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에 면역되면 자기교정 능력 없어져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따져보자고 한다. 좋은 일이지만 더 시급한 게 있다.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어떻게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가? 이게 가장 중요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 김영삼·김대중 정권의 말기가 비참했던 것도 바로 이런 문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그런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
한나라당의 내분이 실감나게 보여준 건 ‘줄서기’와 ‘줄세우기’였다. 한나라당 집권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 지도자의 오류를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이는 한나라당만의 문제도 아니고 역대 정권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 정치의 문제다. 대통령제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더욱 근원적인 것이다.
△ 한국 정치가 지도자의 오류를 통제할 수 없는 근본적 원인 중 하나가 아부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무회의에 앞서 넥타이를 매지 않고 나오면, 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공무원이 따라한다.(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당파성’에 대한 엄청난 착각
정치에 침을 뱉으면서 동시에 그 힘을 숭배하는 이중성을 잠시 접고, 정치를 정직하게 바라보자. 아니 우리 자신부터 보자. 우리는 공정성에 대단히 취약하거나 서투른 사람들이다. ‘호감’과 ‘반감’이 공정성을 먹어버린다. 공정한 규칙은 모든 집단에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이 진술에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걸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지지하는 집단엔 관대한 반면, 내가 반대하는 집단엔 엄격하다. 이걸 ‘당파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정성이 없거나 약하니, 사회적 갈등은 합리적 해소의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늘 문자 그대로 이전투구(泥田鬪狗)로 갈 수밖에 없다. 이미 갈라진 편의 대세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조율하거나 바꾸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는 자기 편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똑같은 짓이라도 상대편이 하면 타도해야 할 반민주적 작태지만, 우리 편이 하면 개혁을 위한 불가피성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되면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지도자의 비위를 맞추려는 아부꾼만 난무하게 된다. 아무리 같은 편이라도 아부를 지적해 비판할 수 있을 정도의 긴장이 그 집단 내에 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부, 이거 의외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한국 정치의 급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시절 주변의 아부꾼들에 의해 ‘세기의 태양’ ‘구국의 태양’ ‘인류의 등대’ ‘현대의 성자’ 등으로 극찬됐다. 우리는 지금 그걸 보고 어이없어하며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진보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우리는 ‘태양’ ‘등대’ ‘성자’ 같은 언어 구사의 촌스러움에 대해 웃는 것이지, 아부 자체를 멀리할 정도로 진보하진 않았다.
미국 언론인 리처드 스텐겔은 <아부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아부의 정석’으로 “그럴듯하게 하라”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말라” “칭찬과 동시에 부탁하지 말라” “여러 사람에게 같은 칭찬을 되풀이하지 말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 등을 들었다.
다 좋은 말이지만, 아부의 기술이 미국보다 더 발달한 한국에선 한 차원 더 높게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다. “없는 곳에서 칭찬하라”는 ‘기술’이 아니라 기본 조건이다. 인터넷 덕분에 이젠 아부가 주로 공론장에서 행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정교한 이론과 실무가 필요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아부의 정석’은 다음 10가지다.
모든 의견에 무조건 끄덕끄덕하라
첫째, 명분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라. 이건 그냥 “그럴듯하게 하라”는 말과 비슷한 것 같지만,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이다. 한국인은 명분에 약하다. 자신이 아부를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반드시 거창한 명분과 연결해야 한다.
둘째, 신선하게 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은 칭찬하지 않는 걸로는 부족하다.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독창성을 발휘해야 한다. 궤변이라도 파격적인 이설(異說)을 제시하는 아부가 평범한 아부보다 훨씬 더 큰 파괴력이 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한다.
셋째,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라.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는 한국에선 안 통한다. 아부꾼들 사이에도 경쟁이 있기 때문에 보스의 머릿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려면 무조건 동의하는 건 필수다.
넷째, 거대하고 흉악한 적을 창출하라. 보스에 대한 아부를 적에 대한 증오의 그늘에 가려지게 할 수 있는 동시에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최일선에서 그 적과 싸우는 ‘투사’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면 적어도 보스에 대한 아부로 인해 욕먹을 일은 없다.
다섯째, 보스를 불쌍하게 보이도록 만들어라. 아주 훌륭한 분인데 그 진면목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고 슬픈 표정을 지어라. 이건 아부 효과와 더불어 자신이 보스를 잘 아는 ‘실세’라는 효과를 내는 일석이조(一石二鳥)다.
여섯째, 당당하게 호통치면서 아부하라. 이른바 적반하장(賊反荷杖) 수법이다. 보스를 미화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말고 보스에 대한 비판도 박살내는 호전성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너무도 당당한 자세에 압도돼 그건 아부가 아니라 소신과 양심의 표현일 거라고 믿게 된다.
일곱째, 자신이 아부로 얻은 걸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사람들은 아부꾼의 당당한 자세에 압도되다가도 어느 순간 아부꾼이 아부로 큰 이익을 취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해체하기 위해 자신은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무소유’ 정신의 화신인 양 쇼를 할 필요가 있다.
여덟째, 보스를 ‘싸가지’ 없게 평가하는 쇼맨십을 발휘하라. 기질상 결코 아부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만천하에 과시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아부의 효과도 높아진다. 물론 이 수법은 그런 정도는 암묵적 이해를 해줄 수 있을 정도로 보스의 신뢰를 얻은 다음에 구사해야 한다.
△ 유권자의 무관심은 자랑이 아니다.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온다. 정치인들이 선거철 시장에 들러 유권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아홉째, 자신도 괴롭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라. 아무리 쇼를 잘해도 아부에 대한 비판자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 비판에 과장되게 반응하면서, 왜 자신의 진정성을 이리도 몰라주는지 안타깝고 서글프다고 징징 우는 소리를 하라. 역사가 알아줄지 모르겠다는 등 헛소리를 해대는 것도 좋겠다.
열째, 자신에게도 아부하는 사람들을 키워라. 이는 아부의 힘을 증강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부에 대한 비판을 원천봉쇄하는 효과를 낳는다. 비판자들이 아부꾼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의 집단공격이 무서워 아부꾼을 비판하는 걸 삼가게 된다는 것이다. 명심하라. 아부의 순간은 쓸망정 그 열매는 달고 영원하다.
선거 뒤엔 ‘조폭 공동체 의식’
혹 이야기가 너무 심각해질까봐 잠시 좀 웃자고 과장되게 표현했지만, 이상에서 말한 ‘아부의 정석’은 한국 정치에 자기교정 능력이 없는 이유를 시사해주기엔 족하다. 전 사회 영역에 걸쳐 ‘보스 1극 권력집중 체제’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아부는 생존과 성장의 필수이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러한 아부에 면역돼 있다. 정치 분야에선 상대편 내부의 아부엔 혐오를 드러내지만, 우리 편 내부의 아부엔 열광한다.
왜 그런 정신상태가 가능한가? 무슨 선거든 선거판 현장을 수일간 체험학습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정치는 고립돼 있는 ‘섬’과 같다. 어깨띠를 두르고 시장을 돌아다녀보라. 악수를 자주 거절당하는 건 기본이고 등에 대고 욕하는 소리마저 쉽게 들을 수 있다.
유권자는 냉담하다 못해 살벌하고, 언론은 사사건건 흠만 잡아내 보도하려고 발버둥친다. 경쟁자들은 온갖 인신공격에 흑색선전까지 마다하지 않으니, 이쪽도 앉아서 당할 순 없어 같은 수법으로 맞받아쳐야 한다. 이거 사람 할 짓이 아니다. “선거에 출마한 적이 없다면 감히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명언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말이지 후보들은 보기에 불쌍하다. 충성할 참모진 구성하랴, 선거자금 마련하랴, 유권자들의 냉대에도 미소 지으랴, 존경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후보들은 당선된 뒤에 유권자들에게 복수한다. 자신을 위해 충성한 사람들에게 ‘낙하산’을 태워주고, 돈 댄 사람들에게 들통나지 않게 특혜를 주고, 자신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복한다. 이른바 ‘조폭 공동체 의식’이다. 이 의식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아부’란 단어는 아예 없다. 조직원이 보스에게 무조건 충성과 찬양을 바치는 건 아부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본질이다.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는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고위 공직은 개인적인 ‘코리안드림’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쟁탈해야 할 이권이요, 비즈니스가 된다. 물론 이는 ‘줄서기’와 지도자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이유가 된다.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떤 고난을 겪고 희생을 했는지 알아?” 하는 마음이 정치의 ‘사유화·이권화’를 불러오고, 이게 또 정치혐오를 낳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한국 정치는 복수혈전이다. 우리는 고위 공직자들에게 공복(公僕)이 될 걸 요구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과연 그런 요구를 할 자격이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특히 ‘바람 정치’가 문제다. 유권자들이 바람에 휩쓸리는 건 일시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점도 있지만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의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정치 발전엔 치명적이다. 바람만 잘 타면, 바람이 부는 쪽으로 줄만 잘 서면, 길 가다 금배지를 주울 수도 있는 풍토는 유권자들이 만든 것이지 정치인들이 만든 게 아니다. 유권자들이 그렇게 해놓고선 정치인들의 줄서기를 비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그 어떤 바람에 휩쓸리더라도 정치인들의 평소 실력을 평가해 옥석을 구분해주는 정도의 성의를 보이면 모르겠는데, 그것마저 없다. 그러니 정치인들은 평소 ‘개판’을 쳤더라도 바람과 줄만 잘 타면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공할 수도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누가 ‘줄서기’를 두려워하겠는가? 정당을 장난감처럼 여겨 깨부수고 다시 만들고 또 깨부수고 다시 만드는 작태를 삼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바람정치’의 좋은 점이라는 것도 반독재 투쟁 시절에나 의미가 있었지만, 아직도 그 습속은 계속되고 있다. 반감을 토대로 삼은 ‘역바람정치’도 ‘바람정치’의 일종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지도자 추종주의다. 지도자 추종주의가 계속되는 한, 지도자가 잘못 나갈 경우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길이 없다. 한국 정치가 ‘기대와 환멸’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다는 진단은 바로 지도자 추종주의의 한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란 국민 뜯어먹기’라는 역발상
그럼에도 시민사회의 모든 담론은 정치인만 욕하고 유권자들의 성찰을 촉구하는 건 전무하다. 물론 유권자들이 그러는 건 역사와 구조의 그 어떤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보자면 정치인들에겐 면책 사유가 없겠는가? 정치인 못지않게 유권자들도 성찰의 주체가 되어 마땅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치의 복수’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역설 같지만, 발상의 전환도 해봄직하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냉소와 혐오를 보내는 이유는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교과서적 원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 전제를 믿지도 않으면서 왜 자꾸 연연해하는가?
반대로 정치란 원래 ‘국민 뜯어먹기’를 주업으로 삼는 고등 사기 행위라는 걸 전제로 삼아보자. 개혁을 내세운 집단들도 반개혁 세력과의 대치 국면을 조성해 ‘증오의 마케팅’ 공세로 자기들이 누리는 기득권과 특권을 계속 독식하려는 사기꾼에 불과하며, 한국엔 여야가 아니라 ‘엘리트 대 비엘리트’ 또는 ‘출세한 사람 대 출세하지 못한 사람’의 구도만 있을 뿐이라는 신념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그런 자세를 가지면 한국 정치에도 아름다운 사람과 장면이 많다는 데 주목하면서 정치에 대해 좀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
좀더 현실적인 수준에서 대안을 모색해보자면, 정치 외풍에서 자유로운 ‘중립지대’를 늘려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각급 지도자의 인사·예산권의 상당 부분을 시민사회의 자율체제로 돌려 정치의 영향력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있겠지만, 그건 한국 시민사회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니 인내를 갖고 하나씩 고쳐나가는 게 옳다. ‘정치의 복수’를 피해보고 싶은 마음에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펴보긴 했지만, 어디까지 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출처: 한겨레21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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