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6일 금요일

[바둑] 기도 정신 훼손? 속기 팬 서비스?

팬서비스로 시작된 속기(速棋)가 바둑을 바꾸고 있다. 쉽게 엎어지고 쉽게 뒤집어지는 속기가 전술, 전략을 바꾸고 훈련방식을 바꾸고 대국 패턴과 대회 방식마저 바꾸고 있다. 순발력과 감각, 전투력은 최고의 덕목으로 떠올랐고 바둑과 동의어나 마찬가지던 장고(長考)는 가장 인기없는 단어가 됐다. 국내 바둑대회는 15개 중 10개가 20분 이내의 속기로 치러진다. 일년 내 이어지는 한국바둑리그도 제한시간 10분의 속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속기가 80% 이상을 점령한 셈이고 이런 환경이 바둑을 빠른 속도로 바꿔가고 있다. 세계대회는 아직 대부분이 2-3시간의 제한시간을 갖고 있으며 이 바람에 국내바둑과 세계바둑의 괴리현상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심심치않게 들리고 있지만 속기는 이미 한국바둑의 대세가 되고 말았다.

◆흘러간 유행가 ‘기도정신’=여자바둑의 강자 이다혜 3단은 어느날 오랜 고민거리에 대해 이창호 9단에게 물었다. “최선을 추구하는 게 옳은가요. 승부를 위해 타협해야 옳은가요.”
 
이창호 9단은 피식 웃었다. 그 자신도 답을 못 찾고 고민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바둑의 본질은 최선을 추구하는 데 있었고 그게 바로 기도정신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승부를 뛰어넘는 기도정신과 그를 통해 만들어지는 명국에 대한 소망은 프로기사들의 DNA에 깊숙이 박혀 있다. 하지만 속기 시대가 열리면서 승부는 실수가 판가름하게 됐고 역전이 밥먹듯이 일어나게 됐다. 이 두려움 때문에 갈림길에 봉착할 때마다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수 대신 안전한 길, 또는 비겁한(?) 길을 걸어가게 되는데 이다혜 3단은 자신의 그런 모습에 문득 회의를 느끼곤 했던 것이다.

팬들이 원하니까 속기는 어쩔 수 없다고 느끼면서도 바둑이 지닌 깊고 그윽한 향기와 특유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슬슬 종적을 감추는 것이 아쉬웠던 것이다.
 
◆모조리 암기한다=조훈현 9단은 어린 시절 ”정석은 외우되 바로 잊어버려라”고 배웠다. 오랜 불문율이었다. 정석에 억매이면 고수가 되지 못한다. 고수는 암기하지 않아도 판 위에서 제 길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속기시대인 지금은 정석은 고사하고 포석까지도 암기의 대상이다. 온갖 유형의 포석과 새로운 이론에 입각한 변화 등을 평소 철저히 연구한 뒤 완벽하게 암기해 두지 못하면 실전에서 피보다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날려보내게 된다. 하수의 전유물이었던 암기가 속기시대엔 프로들의 필수 무기로 변한 것이다.

◆시간공격, 시간연장책, 시간패=속기와 초읽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사람이 초를 읽을 때는 약간의 인정이 있지만 계시기의 초읽기는 가차없다. 잘 훈련된 젊은 기사들은 기계도 잘 다룬다. 반면 조훈현 9단이나 서봉수 9단 등은 돌을 놓은 뒤 시계 누르는 것을 깜박해 시간패를 당하곤 했다. 당황해 돌을 떨어뜨리는 일도 있었다. 속기시대에 순발력이 떨어지는 노장들은 여러모로 서럽다.

초읽기에 몰린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더욱 빨리 두는 행위를 시간공격이라 한다. 시간 연장책은 30초를 연장하기 위해 패를 쓰듯 급한 곳을 두는 것을 말하는데 이 수가 자칫 패착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두 속기시대의 새로운 풍속도이고 해프닝이다.

◆속기 중독의 위험성=속기를 잘 두기 위해 프로들은 10초 바둑 훈련을 열심히 한다. 인터넷 대국은 거의 20초 1회로 대국한다. 하지만 이같은 초스피드 대국은 약간의 중독성이 있어 너무 많이 두다 보면 보통의 바둑을 두기 힘들게 만든다. 뇌가 한 방향으로만 익숙해진 탓일 수 있다. 정상을 노리는 신예 유망주 강동윤 6단은 자신이 속기에는 강하지만 장고하는 바둑에 약한 약점이 있음을 고백한 바 있다.

◆속기는 유일한 대안인가=바둑학과 교수인 정수현 9단은 “팬들이 속기를 원한다. 바둑 내용은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속기로 가는 추세를 막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장수영 9단도 “프로는 상황에 적응해야지 상황 탓을 해선 안 된다”며 속기를 옹호한다.

그러나 권갑룡 7단은 “세계대회에서 중국에 자꾸 지는 이유가 속기 일변도에 있다는 지적이 있다”고 일부의 우려를 전한다. 중국 대회는 주로 2~3시간 바둑이라서 세계대회와 비슷하다.

1980년 KBS가 처음 속기대회를 선보였을 때 김인 9단은 “바둑을 황급히 둔다는 게 이상하다”며 출전하지 않았다. 당시는 1분 초읽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30초에서 20초, 10초 바둑까지 등장했다. 즉각적이고 화끈한 승부를 원하는 팬들을 위해서인데 이런 전략은 팬들을 TV 앞에 모으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바둑의 본질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도 쉼없이 이어진다(일본 3대 기전의 도전기는 지금도 이틀거리 바둑을 고수하고 있다).
 
속기 덕분에 하루 두 판 대국이 가능해지고 대회 진행도 좀 더 쉬워졌다. 하지만 한국 바둑이 어딘지 모르게 거칠어지고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다는 지적에도 귀를 귀울여봐야 하는 현실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출처: 중앙일보 2007.07.06 05:06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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