살인으로 숨진 열사를 기리며, 경제적 마이너스를 알면서도 통일을 이룩했다. 일본이 독일처럼 못한다고 욕하기 전에 우리부터 독일의 장점을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은 물론 제3세계 가난한 국가들도 억압과 파시즘, 군사독재, 이념의 충돌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탈이데올로기로 발전해 가는데, 아직도 암흑시대를 그리워하고 과거를 조작하기 바쁜 쓰레기들이 한국에 발로 차일 정도로 넘쳐난다는게 정말 부끄럽고 답답하다.
의경복무시절 상관이신 경찰관 중에 특수부대원으로 광주에 계셨던 분이 있었다. 당시의 이야기를 하는 걸 꺼려하셔서 자세한 얘기는 못했지만 네이버의 쓰레기들처럼 폭도니 빨갱이니 하는 소리는 없더라. 그 자리에서 피흘리고 동료가 죽어가는 현장에 계신 분도 말이 없는데, 빈깡통이 요란하다고 경험도 지식도 인격도 모자란 놈들이 더 설치는게 아닌가 한다.
40대면 불혹이고 50이면 지천명의 나이다. 인터넷 익명성의 편의아래 개똥보다 못한 지저분한 생각들을 배설물처럼 쏟아내지말고, 인간적인 글들을 남겨서 인생의 후배들을 감동시키는 건 못하는가?
이제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적은 분들이시여... 누군가들 비난하고 깍아내리고 욕하는데 남은 인생과 열정을 쏟기에는 아까운 시간이 아닌가? 죽을 때까지 누구를 비하하고 당신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 분노해서 자신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건가? 기성세대로서의 존경을 나이로만 받으려 말고 쌓여진 주옥같은 지식과 인생의 철학들로 받으려 노력하시길 바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다소 격양된 감정으로 쓴 두서없는 글이 메인리뷰에 오르니 많이 쑥스럽습니다.
지우고 싶은 생각도 들고 과격한 표현들을 고치고 싶기도 하지만 왠지 자신을 속이는 듯 싶어서 그냥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역사는 외우는게 아니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가기위해 공무원이 되기위해 억지로 외워야 하는 암기사항도 아니어야 하며, 자신의 해박함과 암기력을 자랑하기 위한 지식이 되어서도 안되죠.
이순신장군도 자신의 이긴 전투의 횟수가 몇번이고 대첩들의 순서와 위치, 격파한 일본의 함선이 몇척인지를 달달 외우며 암기하기를 바라시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기를 원하시지도 않겠죠. 다만 자신과 조선의 민초들이 격은 고통과 맞써 싸운 용기들을 가슴속에 담고 있기를 바라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5.18의 열사와 희생자들도 자신들이 영웅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진 않으리라 생각하네요. 다만 그들의 용기와 마지막까지 잃지 않았던 희망들을 잊지 말고 기억해 주기를 바라리라 믿습니다.
그날의 광주에 있었던 민간인도 시민군도 군인도 모두가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혼돈과 공포, 슬픔과 희망을 지금의 후세들과 비경험자들이 느끼지도 완전히 알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매일같이 기억하고 공부할 수도 없죠. 하지만 절대로 잊지만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네이버 영화리뷰에 와서 멋진 글, 재밌는 글, 웃기는 글들을 찾으며 영화의 오락성을 많이 추구했고 장난같은 댓글과 리뷰를 가끔씩 쓰면서 혼자 좋아하며 여흥처럼 이용했었네요.
하지만 "화려한 휴가" 에서는 그런 오락과 재미만을 추구할 수는 없었고 결국 타인들의 독설을 독설로 대응하는 미숙함을 보이며 제가 잊고 있었던 생각들을 적었습니다.
쪽지까지 보내주신 어느 분의 말씀처럼 "화려한 휴가"가 역사와 진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걸,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걸 보여줬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왜곡된 현대사와 과오들이 수정되고, 서로를 미워하고 새로운 갈등을 만드는 그릇된 사회구조가 사라질 수 있도록 새로운 세대인 우리들이 지역과 정치관을 넘어서 서로 노력했으면 합니다.
(많은 추천과 댓글 감사드리며. 다른 역사관과 정치관을 가지신 분들을 심하게 모욕한 점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
출처: 네이버 영화 네티즌 리뷰 natural200 님의 글 (관련영화: 화려한 휴가) [원문]
인정할 건 인정하자. 독재정부가 쿠데타를 인정 못하는 주민을 학살한 것이다. 그리고 더 참혹한 사실은 내가 대학생이 되기 전에 5.18이 뭔지도 얼마나 죽었는지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깡촌 시골학교에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선생님이 외우라는 것은 열심히 외웠고 필요없다는 것은 한 자도 읽지 않았다. 아프리카 여러나라의 주요 수출품을 외우고,수천년전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년도를 외웠다. 땅속 광석들의 종류를 구분하고, 농업시간엔 젖소나 돼지의 임신기간도 외웠다. 하지만 내가 아기일때 이나라에서 수백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다쳤다는 역사는 말하지 않더라.. 폭동인지 투쟁인지 내가 판단할 일인데 나이든 국사선생님은 알 필요조차 없다고 느끼셨나 보다. 고교졸업후 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당시 맞아가며 수년동안 외웠던 암기사항들은 전혀 기억에도 없지만, 대학신입생때 잠깐 배운 5.18의 슬픔은 내게 지식으로 남았다.
요즘도 많은 이들이 북한을 욕하고 일본을 욕하고 남미,아프리카를 비웃는다. 북한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켰고, 일본은 타국을 괴롭히고도 반성이나 사과할 줄 모르며, 아프리카,남미는 끝없는 내전으로 서로를 죽여가며 기아에 허덕이는 한심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웃음과 비난을 날리는 사람들 중에 더한 인간들이 있다.
북한이나 일본으로부터 자신과 국가를 지켜달라며 믿음과 세금을 보냈지만, 주적 김일성과 오십보 백보인 대머리 인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오히려 지켜야 할 대상을 죽이는 일을 벌이고도 반성을 모르는 인간들이다.
북한을 동족을 죽인 빨갱이라면서 자기도 동족을 죽이고 일본이 제대로된 사과를 안한다면서 그들은 사과조차도 없고 지금도 빨갱이폭도이라 매도하며, 제3세계의 가난한 내전국을 비웃으며 우리나라도 그런 참혹한 살육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을 욕하고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바라기 전에 우리부터가 당당해야 하지만, 친일파와 군부의 남은 찌꺼기들은 끝까지 똥칠을 하고 있다.
더이상 폭동이나 간첩들의 음모니 떠들어서 다른 나라들이 비웃을 추잡한 짓거리를 하지말자. 이건 아이들에게 숨기고 이웃나라에 숨기고 자신에게도 숨길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라, 무력과 폭압에도 죽음으로 맞선 자랑스런 역사다. 다른 나라같으면 자랑할 역사를 스스로 지우고 깍아내리고 욕하기 바쁘니 얼마나 추한가. 일본이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문제나 난징학살을 지웠다고 욕하기 전에 우리의 역사나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스스로의 과오를 청산하지 못하는 민족이 타민족의 사과를 바라는 건 넌센스다. 독일은 학살자로서의 과거를 눈물로 사과하고, 파시즘에 반대하다 고문과 노역,살인으로 숨진 열사를 기리며, 경제적 마이너스를 알면서도 통일을 이룩했다. 일본이 독일처럼 못한다고 욕하기 전에 우리부터 독일의 장점을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은 물론 제3세계 가난한 국가들도 억압과 파시즘, 군사독재, 이념의 충돌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탈이데올로기로 발전해 가는데, 아직도 암흑시대를 그리워하고 과거를 조작하기 바쁜 쓰레기들이 한국에 발로 차일 정도로 넘쳐난다는게 정말 부끄럽고 답답하다.
의경복무시절 상관이신 경찰관 중에 특수부대원으로 광주에 계셨던 분이 있었다. 당시의 이야기를 하는 걸 꺼려하셔서 자세한 얘기는 못했지만 네이버의 쓰레기들처럼 폭도니 빨갱이니 하는 소리는 없더라. 그 자리에서 피흘리고 동료가 죽어가는 현장에 계신 분도 말이 없는데, 빈깡통이 요란하다고 경험도 지식도 인격도 모자란 놈들이 더 설치는게 아닌가 한다.
40대면 불혹이고 50이면 지천명의 나이다. 인터넷 익명성의 편의아래 개똥보다 못한 지저분한 생각들을 배설물처럼 쏟아내지말고, 인간적인 글들을 남겨서 인생의 후배들을 감동시키는 건 못하는가?
이제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적은 분들이시여... 누군가들 비난하고 깍아내리고 욕하는데 남은 인생과 열정을 쏟기에는 아까운 시간이 아닌가? 죽을 때까지 누구를 비하하고 당신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 분노해서 자신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건가? 기성세대로서의 존경을 나이로만 받으려 말고 쌓여진 주옥같은 지식과 인생의 철학들로 받으려 노력하시길 바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다소 격양된 감정으로 쓴 두서없는 글이 메인리뷰에 오르니 많이 쑥스럽습니다.
지우고 싶은 생각도 들고 과격한 표현들을 고치고 싶기도 하지만 왠지 자신을 속이는 듯 싶어서 그냥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역사는 외우는게 아니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 가기위해 공무원이 되기위해 억지로 외워야 하는 암기사항도 아니어야 하며, 자신의 해박함과 암기력을 자랑하기 위한 지식이 되어서도 안되죠.
이순신장군도 자신의 이긴 전투의 횟수가 몇번이고 대첩들의 순서와 위치, 격파한 일본의 함선이 몇척인지를 달달 외우며 암기하기를 바라시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기를 원하시지도 않겠죠. 다만 자신과 조선의 민초들이 격은 고통과 맞써 싸운 용기들을 가슴속에 담고 있기를 바라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5.18의 열사와 희생자들도 자신들이 영웅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진 않으리라 생각하네요. 다만 그들의 용기와 마지막까지 잃지 않았던 희망들을 잊지 말고 기억해 주기를 바라리라 믿습니다.
그날의 광주에 있었던 민간인도 시민군도 군인도 모두가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혼돈과 공포, 슬픔과 희망을 지금의 후세들과 비경험자들이 느끼지도 완전히 알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매일같이 기억하고 공부할 수도 없죠. 하지만 절대로 잊지만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네이버 영화리뷰에 와서 멋진 글, 재밌는 글, 웃기는 글들을 찾으며 영화의 오락성을 많이 추구했고 장난같은 댓글과 리뷰를 가끔씩 쓰면서 혼자 좋아하며 여흥처럼 이용했었네요.
하지만 "화려한 휴가" 에서는 그런 오락과 재미만을 추구할 수는 없었고 결국 타인들의 독설을 독설로 대응하는 미숙함을 보이며 제가 잊고 있었던 생각들을 적었습니다.
쪽지까지 보내주신 어느 분의 말씀처럼 "화려한 휴가"가 역사와 진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걸,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걸 보여줬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왜곡된 현대사와 과오들이 수정되고, 서로를 미워하고 새로운 갈등을 만드는 그릇된 사회구조가 사라질 수 있도록 새로운 세대인 우리들이 지역과 정치관을 넘어서 서로 노력했으면 합니다.
(많은 추천과 댓글 감사드리며. 다른 역사관과 정치관을 가지신 분들을 심하게 모욕한 점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
출처: 네이버 영화 네티즌 리뷰 natural200 님의 글 (관련영화: 화려한 휴가) [원문]
한국 양극화 OECD 세번째로 커…사회보장 지출은 꼴찌
OECD 20개국 조사결과 보고서 발표
“상대빈곤율 높아지는데 복지지출 낮다” 우려
소득 격차에 따른 한국의 양극화가 세계적으로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19일(현지시각)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07년 고용전망 보고서’를 보면, 조사 대상 회원국(20개국) 가운데 한국은 소득 격차가 세 번째로 큰 나라로 드러났다.
이 기구는 상용직 임금생활자의 하위 10% 계층에 견줘 상위 10%의 평균소득이 얼마나 많은지를 나타내는 소득 10분위 배율을 통해 격차 정도를 평가했다. 이 조사에서 한국은 2005년 소득 10분위 배율이 4.51로, 헝가리(5.63)·미국(4.86) 다음으로 높았다.
한국은 또 1995년부터 10년 동안 소득 격차가 많이 벌어진 대표적 나라로 꼽혔다. 이 기간 한국의 소득 10분위 배율은 3.64에서 0.87이나 늘었다. 한국은 헝가리(1.67)와 폴란드(0.91)에 이어 세 번째로 격차가 심해졌다.
노르웨이(2.21)·스웨덴(2.33)·핀란드(2.42) 등 북구 쪽은 소득 격차가 가장 덜한 나라로 조사됐다. 조사 대상국 가운데 아일랜드(3.57)와 스페인(3.53)만 지난 10년 동안 소득 격차가 줄어들었다.
이 보고서는 한국이 멕시코·터키와 더불어 “사회 안전망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나라”라고 지적했다. 특히, 한국은 2003년 일반세의 사회보장 부문 사용비율이 3%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국 가운데 꼴찌이며, 평균 43%에 크게 못미쳤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적 비용의 규모가 10% 미만인 나라는 한국과 멕시코뿐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는 또 20일 발표한 ‘한국경제 보고서’에서 최근 들어 한국의 상대빈곤율(가처분소득이 중간계층 소득의 50% 미만)이 크게 늘고 있는데도 사회복지 지출이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는 점을 우려했다. 보고서는 90년대 중반 9%던 한국의 상대빈곤율이 2000년대 들어 급속하게 높아져 이 기구 평균치(10%대 초반)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며, 공적부조 수혜대상을 더 확대해 최저생계비 수준의 소득을 확보하도록 돕는 게 시급하다고 권고했다.
한편, 고용전망 보고서는 세계화의 혜택이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소득 격차와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무역·투자 개방 정책이 전세계 생활수준을 향상시켰다”면서도 “일부 노동자들은 세계화로부터 많은 것을 잃는다”고 짚었다. 조사 대상국의 생산성은 지난 2년 동안 평균 1.5% 늘어났지만, 1인당 실질임금은 2005년 0.6%, 2006년 1.2% 증가에 그쳤다.
이 보고서는 “기술·교통·통신의 발달과 중국·러시아·인도·브라질 등이 제공하는 값싼 노동력으로 세계 경제환경이 변화하고 있다”며, “회원국 정부가 고용과 임금 분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권고했다. 보고서는 또 회원국들이 자유무역을 활성화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노동조건 개선과 사회 안전망 확충을 통해 노동시장을 변화시키는 데도 앞장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외현 최우성 기자 oscar@hani.co.kr
출처: 한겨레신문 2007-06-21 오전 08:35:29 [원문]
누가 싸이에게 돌을 던지랴?
재입대의 악몽을 꾸었다.
탁현민 기자
이렇게 쓰고 싶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회 구석구석 물렁물렁한 곳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유독 준엄한 구석이 하나 있으니 바로 병역문제다.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징병의 나라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 병역문제는 어떤 사건, 사고 보다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누구든 비위의 대상으로 선정되는 순간 거의 '아작'이 난다.
군대 가는 것을 가슴 벅찬 신성한 병역의 의무라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고, 다들 제대하면 오줌도 그쪽으로 안 싼다고 이를 박박 갈면서 제대하고, 제대해서 몇 년 동안 잊지 않고 불러 모으는 예비군 훈련이 지겨워 죽겠는게 대부분의 남자들이다.
그렇게 가고 싶지 않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군대이건만, 누가 어찌어찌해서 면제라거나, 공익으로 빠졌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군대 안 갔다 오면 남자도 아니라느니,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국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느니, 애국심이 없다느니,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까닭을 참 모르겠다.
끌려갔다온 사람들이 안 간 사람들에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면제받거나 대체복무를 하게 된 사람들이 제대로 조국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못 가진 것이 안쓰러워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 가수 싸이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렇다.
검찰에서는 그가 애초의 대체복무 분야와 다른 일을 했고 그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고, 네티즌과 일반 여론은 모범을 보여야 할 연예인이 어떻게든 군대를 안 가려고 꼼수를 썼고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는 사실이 괘씸하다는 것인이다. 군대 갔다 왔고, 가기 싫은 예비군도 다녀왔고, 이제 민방위 3년차에 접어든 입장에서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싸이에게 '다시 군대 가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아니 '일빵빵' 주특기 받고 '60미리' 메고 뛰어 다닐 수도 있는 일이고, 소총수로 왔다가 행정병으로 확 풀려 버릴 수도 있는 곳이 군대 아니었나? 제대로 근무를 안 했다는 것도, 그래 군대라는 곳이 풀리면 다행이고 꼬이면 에라 어떻게든 돌아가는 게 국방부 시계라고 믿으며 2년 2개월(지금은 2년인가) '뺑이 치는 곳' 아니었는가 말이다.
업무를 게을리 했다는 검찰의 엄숙한 발표는 그래, 솔직히 좀 뜨끔했다. 군대 있을 때 업무를 게을리 한 것이 문제라면 나도 어쩌면 다시 군대 생활을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상병 때까지는 병장 눈치 보여 그럭저럭 열심히 하는 '척' 했지만 병장 달면서부터는 어떻게든 짱 박히려 노력 했고, 제대를 앞두고는 '아. 세상에 가장 편한 것은 육군 병장 말 호봉'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업무 태도가 불량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나도 참 할 말이 없다.
그래 물론 이 나라에서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 모두 나나 싸이 같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은 한다. 정말 병역의무를 신성하게 생각하고, 하루하루 '충성'하며 열심히 생활하다 온 사람들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가기 싫고,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가서 그래도 적당히 사고치지 않고 시간 채워 나왔다면 그도 최소한의 의무는 다한 것이다. 아마도 주특기대로 복무하지 않았다고 땡땡이 쳤다고 다시 군대 가라면 아마도 다시 가야할 사람 적지 않을 것이고 기준이 그렇다면 병역비리수사는 전국적으로, 전 방위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네티즌과 여론의 감정은 이해가 가는 측면이 없지 않다. 나 역시 돌아서면 네티즌이고 여론의 한 부분이니 솔직히 "싸이, 그냥 제대로 갔다 오지 꼼수 쓰다가 잘 걸렸다"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근데 그게 솔직히 고백하자면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싸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거나 그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행해야할 사회적 도덕적 책무를 방기했기 때문에 분노해서는 아니더라.
누구는 '뺑이' 치고 삼년 썩었는데(사실 2년 2개월인데 왜들 꼭 삼년이라는지 모르겠다. 나도 마찬가지고) 누구는 군대 안가고 편하게(사실 편한지 아닌지도 잘 모르지만) 있으면서 그마저도 제대로 안했다니까 부아가 치밀어서 그런 것이었다.
글쎄, 내가 군대 있을 땐 '대체복무'라는 것이 없어서 그게 그렇게 편하고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이해하기에는 대체복무도 군대처럼 다 하기 싫고, 가기 싫은 것이지만 우리 사회가 좀 더 발전(?)하면서, 군대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게끔 만들어진 제도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대체복무'중에 제대로 일했느냐? 아니냐? 는 과정 중에 물어야 할 책임이지 제대, 아니 소집해제, 아니 퇴사? 여하튼 끝난 마당에 따질 일은 아닌 것 같다.
제대한지 10년도 넘은 내게 검찰이든 헌병대든 찾아와 '너 93년 복무 중에 사역 나간다고 하고서 PX에서 짱 박혔던 적 있지?' 조사하면 이런 젠장 나도 군대 다시 가야 되는 것이냐?
-- 덧붙히는 글
분명히 이런 분들 계실 것 같아 미리 말해두는데
싸이와는 반면식도 없는 사이다. 당연히 뭐 하나도 받아먹은 것 없다.
군대는, 열심히는 안했지만 여하튼 다들 그렇듯이 제대로 제대 했다.
애국심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은? 죄송스럽지만 그다지... 어쩌랴 먹고살기 고달픈데.
출처: 오마이뉴스 2007-06-21 08:54 (원문)
ⓒ 2007 OhmyNews
탁현민 기자
이렇게 쓰고 싶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회 구석구석 물렁물렁한 곳이 많은 대한민국에서 유독 준엄한 구석이 하나 있으니 바로 병역문제다.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징병의 나라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 병역문제는 어떤 사건, 사고 보다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누구든 비위의 대상으로 선정되는 순간 거의 '아작'이 난다.
군대 가는 것을 가슴 벅찬 신성한 병역의 의무라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고, 다들 제대하면 오줌도 그쪽으로 안 싼다고 이를 박박 갈면서 제대하고, 제대해서 몇 년 동안 잊지 않고 불러 모으는 예비군 훈련이 지겨워 죽겠는게 대부분의 남자들이다.
그렇게 가고 싶지 않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군대이건만, 누가 어찌어찌해서 면제라거나, 공익으로 빠졌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군대 안 갔다 오면 남자도 아니라느니,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국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느니, 애국심이 없다느니,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까닭을 참 모르겠다.
끌려갔다온 사람들이 안 간 사람들에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면제받거나 대체복무를 하게 된 사람들이 제대로 조국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못 가진 것이 안쓰러워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 가수 싸이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렇다.
검찰에서는 그가 애초의 대체복무 분야와 다른 일을 했고 그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고, 네티즌과 일반 여론은 모범을 보여야 할 연예인이 어떻게든 군대를 안 가려고 꼼수를 썼고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는 사실이 괘씸하다는 것인이다. 군대 갔다 왔고, 가기 싫은 예비군도 다녀왔고, 이제 민방위 3년차에 접어든 입장에서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싸이에게 '다시 군대 가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아니 '일빵빵' 주특기 받고 '60미리' 메고 뛰어 다닐 수도 있는 일이고, 소총수로 왔다가 행정병으로 확 풀려 버릴 수도 있는 곳이 군대 아니었나? 제대로 근무를 안 했다는 것도, 그래 군대라는 곳이 풀리면 다행이고 꼬이면 에라 어떻게든 돌아가는 게 국방부 시계라고 믿으며 2년 2개월(지금은 2년인가) '뺑이 치는 곳' 아니었는가 말이다.
업무를 게을리 했다는 검찰의 엄숙한 발표는 그래, 솔직히 좀 뜨끔했다. 군대 있을 때 업무를 게을리 한 것이 문제라면 나도 어쩌면 다시 군대 생활을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상병 때까지는 병장 눈치 보여 그럭저럭 열심히 하는 '척' 했지만 병장 달면서부터는 어떻게든 짱 박히려 노력 했고, 제대를 앞두고는 '아. 세상에 가장 편한 것은 육군 병장 말 호봉'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업무 태도가 불량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나도 참 할 말이 없다.
그래 물론 이 나라에서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 모두 나나 싸이 같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은 한다. 정말 병역의무를 신성하게 생각하고, 하루하루 '충성'하며 열심히 생활하다 온 사람들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가기 싫고,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가서 그래도 적당히 사고치지 않고 시간 채워 나왔다면 그도 최소한의 의무는 다한 것이다. 아마도 주특기대로 복무하지 않았다고 땡땡이 쳤다고 다시 군대 가라면 아마도 다시 가야할 사람 적지 않을 것이고 기준이 그렇다면 병역비리수사는 전국적으로, 전 방위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네티즌과 여론의 감정은 이해가 가는 측면이 없지 않다. 나 역시 돌아서면 네티즌이고 여론의 한 부분이니 솔직히 "싸이, 그냥 제대로 갔다 오지 꼼수 쓰다가 잘 걸렸다"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근데 그게 솔직히 고백하자면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싸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거나 그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이행해야할 사회적 도덕적 책무를 방기했기 때문에 분노해서는 아니더라.
누구는 '뺑이' 치고 삼년 썩었는데(사실 2년 2개월인데 왜들 꼭 삼년이라는지 모르겠다. 나도 마찬가지고) 누구는 군대 안가고 편하게(사실 편한지 아닌지도 잘 모르지만) 있으면서 그마저도 제대로 안했다니까 부아가 치밀어서 그런 것이었다.
글쎄, 내가 군대 있을 땐 '대체복무'라는 것이 없어서 그게 그렇게 편하고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이해하기에는 대체복무도 군대처럼 다 하기 싫고, 가기 싫은 것이지만 우리 사회가 좀 더 발전(?)하면서, 군대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게끔 만들어진 제도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대체복무'중에 제대로 일했느냐? 아니냐? 는 과정 중에 물어야 할 책임이지 제대, 아니 소집해제, 아니 퇴사? 여하튼 끝난 마당에 따질 일은 아닌 것 같다.
제대한지 10년도 넘은 내게 검찰이든 헌병대든 찾아와 '너 93년 복무 중에 사역 나간다고 하고서 PX에서 짱 박혔던 적 있지?' 조사하면 이런 젠장 나도 군대 다시 가야 되는 것이냐?
-- 덧붙히는 글
분명히 이런 분들 계실 것 같아 미리 말해두는데
싸이와는 반면식도 없는 사이다. 당연히 뭐 하나도 받아먹은 것 없다.
군대는, 열심히는 안했지만 여하튼 다들 그렇듯이 제대로 제대 했다.
애국심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은? 죄송스럽지만 그다지... 어쩌랴 먹고살기 고달픈데.
출처: 오마이뉴스 2007-06-21 08:54 (원문)
ⓒ 2007 OhmyNews
2007년 6월 16일 토요일
한국에서의 영웅, 그리고 빠순이
우리나라는 영웅을 키우지 못하는 사회라고들 한다. 그건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보는 성질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요즘 누구의 팬으로서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 '~빠'라고 말하며, 그 말이 객관적인지 아닌지는 무시되기 일쑤이다.
실제 우리나라 사람이 그런지,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는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자. 누군가가 자기는 누구를 (또는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을 했을 때, 그 대상(사람이든 아니든)에 대해 흠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완벽한 건 없으므로). 그리고 (실제로 자기가 좋아하는 게 있든 없든) 자기가 좋아하는 건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을 비판하는 측은, 최소한 말싸움에서는 우위에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에게는 공격 대상이 되는 약점이 없으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그걸 왜 하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그걸 왜 좋아하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묻고 싶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냐?', '너는 무엇을 좋아하냐?'
정치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국민들이 가진 가장 흔한 태도가, 정치를 욕하면서 양비론, 냉소주의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도 우리나라의 정치가 바람직하고, 정치가들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팔짱끼고 멀찌감치 서서 혀만 차고 있으면 나아지는 것이 무엇일까? (쿨하게 보일 수 있나?) 더구나 정치의 결과는 결국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계급만을 위하는 정치가가 있다면, 그런 정치가가 원하는 정치에 대한 시선은 바로 위와 같은 냉소주의일 것이다 (국민들이 누가 자기를 위해 정치를 하는가 열심히 생각하면, 표로써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자기가 권력을 잡을 수 없을 게 자명하므로).
'오십 보 백 보'라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속담이나 격언이 있다고 해서, 그 속에 담긴 논리가 전부 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다 (비유 등의 수사법도 다 해당, 숨겨진 핵심을 짚어내거나 어떤 것을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참인 건 아니다). 모든 정치가가 못하더라도 조금 덜 못하는 사람을 지지해주자. 그리고 수준이 낮다고 냉소주의로 무관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최소한의 실천(투표)을 하자. K리그가 외국 빅리그에 비해 수준이 낮다 해서 특별히 손해볼 건 없지만, 정치가 수준이 낮으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ps. 난 정치가 중에서는 김근태를 좋아하고, 그런 사람(요령은 부족하지만 양심과 굳은 신념을 가진)이 크게 될 수 없는 우리나라가 안타깝다.
실제 우리나라 사람이 그런지,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는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자. 누군가가 자기는 누구를 (또는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을 했을 때, 그 대상(사람이든 아니든)에 대해 흠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완벽한 건 없으므로). 그리고 (실제로 자기가 좋아하는 게 있든 없든) 자기가 좋아하는 건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을 비판하는 측은, 최소한 말싸움에서는 우위에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에게는 공격 대상이 되는 약점이 없으므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그걸 왜 하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그걸 왜 좋아하냐'라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묻고 싶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냐?', '너는 무엇을 좋아하냐?'
정치에 대해서도 비슷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국민들이 가진 가장 흔한 태도가, 정치를 욕하면서 양비론, 냉소주의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나도 우리나라의 정치가 바람직하고, 정치가들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팔짱끼고 멀찌감치 서서 혀만 차고 있으면 나아지는 것이 무엇일까? (쿨하게 보일 수 있나?) 더구나 정치의 결과는 결국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계급만을 위하는 정치가가 있다면, 그런 정치가가 원하는 정치에 대한 시선은 바로 위와 같은 냉소주의일 것이다 (국민들이 누가 자기를 위해 정치를 하는가 열심히 생각하면, 표로써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자기가 권력을 잡을 수 없을 게 자명하므로).
'오십 보 백 보'라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속담이나 격언이 있다고 해서, 그 속에 담긴 논리가 전부 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다 (비유 등의 수사법도 다 해당, 숨겨진 핵심을 짚어내거나 어떤 것을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참인 건 아니다). 모든 정치가가 못하더라도 조금 덜 못하는 사람을 지지해주자. 그리고 수준이 낮다고 냉소주의로 무관심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최소한의 실천(투표)을 하자. K리그가 외국 빅리그에 비해 수준이 낮다 해서 특별히 손해볼 건 없지만, 정치가 수준이 낮으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ps. 난 정치가 중에서는 김근태를 좋아하고, 그런 사람(요령은 부족하지만 양심과 굳은 신념을 가진)이 크게 될 수 없는 우리나라가 안타깝다.
2007년 6월 12일 화요일
스크랩) 교주님과 근대성의 역학!
교주님과 근대성의 역학!
[한겨레]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국과 일본의 많은 지성인들은 왜 그토록 ‘종교적 전제왕국’의 환상에 쉽게 빠지는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수년 전 필자가 한국의 한 대학에서 공부했을 때 유독 눈에 띈 것은 학생회관 내 어느 방에 걸려 있던 ‘하늘과 땅’이란 현수막이었다.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로서 결례를 무릅쓰고 들어가서 인사를 청했다. 나중에 그곳이 어떤 신흥종교에 열정을 바치는 동아리란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 모르는 새 종교가 여기에 있구나! 새로운 발견을 한 기분으로 필자는 그 학생들을 사귀었고 그 교주를 알현하기까지 되었다.
한 교주의 빌라에서 충격을 받다
굿당들이 많은 산에 위치했던 교주의 빌라에서 필자는 그날 충격을 받았다. 짧은 치마를 입은 젊은 여자들에 둘러싸인 교주가 ‘말씀’을 하면 “네, 선생님!”을 연발했던 신도들의 얼굴 표정도 “문선명에게 늙은이밖에 안 남았는데, 우리 식구들은 젊은 피가 많아!”와 같은 ‘교세 자랑’도 충격이었다. 지금 그 교단의 정확한 명칭도 기억할 수 없지만, 전도 유망해 보이던 학우들이 왜 그 ‘선생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됐는지 그 교단으로 가게 만든 이유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남아 있었다.
몇 개월 뒤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어느 종말론적 선교회의 선교사와 만난 일이 있었다. 1992년 10월28일이 되면 세계사가 끝이 나고 믿는 자만이 허공으로 들려 올라갈 수 있다는 예언을 위주로 설교하는 부부 선교사였는데 그 남편은 원래 대기업의 사원이었다.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거쳐간 사람이 갑자기 광신으로 뭉친 소집단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뒤 1992년 10월28일 시한부종말론에 대한 신문 보도를 읽었을 때 이장림 목사에게 현혹돼 전 재산을 바치는 등 극단적인 신앙 행위를 벌인 2만여명 중 공무원·교사·기업체 간부 등 고학력 중산층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금이라도 비판 정신을 가진다면 곧 허구성이 드러나는 한 개인의 종교적인 환상을 고학력자들이 어떻게 절대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 동아시아의 ‘중산층 신형 신흥종교’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계기는 1995년 3월20일의 도쿄 지하철 독가스 살포 사건이었다. 이 가스 제조의 책임을 맡은 화학 석사나 옴진리교를 위해 러시아에서 무기 구입을 한 오사카대학교 출신의 젊은 건축가,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가 재판을 받았음에도 꾸준히 믿었던 도쿄대학교 박사과정 출신의 인류학자 등 젊은 지성인들은 어떻게 해서 “문선명과 창가학회(創價學會·일본의 대표적인 불교적 신흥종교)의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회장이 유대인 조직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일본인들을 말살하려고 한다”는 난센스를 믿고 대량 살인을 ‘정당한 방어’로 믿게 됐는가? 물론 일본 국내의 교도들은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의 극소수에 불과하며, 영계·환생에 대한 괴설로 유명(?)한 도쿄대 법학부 출신 오가와 류호(大川隆法)의 ‘행복의 과학’ 등과 같은 고학력 중산층 위주의 ‘신형 신흥종교’들도 수만명 이상의 고정 신도를 모을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상당수 대학생들이 한번쯤 옴진리교·행복의 과학 유의 말세론적·유사(類似)밀교적·카리스마적 리더 숭배 중심의 ‘신형 신흥종교’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었고, ‘교주 말씀’이라면 범죄까지도 서슴지 않을 만큼 ‘개인 숭배’가 태심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윗 사람에 대한 맹종문화’가 토양
아시아에서 근대적이라 할 일본이나 한국에서 어떻게 해서 지성인들까지 빨아들일 수 있는 ‘전제왕국’들이 생겨날 수 있는가? 이 현상이 동아시아 근대성의 본질적인 문제들과 연관은 없는가? 근대 초기의 ‘고전적인’ 신흥종교- 예컨대 한국의 동학이나 일본의 천리교(天理敎)와 같은 민중 본위적인 종교운동- 들이 전통 질서의 밑으로부터의 와해와 대안적 미래의 열망을 반영했다면, 기독교·불교의 요소를 종말론·환생론에 자의적으로 갖다붙이는 식의 1970년대 이후의 ‘신형 신흥종교’들은 근대의 무엇을 반영하는 것인가? 일본이 제도적으로는 근대화됐지만 근대성의 기본 요소인 개인의 도덕적 주체성을 끝내 가져보지 못했다는 전후 일본의 진보적 사상계의 주역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96)의 뼈아픈 지적을 보자. 서구에서는 주체적인 개인의 탄생이 이루어졌다는 마사오의 의견에 그대로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한국도 아직도 끝까지 탈피하지 못한 권위주의적 근대화의 ‘메이지 모델’이 주체적 개인의 탄생을 극단적으로 방해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설교문 테이프를 수시로 듣고, 옴진리교 소유의 공장에 가서 무보수로 일하고, 교주의 명령이 떨어지면 ‘배교자’들을 납치·살인을 했던 옴진리교 신도들의 행동 양식은 우리로서 끔찍할 뿐이고 이장림 목사 유의 ‘교주’들의 발언을 문자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은 바보로 보인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계 서열적인 폭력·착취, 패거리 집단 안에서의 ‘윗사람’에 대한 맹종이 과연 한국·일본 사회에서 드문 일인가? 물론 체육학과 교수의 지시에 따라 성적을 못 올린 후배에게 주먹질을 하는 선배나, 내용상 관계가 없더라도 자신의 논문의 제1주에서 꼭 지도교수의 글을 인용하는 대학원생도 ‘교주’의 의심 모를 하수인이 되려면 특수한 계기·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가방모찌’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주류’ 사회로의 진출이 불가능한, 즉 개인과 집단의 ‘어르신’ 사이의 합리적인 횡적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토양에서 ‘교주님’들이 번성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은 사실이다.
'주류' 집단의 물신주의·출세주의·형식주의에 질려버린 젊은 지식인으로서 늘 이탈의 동기가 존재하지만, 이탈이 곧바로 또 하나의 패거리로의 편입으로 이어지기가 쉽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악 속의 빌라에서 ‘선생님의 말씀’에 몰입하던 학우들이 바로 이와 같은 경우이었을 듯하다. 상황을 더욱더 왜곡하는 것은 한국의 경우 일반적인 종교집단의 구조적인 문제들이고, 일본의 경우에는 전전(戰前) 민족주의의 청산의 미흡성이다. 즉, 일반 종교단체에서 성직자를 비판하기는커녕 평등한 상대로서 토론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한국에서, 어떤 경우에는 권위주의가 지나친 일반 성직자와 사이비 ‘교주’ 사이에서 구별조차 하기 힘들다. 그리고 유대인의 지하조직과 미국, 영국의 왕실 등이 일본을 말살하려고 하고 그들과 연결돼 있는 일본의 국제적 명망가들이 다 ‘유대인’들이라는 아사하라의 가르침이나, 일본의 ‘신인류의 중심’에 놓인 수많은 ‘신형 신흥종교’의 교리는 겉으로만 과거의 국가주의를 ‘극복한’ 오늘의 일본에서 민족주의적 심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린이와 어른을 동등한 인격체로
후기 산업사회의 무의미한 생산·소비의 순환에 식상하여 허무감을 종교적인 모색으로 메우려는 중산층 고학력자 젊은이들의 고뇌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중심부나 준주변부 어디에서나 목격되는 현상이다. 그리나 ‘참 나’로부터의 소외의 진정한 이유인 자본주의적 체제의 기본 문제들이 무시되고 담론의 구조가 전적으로 종교적 차원만으로 전환되는 한 이 모색이 생산적 ‘소외 극복’으로 되지 못하고 기존의 구조로 계속 회귀된다. 다만, 서구·미국의 경우에는 요가나 불교, 탄트라(성적 요소가 강한 힌두교적·불교적 밀교) 등이 결국 일종의 ‘종교적 소비품’으로 전락되어 핵화된 소비주의자들의 입맛에 단순히 맞추어지는 반면에, 소외라는 자본주의의 주된 문제가 집단주의·자율적 개성의 미발달과 중첩되는 한국·일본 사회에서 ‘엘리트 코스’라는 위계질서적 구조를 벗어나게 하는 개체들이 곧 전체주의적 성격이 훨씬 강한 ‘비주류’ 교단으로 몰입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양쪽의 근대화 과정이 달랐던 만큼 자본주의의 폐쇄회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의사(擬似) 탈주’의 구조도 다른 것이다.
물론 종교적 모색이 시장 논리에 편입된 구미 지역을 흠모할 일은 없지만 개인이 집단 속에서 용해되는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저질러질 가능성이 있는 동아시아형 ‘신형 신흥종교’들의 문제도 결코 좌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어린이와 어른이 기본적으로 동등한 인격체로서 취급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독립심과 자긍심을 길러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참고 사이트 1. 옴진리교 관련 사이트 링크의 모음: http://square.millto.net/~sacca/
2. 옴진리교의 후신 단체인 ‘알레프’의 사이트: http://www.aleph.to/
3. 아사하라 ‘예언집’의 일부. ‘일미 결전(決戰)’을 예언하는 것은 태평양전쟁 시대의 세계관을 방불케 한다: http://www.geocities.co.jp/WallStreet/1733/aum/seppou-1.html
4. 이탈자 6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영생교’라는 한 신흥종교의 사이트. 그 교주 조희성이 “전지전능한 구원자”로 불렸다: http://www.victor.or.kr/
5. 옴진리교에 대한 영문 정리와 영문 링크 모음 :
http://religiousmovements.lib.virginia.edu/nrms/aum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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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국과 일본의 많은 지성인들은 왜 그토록 ‘종교적 전제왕국’의 환상에 쉽게 빠지는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수년 전 필자가 한국의 한 대학에서 공부했을 때 유독 눈에 띈 것은 학생회관 내 어느 방에 걸려 있던 ‘하늘과 땅’이란 현수막이었다.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로서 결례를 무릅쓰고 들어가서 인사를 청했다. 나중에 그곳이 어떤 신흥종교에 열정을 바치는 동아리란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 모르는 새 종교가 여기에 있구나! 새로운 발견을 한 기분으로 필자는 그 학생들을 사귀었고 그 교주를 알현하기까지 되었다.
한 교주의 빌라에서 충격을 받다
굿당들이 많은 산에 위치했던 교주의 빌라에서 필자는 그날 충격을 받았다. 짧은 치마를 입은 젊은 여자들에 둘러싸인 교주가 ‘말씀’을 하면 “네, 선생님!”을 연발했던 신도들의 얼굴 표정도 “문선명에게 늙은이밖에 안 남았는데, 우리 식구들은 젊은 피가 많아!”와 같은 ‘교세 자랑’도 충격이었다. 지금 그 교단의 정확한 명칭도 기억할 수 없지만, 전도 유망해 보이던 학우들이 왜 그 ‘선생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됐는지 그 교단으로 가게 만든 이유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남아 있었다.
몇 개월 뒤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어느 종말론적 선교회의 선교사와 만난 일이 있었다. 1992년 10월28일이 되면 세계사가 끝이 나고 믿는 자만이 허공으로 들려 올라갈 수 있다는 예언을 위주로 설교하는 부부 선교사였는데 그 남편은 원래 대기업의 사원이었다.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거쳐간 사람이 갑자기 광신으로 뭉친 소집단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뒤 1992년 10월28일 시한부종말론에 대한 신문 보도를 읽었을 때 이장림 목사에게 현혹돼 전 재산을 바치는 등 극단적인 신앙 행위를 벌인 2만여명 중 공무원·교사·기업체 간부 등 고학력 중산층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금이라도 비판 정신을 가진다면 곧 허구성이 드러나는 한 개인의 종교적인 환상을 고학력자들이 어떻게 절대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 동아시아의 ‘중산층 신형 신흥종교’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계기는 1995년 3월20일의 도쿄 지하철 독가스 살포 사건이었다. 이 가스 제조의 책임을 맡은 화학 석사나 옴진리교를 위해 러시아에서 무기 구입을 한 오사카대학교 출신의 젊은 건축가,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가 재판을 받았음에도 꾸준히 믿었던 도쿄대학교 박사과정 출신의 인류학자 등 젊은 지성인들은 어떻게 해서 “문선명과 창가학회(創價學會·일본의 대표적인 불교적 신흥종교)의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회장이 유대인 조직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일본인들을 말살하려고 한다”는 난센스를 믿고 대량 살인을 ‘정당한 방어’로 믿게 됐는가? 물론 일본 국내의 교도들은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의 극소수에 불과하며, 영계·환생에 대한 괴설로 유명(?)한 도쿄대 법학부 출신 오가와 류호(大川隆法)의 ‘행복의 과학’ 등과 같은 고학력 중산층 위주의 ‘신형 신흥종교’들도 수만명 이상의 고정 신도를 모을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상당수 대학생들이 한번쯤 옴진리교·행복의 과학 유의 말세론적·유사(類似)밀교적·카리스마적 리더 숭배 중심의 ‘신형 신흥종교’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었고, ‘교주 말씀’이라면 범죄까지도 서슴지 않을 만큼 ‘개인 숭배’가 태심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윗 사람에 대한 맹종문화’가 토양
아시아에서 근대적이라 할 일본이나 한국에서 어떻게 해서 지성인들까지 빨아들일 수 있는 ‘전제왕국’들이 생겨날 수 있는가? 이 현상이 동아시아 근대성의 본질적인 문제들과 연관은 없는가? 근대 초기의 ‘고전적인’ 신흥종교- 예컨대 한국의 동학이나 일본의 천리교(天理敎)와 같은 민중 본위적인 종교운동- 들이 전통 질서의 밑으로부터의 와해와 대안적 미래의 열망을 반영했다면, 기독교·불교의 요소를 종말론·환생론에 자의적으로 갖다붙이는 식의 1970년대 이후의 ‘신형 신흥종교’들은 근대의 무엇을 반영하는 것인가? 일본이 제도적으로는 근대화됐지만 근대성의 기본 요소인 개인의 도덕적 주체성을 끝내 가져보지 못했다는 전후 일본의 진보적 사상계의 주역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1914~96)의 뼈아픈 지적을 보자. 서구에서는 주체적인 개인의 탄생이 이루어졌다는 마사오의 의견에 그대로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한국도 아직도 끝까지 탈피하지 못한 권위주의적 근대화의 ‘메이지 모델’이 주체적 개인의 탄생을 극단적으로 방해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설교문 테이프를 수시로 듣고, 옴진리교 소유의 공장에 가서 무보수로 일하고, 교주의 명령이 떨어지면 ‘배교자’들을 납치·살인을 했던 옴진리교 신도들의 행동 양식은 우리로서 끔찍할 뿐이고 이장림 목사 유의 ‘교주’들의 발언을 문자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은 바보로 보인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계 서열적인 폭력·착취, 패거리 집단 안에서의 ‘윗사람’에 대한 맹종이 과연 한국·일본 사회에서 드문 일인가? 물론 체육학과 교수의 지시에 따라 성적을 못 올린 후배에게 주먹질을 하는 선배나, 내용상 관계가 없더라도 자신의 논문의 제1주에서 꼭 지도교수의 글을 인용하는 대학원생도 ‘교주’의 의심 모를 하수인이 되려면 특수한 계기·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가방모찌’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주류’ 사회로의 진출이 불가능한, 즉 개인과 집단의 ‘어르신’ 사이의 합리적인 횡적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토양에서 ‘교주님’들이 번성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은 사실이다.
'주류' 집단의 물신주의·출세주의·형식주의에 질려버린 젊은 지식인으로서 늘 이탈의 동기가 존재하지만, 이탈이 곧바로 또 하나의 패거리로의 편입으로 이어지기가 쉽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악 속의 빌라에서 ‘선생님의 말씀’에 몰입하던 학우들이 바로 이와 같은 경우이었을 듯하다. 상황을 더욱더 왜곡하는 것은 한국의 경우 일반적인 종교집단의 구조적인 문제들이고, 일본의 경우에는 전전(戰前) 민족주의의 청산의 미흡성이다. 즉, 일반 종교단체에서 성직자를 비판하기는커녕 평등한 상대로서 토론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한국에서, 어떤 경우에는 권위주의가 지나친 일반 성직자와 사이비 ‘교주’ 사이에서 구별조차 하기 힘들다. 그리고 유대인의 지하조직과 미국, 영국의 왕실 등이 일본을 말살하려고 하고 그들과 연결돼 있는 일본의 국제적 명망가들이 다 ‘유대인’들이라는 아사하라의 가르침이나, 일본의 ‘신인류의 중심’에 놓인 수많은 ‘신형 신흥종교’의 교리는 겉으로만 과거의 국가주의를 ‘극복한’ 오늘의 일본에서 민족주의적 심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린이와 어른을 동등한 인격체로
후기 산업사회의 무의미한 생산·소비의 순환에 식상하여 허무감을 종교적인 모색으로 메우려는 중산층 고학력자 젊은이들의 고뇌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중심부나 준주변부 어디에서나 목격되는 현상이다. 그리나 ‘참 나’로부터의 소외의 진정한 이유인 자본주의적 체제의 기본 문제들이 무시되고 담론의 구조가 전적으로 종교적 차원만으로 전환되는 한 이 모색이 생산적 ‘소외 극복’으로 되지 못하고 기존의 구조로 계속 회귀된다. 다만, 서구·미국의 경우에는 요가나 불교, 탄트라(성적 요소가 강한 힌두교적·불교적 밀교) 등이 결국 일종의 ‘종교적 소비품’으로 전락되어 핵화된 소비주의자들의 입맛에 단순히 맞추어지는 반면에, 소외라는 자본주의의 주된 문제가 집단주의·자율적 개성의 미발달과 중첩되는 한국·일본 사회에서 ‘엘리트 코스’라는 위계질서적 구조를 벗어나게 하는 개체들이 곧 전체주의적 성격이 훨씬 강한 ‘비주류’ 교단으로 몰입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양쪽의 근대화 과정이 달랐던 만큼 자본주의의 폐쇄회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의사(擬似) 탈주’의 구조도 다른 것이다.
물론 종교적 모색이 시장 논리에 편입된 구미 지역을 흠모할 일은 없지만 개인이 집단 속에서 용해되는 만큼 극단적인 폭력이 저질러질 가능성이 있는 동아시아형 ‘신형 신흥종교’들의 문제도 결코 좌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어린이와 어른이 기본적으로 동등한 인격체로서 취급됨으로써 개인으로서의 독립심과 자긍심을 길러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참고 사이트 1. 옴진리교 관련 사이트 링크의 모음: http://square.millto.net/~sacca/
2. 옴진리교의 후신 단체인 ‘알레프’의 사이트: http://www.aleph.to/
3. 아사하라 ‘예언집’의 일부. ‘일미 결전(決戰)’을 예언하는 것은 태평양전쟁 시대의 세계관을 방불케 한다: http://www.geocities.co.jp/WallStreet/1733/aum/seppou-1.html
4. 이탈자 6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영생교’라는 한 신흥종교의 사이트. 그 교주 조희성이 “전지전능한 구원자”로 불렸다: http://www.victor.or.kr/
5. 옴진리교에 대한 영문 정리와 영문 링크 모음 :
http://religiousmovements.lib.virginia.edu/nrms/aum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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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이다 [한겨레21 2006-05-09 08:06]
[한겨레] 한때 정치인의 전유물이었던 ‘뻔뻔함’은 이제 대중들의 일상 속으로 … 과연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다. “뻔뻔스럽고 부끄러워함이 없음”이란 뜻이다. 후안무치에 친화적인 정치판에선 상대편을 비난할 때 자주 쓰는 상용어지만, 보통 사람들 사이에선 큰 욕이다. 넓고 묽게 보자. 후안무치를 도덕의 경계선상에 걸쳐 있는 하나의 인간적 특성으로 보자.
김구가 이승만의 적수가 되지 못한 이유
정치인의 제1 자질이 무엇일까? 단연 후안무치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도덕감정을 고수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인에겐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고 상황에 따라 언행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볼 것도 없이 한국 현대사만 살펴봐도 이는 분명해진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경쟁자들과 비교해볼 때 후안무치 자질이 더 뛰어났다. 예컨대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해보라. 김구도 다른 독립투사에 비하면 꽤 후안무치한 편이었지만 감히 이승만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는 대통령들에게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은 기본이고 거기에 후안무치 자질이 더해져야만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영삼부터 살펴보자. 3당 합당과 내각제 각서 파동은 김영삼의 탁월한 후안무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정계은퇴 식언과 ‘20억+알파’ 사건은 김대중의 후안무치 능력을, 대선후보 전 동교동계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지역주의 양비론의 일시적 위장 등은 노무현의 후안무치 능력을 입증해준다.
대체적으로 보아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후안무치를 저지른 건수가 더 많고 농도가 더 강하다. 피부가 얇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거나 조직의 리더가 된 걸 본 적이 있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유능하진 않았을 게다.
정치는 인간의 야수적 속성을 다루는 영역이다. 어느 영역치고 그 속성과 무관하랴만, 본격적인 권력투쟁이라는 점에서 정치를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경제 영역의 투쟁도 무섭긴 하지만, 그쪽은 이익 중심이기 때문에 이익과 더불어 이념·명분 등이 칼춤을 추는 정치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는 경제계의 거물이었던 정주영과 김우중이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기웃거리다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가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영역에서도 후안무치가 경쟁력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최근의 삼성과 현대차 사태를 보라. 왜 잘나가는 재벌그룹 총수일수록 후안무치의 농도가 강한가? 그건 평소 후안무치했기 때문에 그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답으로 대신하면 되겠다.
주변을 둘러보기 바란다. 후안무치 자질이 비교적 뛰어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게다. 그들에겐 좋은 점이 많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교섭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비교적 탁월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이미 권력을 가진 쪽은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즉, 같은 선수를 알아보고 요청·요구에 응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뻔뻔함'은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자신의 후안무치를 자각할 수 있는가? 없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싹튼다. 자신이 후안무치하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면 후안무치를 구사하기 어려워진다. 후안무치를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하는 기분으로 체화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의 상식적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해도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같은 후안무치 자질을 가진 측근 인사들에게 의존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대중은 묘한 동물이다. 그들은 정치인의 후안무치가 필요악임을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어느 순간 돌아서서 후안무치하다고 욕을 한다. 언제 어느 경우에 그러는지 그건 확실치 않다. 그들은 “해도 너무하네”라고 하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서부터 너무한 건지 그들 자신도 답을 갖고 있진 않다. 그래서 정치는 늘 대중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임이 된다.
1920년대 후반 미국 마피아 조직을 주름잡았던 알 카포네는 “상류사회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훌륭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폭이 감히 그런 말을 해? 아니다. 상류층의 후안무치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조폭도 당당해진다. 일반 대중인들 무얼 망설이랴. 민주화 이후 한국인에게 나타난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후안무치의 일상화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의 반열에 올랐다. 보수파들은 그게 민주화 탓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게 아니다. 후안무치의 엘리트 독식 체제에서 대중화 체제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긍정적 변화로 보는 게 옳다.
그건 마치 아줌마들의 후안무치를 비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남존여비 가부장 체제하에서 처녀 때까지 억눌려왔던 후안무치 욕구가 애 낳고 폭발하면 원인부터 따져보는 게 옳다. 나는 후안무치해도 좋지만 너는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후안무치의 평준화는 사회 정의다.
독일에 페터 슬로터다이크라는 괴짜 철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위선적 계몽주의’를 질타하면서 ‘뻔뻔함’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이자 실천 항목으로 제시했다. 이론과 명분대로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표현 양식이라 할 뻔뻔함을 발휘하면서 문제를 짚어보자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심오한 뜻이 있겠지만, 후안무치를 다시 보자는 메시지만큼은 그대로 접수해도 좋겠다. 사실 한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돼온 것이다. 한동안 열풍이 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이 기(氣) 살려주기 운동’도 기실 따지고 보면 이 후안무치한 세상에서 내 새끼 경쟁력 키워주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
지금 이 후안무치 이야기를 행여 냉소로 이해하면 크게 실수하는 거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문법에 대해 탐구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이 이대로 좋은가 하는 걸 정색을 하고 살펴보자는 뜻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혁명의 순수성은 2주일을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민주화운동이나 개혁의 순수성은 얼마나 갈까? 2개월? 2년? 얼마이건 그 주체는 모른다. 왜 그런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주체에겐 후안무치 자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보기엔 이미 순수하지 않은데도 자신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걸 무슨 수로 막으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이 라는 책에서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고 독설을 퍼부었을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민주화운동을 한 인사들은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계속 밖에서만 떠돌아야 하고, 공직은 운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독식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천규석이 말하고자 한 건 운동가들의 공직 진출 자체가 아니라 공직 진출 이후 보여주는 모습일 거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글과 말로만 운동을 했던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혹 나는 나의 글을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모든 지식인들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후안무치는 정치인들만의 무기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석은 언젠가 ‘글쓰기의 무서움’이란 글에서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발 밑에 조회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는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모두에게 긴요한 덕목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자신이 실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옳은 메시지라면 널리 전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반론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로 인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너무 심각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한국 사회엔 ‘담론의 거품’이 너무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좀 유치한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 구체적 각론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이야기는 유치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적어도 수준의 잡지에선 ‘부국강병론’이니 ‘소득 2만달러론’이니 하는 것은 경멸받기 딱 좋은 보수파 담론으로 통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멸이 과연 정직한 것인가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주의·민족주의는 무조건 때려야 진보고 품위 있는 지식인으로 통하는 이 풍토가 언행일치를 전제로 한 정직성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잠시 를 보자. 이 신문은 자주 문화적으론 ‘좌파 담론’의 상품화에 열을 올린다. 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극우성을 위장하려는 술책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을지 모르겠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그게 그 신문 독자들이 원하는 상품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가?
"잘 살아보세”는 “잘 써보세”로 바뀌고…
뫚맏맒봉 법칙’이란 게 있다. 미국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지만 일류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갖게 된 이른바 ‘보보스족’이 정치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과거 운동권 시절과 비교해 갖게 되는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문화적으로만 진보 냄새를 피우는 걸 말한다.
과연 의 독자들은 독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물론 삼위일체를 고수하는 게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법은 없다. 얼마든지 각기 따로 놀 수 있다. 다만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일관된 경향성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김대중 정권은 물론이고 노무현 정권이 경제적으로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성장주의 패러다임’이 과연 한국인 다수가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인가?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닌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사라진 유물이 아니다. “잘 써보세”로 바뀌었을 뿐이다. 민주시민의 윤리는 소비자 윤리로 대체되었다. 소비자가 악덕 상인에 분노하듯, 민주시민은 악덕 정치권에 분노하는 정도의 윤리는 갖고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뿐이다. 민주주의는 소비주의와 결탁했다. 민주시민은 그 이상의 선은 넘으려 하지 않는다.
일부에 지나지 않을망정, 그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매년 해외여행을 하고 중형차를 굴리고 골프를 치기도 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은 돈으로 이른바 ‘대학 개혁’을 하고 있지만, 그것에 저항하진 않으며 그로 인한 수혜만 누린다.
이런 지적은 부당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았던 미국의 노엄 촘스키가 짜증을 냈듯이, 유치하다고 짜증을 낼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논점은 지식인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의 담론 생산이 현실 세계와 맺는 관계다. 그 괴리가 클수록 지식인의 ‘상징 자본’은 튼실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세계를 바꾸는 데 어떤 실천력을 갖는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와 법의 차원에선 한국 사회는 개혁을 할 만큼 했다. 물론 할 게 더 남아 있고 앞으로 더욱 해야겠지만, 제도와 법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남아 있으니 그게 바로 의식과 행태의 영역이다. 예컨대 정치판에선 ‘보스 정치’가 거의 사라졌지만, 대학엔 건재하다. 학연주의와 파벌주의는 정치권 뺨을 치고도 남는다. 대학 내 선거 수준도 직업 정치판 선거보다 높지 않다는 이유로 관리권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빼앗겼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 그 바닥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늘 사회를 향해서만 설교를 늘어놓는다.
정치권 동지들을 새삼 경외하다
자신의 후안무치에 대해 가끔이나마 자각을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글쓰기가 몹시 싫어지니까 말이다.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게 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언행일치를 하는 사람 위주로 글쓰기 시장이 물갈이돼 담론과 세상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에 따라 실천력도 강해질 게 아닌가. 정치권의 후안무치 동지들에게 새삼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들에겐 이런 고민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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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때 정치인의 전유물이었던 ‘뻔뻔함’은 이제 대중들의 일상 속으로 … 과연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말이 있다. “뻔뻔스럽고 부끄러워함이 없음”이란 뜻이다. 후안무치에 친화적인 정치판에선 상대편을 비난할 때 자주 쓰는 상용어지만, 보통 사람들 사이에선 큰 욕이다. 넓고 묽게 보자. 후안무치를 도덕의 경계선상에 걸쳐 있는 하나의 인간적 특성으로 보자.
김구가 이승만의 적수가 되지 못한 이유
정치인의 제1 자질이 무엇일까? 단연 후안무치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도덕감정을 고수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건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인에겐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고 상황에 따라 언행을 바꿔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볼 것도 없이 한국 현대사만 살펴봐도 이는 분명해진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경쟁자들과 비교해볼 때 후안무치 자질이 더 뛰어났다. 예컨대 이승만과 김구를 비교해보라. 김구도 다른 독립투사에 비하면 꽤 후안무치한 편이었지만 감히 이승만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이는 대통령들에게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른 탁월한 능력과 자질은 기본이고 거기에 후안무치 자질이 더해져야만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영삼부터 살펴보자. 3당 합당과 내각제 각서 파동은 김영삼의 탁월한 후안무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정계은퇴 식언과 ‘20억+알파’ 사건은 김대중의 후안무치 능력을, 대선후보 전 동교동계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지역주의 양비론의 일시적 위장 등은 노무현의 후안무치 능력을 입증해준다.
대체적으로 보아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후안무치를 저지른 건수가 더 많고 농도가 더 강하다. 피부가 얇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거나 조직의 리더가 된 걸 본 적이 있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유능하진 않았을 게다.
정치는 인간의 야수적 속성을 다루는 영역이다. 어느 영역치고 그 속성과 무관하랴만, 본격적인 권력투쟁이라는 점에서 정치를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경제 영역의 투쟁도 무섭긴 하지만, 그쪽은 이익 중심이기 때문에 이익과 더불어 이념·명분 등이 칼춤을 추는 정치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는 경제계의 거물이었던 정주영과 김우중이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기웃거리다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가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제 영역에서도 후안무치가 경쟁력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최근의 삼성과 현대차 사태를 보라. 왜 잘나가는 재벌그룹 총수일수록 후안무치의 농도가 강한가? 그건 평소 후안무치했기 때문에 그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답으로 대신하면 되겠다.
주변을 둘러보기 바란다. 후안무치 자질이 비교적 뛰어난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게다. 그들에겐 좋은 점이 많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교섭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비교적 탁월하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이미 권력을 가진 쪽은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즉, 같은 선수를 알아보고 요청·요구에 응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뻔뻔함'은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
후안무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자신의 후안무치를 자각할 수 있는가? 없다! 바로 여기서 비극이 싹튼다. 자신이 후안무치하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면 후안무치를 구사하기 어려워진다. 후안무치를 “안녕하세요”라고 가볍게 인사하는 기분으로 체화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의 상식적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해도 그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같은 후안무치 자질을 가진 측근 인사들에게 의존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된다.
대중은 묘한 동물이다. 그들은 정치인의 후안무치가 필요악임을 흔쾌히 인정하면서도 어느 순간 돌아서서 후안무치하다고 욕을 한다. 언제 어느 경우에 그러는지 그건 확실치 않다. 그들은 “해도 너무하네”라고 하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괜찮고 어디서부터 너무한 건지 그들 자신도 답을 갖고 있진 않다. 그래서 정치는 늘 대중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임이 된다.
1920년대 후반 미국 마피아 조직을 주름잡았던 알 카포네는 “상류사회란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이익을 만끽하려는 뻔뻔스러운 놈들로 이 ‘훌륭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공갈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폭이 감히 그런 말을 해? 아니다. 상류층의 후안무치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조폭도 당당해진다. 일반 대중인들 무얼 망설이랴. 민주화 이후 한국인에게 나타난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는 후안무치의 일상화다. 후안무치는 시대정신의 반열에 올랐다. 보수파들은 그게 민주화 탓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게 아니다. 후안무치의 엘리트 독식 체제에서 대중화 체제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긍정적 변화로 보는 게 옳다.
그건 마치 아줌마들의 후안무치를 비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남존여비 가부장 체제하에서 처녀 때까지 억눌려왔던 후안무치 욕구가 애 낳고 폭발하면 원인부터 따져보는 게 옳다. 나는 후안무치해도 좋지만 너는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후안무치의 평준화는 사회 정의다.
독일에 페터 슬로터다이크라는 괴짜 철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위선적 계몽주의’를 질타하면서 ‘뻔뻔함’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 양식이자 실천 항목으로 제시했다. 이론과 명분대로 살려면 위선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표현 양식이라 할 뻔뻔함을 발휘하면서 문제를 짚어보자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심오한 뜻이 있겠지만, 후안무치를 다시 보자는 메시지만큼은 그대로 접수해도 좋겠다. 사실 한국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돼온 것이다. 한동안 열풍이 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이 기(氣) 살려주기 운동’도 기실 따지고 보면 이 후안무치한 세상에서 내 새끼 경쟁력 키워주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
지금 이 후안무치 이야기를 행여 냉소로 이해하면 크게 실수하는 거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문법에 대해 탐구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후안무치 경쟁’이 이대로 좋은가 하는 걸 정색을 하고 살펴보자는 뜻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혁명의 순수성은 2주일을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민주화운동이나 개혁의 순수성은 얼마나 갈까? 2개월? 2년? 얼마이건 그 주체는 모른다. 왜 그런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주체에겐 후안무치 자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 보기엔 이미 순수하지 않은데도 자신은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걸 무슨 수로 막으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농민운동가 천규석이 라는 책에서 “지나고 보니, 60~80년대까지의 그 풍성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들도 잘난 놈들에게는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동시에 거두어갈 기회로 활용되었다”고 독설을 퍼부었을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민주화운동을 한 인사들은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계속 밖에서만 떠돌아야 하고, 공직은 운동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독식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천규석이 말하고자 한 건 운동가들의 공직 진출 자체가 아니라 공직 진출 이후 보여주는 모습일 거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는 글과 말로만 운동을 했던 지식인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혹 나는 나의 글을 입신출세와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모든 지식인들이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후안무치는 정치인들만의 무기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석은 언젠가 ‘글쓰기의 무서움’이란 글에서 “자신의 발언을 자신의 발 밑에 조회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는 절제는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 모두에게 긴요한 덕목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자신이 실천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옳은 메시지라면 널리 전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반론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로 인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너무 심각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한국 사회엔 ‘담론의 거품’이 너무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좀 유치한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 구체적 각론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이야기는 유치해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적어도 수준의 잡지에선 ‘부국강병론’이니 ‘소득 2만달러론’이니 하는 것은 경멸받기 딱 좋은 보수파 담론으로 통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경멸이 과연 정직한 것인가에 강한 의문을 품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주의·민족주의는 무조건 때려야 진보고 품위 있는 지식인으로 통하는 이 풍토가 언행일치를 전제로 한 정직성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잠시 를 보자. 이 신문은 자주 문화적으론 ‘좌파 담론’의 상품화에 열을 올린다. 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극우성을 위장하려는 술책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을지 모르겠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그게 그 신문 독자들이 원하는 상품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가?
"잘 살아보세”는 “잘 써보세”로 바뀌고…
뫚맏맒봉 법칙’이란 게 있다. 미국에서 학생운동권 출신이지만 일류대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갖게 된 이른바 ‘보보스족’이 정치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과거 운동권 시절과 비교해 갖게 되는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문화적으로만 진보 냄새를 피우는 걸 말한다.
과연 의 독자들은 독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당신의 진보성은 정치·경제·문화의 삼위일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물론 삼위일체를 고수하는 게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법은 없다. 얼마든지 각기 따로 놀 수 있다. 다만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일관된 경향성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김대중 정권은 물론이고 노무현 정권이 경제적으로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동의한다. 그런데 ‘성장주의 패러다임’이 과연 한국인 다수가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인가?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닌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사라진 유물이 아니다. “잘 써보세”로 바뀌었을 뿐이다. 민주시민의 윤리는 소비자 윤리로 대체되었다. 소비자가 악덕 상인에 분노하듯, 민주시민은 악덕 정치권에 분노하는 정도의 윤리는 갖고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뿐이다. 민주주의는 소비주의와 결탁했다. 민주시민은 그 이상의 선은 넘으려 하지 않는다.
일부에 지나지 않을망정, 그 패러다임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매년 해외여행을 하고 중형차를 굴리고 골프를 치기도 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은 돈으로 이른바 ‘대학 개혁’을 하고 있지만, 그것에 저항하진 않으며 그로 인한 수혜만 누린다.
이런 지적은 부당한 것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았던 미국의 노엄 촘스키가 짜증을 냈듯이, 유치하다고 짜증을 낼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논점은 지식인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차원의 담론 생산이 현실 세계와 맺는 관계다. 그 괴리가 클수록 지식인의 ‘상징 자본’은 튼실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세계를 바꾸는 데 어떤 실천력을 갖는가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제도와 법의 차원에선 한국 사회는 개혁을 할 만큼 했다. 물론 할 게 더 남아 있고 앞으로 더욱 해야겠지만, 제도와 법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남아 있으니 그게 바로 의식과 행태의 영역이다. 예컨대 정치판에선 ‘보스 정치’가 거의 사라졌지만, 대학엔 건재하다. 학연주의와 파벌주의는 정치권 뺨을 치고도 남는다. 대학 내 선거 수준도 직업 정치판 선거보다 높지 않다는 이유로 관리권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빼앗겼다. 그런데 나를 포함해 그 바닥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늘 사회를 향해서만 설교를 늘어놓는다.
정치권 동지들을 새삼 경외하다
자신의 후안무치에 대해 가끔이나마 자각을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마다 글쓰기가 몹시 싫어지니까 말이다. 공적 발언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 너머를 이야기하지 않게 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언행일치를 하는 사람 위주로 글쓰기 시장이 물갈이돼 담론과 세상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에 따라 실천력도 강해질 게 아닌가. 정치권의 후안무치 동지들에게 새삼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들에겐 이런 고민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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