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23일 토요일

국기에 대한 쓴 웃음

요즘 들으니 "국기에 대한 맹세"를 그 텍스트를 약간 고칠 뿐 본격적으로는 그냥 그대로 두려 한다고 합디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냥 쓴 웃음이 나오지요. 소련에서 태어난 죄 (?)로,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국기에 대한 온갖 맹세들을 급우들과 함께 수도없이 하곤 했어요. 그런데, 소련이 막상 망하니 이 급우들 중에서는 할복이나 거병은 물론, 약간이나마 신경을 써준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강요되는 맹세들을 달달 외우면 외울수록 냉소만 강화될 뿐이지요. 맹세를 통해 마음 속의 진정한 사랑을 키운 경우를 어디에서 본 분이 계세요?

초등학교3학년, 제 나이 9살. 제가 그 때에 소년공산당 (피오네르) 입단식을 치르면서 빨간 깃발 앞에서 "심신을 바쳐 모든 힘을 쏟아 공산당의 사업을 복무하도록 할 것"을 엄숙히 맹세했지요. 나중에 거의 다달이, 무슨 행사할 때마다 역시 "공산당 사업을 위한 투쟁에 준비돼 있으라!"는 구령에 따라 "네, 항상 준비돼 있습니다!"라고 외치면서 거수경례를 했지요. 아마도, 그 구령을 지금이라도 들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거수경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 앞에서 그렇게도 엄숙한 표정으로 "맹세"를 외쳤던 그 급우들은, 나중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무슨 이야기를 해댔을까요? "아, 저 대머리 발로댜를 보기만 하면 졸나 웃겨 목참겠구먼. 아까 식을 치르면서 겨우 참은 거야" 이 "대머리 발로댜"는 바로 그 깃발에서 그 얼굴을 나타냈던 블라디미르 레닌이었습니다 ("발로댜"는 "블라디미르"의 애칭). 강요된 맹세를 하면서도 국가의 의례에 대한 염증만 키운 것이지요. 결국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어쩔수 없이 거래의 관계인데, 이 관계에서는 국가가 제시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면 아무리 많은 애국 의식들을 강제해봐야 별 쓸모가 없는 것이지요. 구 소련 같으면, 지식 청소년들에게 살아숨쉬는 혁명적 정신도 진정한 자유도 제시하지 못햇으며, 노동계급의 청소년들 보기에는 간부들만 외국에 왔다갔다하면서 부럽게쓰리 잘 사는 불평등한 국가이었습니다. 결국 국가로부터 그 충성에 대한 어떤 가치 있어보이는 보상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에 상당히 냉소해진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어차피 실생활에서 지켜지지도 않는 공산주의 이상들은 냉소와 조소의 대상이 돼도, "맹세의 문화"가 강요했던 일상적인 군사주의 정도는 잘 뿌리를 내렸지요. 제 급우들의 절대 다수는, 아프간에 가서 "야수와 같은 폭도" (무자헤드)들을 잡아죽이는 것을 "진짜 남자다운 일"로 생각했으며, 학교를 방문하여 "애국 애군 미담"을 나누었던 아프간 침략의 상이병들에게 영웅대접을 해주었지요. 이들이 국가를 별로 정의롭고 평등한 것으로 보지 않았지만, 전우애로 꽁꽁 묶여진 "진짜 사나이의 집단", 즉 군부대를 "남성의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지요. "맹세의 문화"는 애국 시민을 키울 수 없어도, 살인훈련에 무신경이 된 꼴통 마초 만들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의 지배자들이 이 "맹세의 문화"를 이처럼 사랑하는 것이지요.

한국 대학생들에게 여론조사해보면 대다수가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북유럽/일본/스위스에서 태어나겠다"고 답합니다. 자랑스러운 태극기에 대한 그 무슨 주문을 외우게 해도, 자랑스러운 태극기의 그늘에서 다시 타어나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안고쳐질 것에요. 국민연금이라고는 용돈 정도 주면서도, 제대로 된 실업수당도 교육/의료 혜택도 주지 않으면서도 남성들에게 유럽에 비해 두배 긴 기간을 여건이 아주 열악한 군에서 보내게 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이게 공정한 거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차피 소수일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주문을 외우게 하는 대신에 사립재단이라도 제대로 감시하여 재단 이월금을 교육 사업에 쓰게 해서 등록금 인상이라도 잡아주었으면 나라에 대한 애착이 강한 시민 키우기에 훨씬 더 주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국기 앞에서의 맹세"의 문화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같은 소수자들을 이지메하는 분위기 만들기에 아주 "기여"할 것입니다. 다들 하나같이 맹세를 외우는 데에 혼자 외우지 않는 사람이 늘 배제 당하고 맙니다. "맹세의 문화"는 자신의 마음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 혼자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악이지요. 맹세라면 같이 하는 것이고, 개인의 판단이란 이미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맹세의 문화"는 자신만의 얼굴이 없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키웁니다. 그게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사명일는지도 모르지요....


출처: 한겨레 박노자글방 2007/06/21 23:08 [원문]

동양에서의 왕조 교체의 이유

[종횡무진 한국사 (하) pp. 35]

농경문명을 중심으로하는 동양적 왕조가 일정한 패턴을 가지며 계속적으로 교체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토지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위해서는 기존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해야 하는데, 그를 위해서는 왕조의 교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체된 토지제도가 그 효력을 발휘하는 동안에는 왕조도 잘 나가다가, 그 효력이 다하는 중기 무렵에 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그 영향이 정치에 영향을 미칠 때 왕조가 교체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예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분석 중의 하나인 것 같다.

83세 진융 `아직도 더 배우고 싶다`

캠브리지대 석사 학위 받아
`베이징대서 갑골문 공부`


"중국에 대한 공부가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베이징(北京)대학에 설치된 국학(國學)연구원에서 가르침을 받고 싶어요."

중화권은 물론이고 아시아 지역에서 큰 인기를 누려온 무협소설의 대가 진융(金庸.83.사진)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

1924년 저장(浙江)성 하이닝(海寧)에서 태어난 그의 학문과 중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뜨거웠다. 진융은 "중국 문화 가운데 갑골문(甲骨文:동물의 뼈에 새긴 옛 문자)을 공부하고 싶다"고 의욕을 내비쳤다. 중국을 방문중인 그는 17일 베이징대학 국학연구원 개원 15주년 행사에 참석해 이같은 배움의 의지를 공개했다. 베이징대학 측은 진융이 중국학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화답했다.

이에 따라 진융은 1898년 베이징대학 개교 이래 '최고령 학생'으로 강의를 듣게 될 전망이다. 구체적인 등록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다. 진융은 올해 초 영국 캠브리지대학에서 당나라 역사(唐史)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초 최후의 로마 군단을 연구 주제로 삼으려 했으나 연구에 어려움을 겪다가 주제를 바꿨다. 그는 "베이징에서 공부를 더한 뒤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도 밟고 싶다"며 "학위 때문이 아니라 공부 그 자체가 목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융은 '소오강호(笑傲江湖)' '천룡팔부(天龍八部)'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 '신조협려(神雕俠侶)' 등 중국을 무대로 한 무협소설을 히트시킨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의 작품 중 상당수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특히 우리나라에 '영웅문'으로 소개된 '사조영웅전'은 수백만부가 팔리며 무협소설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전세계에 그의 독자는 3억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작품 '천룡팔부'는 중국 고교 정식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

홍콩의 권위지인 명보(明報)의 설립자이기도 한 그는 1950년대 신문 연재 형식으로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해 70년대 초 '녹정기(鹿鼎記)'를 출간한 뒤 작품활동을 접고 있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zhang@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2007.06.19 04:51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