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수정헌법 제1조를 통해 본 국가보안법의 후진성…
“모든 정치적 의견은 토론의 시장에서 정화된다”
▣ 노트러데임(미국)=박용현/ 한겨레 편집부 기자 piao@hani.co.kr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싼 법리 논쟁이 갈수록 볼만하다. 외국에서 바라보니 더욱 그렇고, 미국 로스쿨에서 법의 잣대를 들고 보자니 더더욱 그렇다. 그 점입가경의 극치는 역시 ‘광화문 인공기’나 ‘주체사상연구소’식의 자극성 상황 설정과,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이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는 호들갑이다.
알카에다도 의견 낼 수 있어
미국 인디애나주 노트러데임대학 로스쿨 교수인 리처드 가넷에게 이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 하찮은 논란에 불과한 듯했다. 그는 “미국엔 특정 이념을 선전•선동하거나 적국을 찬양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표현•언론•집회의 자유 등을 규정한 수정헌법 제1조는 일개 헌법 조항인데도 독자적인 법 과목을 이룰 정도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 수정헌법 제1조 아래에선, 9•11 동시다발 테러의 참혹한 악몽에도 불구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거나 알카에다에 단순 가입하는 사람조차 처벌할 수 없다는 게 가넷 교수의 설명이다. “현행법에서는 테러단체를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행위에 이르러서야 처벌이 가능합니다.” 이는 이론상의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 이슬람교도들을 향해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미국인을 살해하라”고 지시하는 빈 라덴의 ‘세계이슬람전선 성명’이 인터넷상에 돌아다녀도 이를 문제 삼은 적이 없다. 인권단체와 일부 로스쿨 교수들은 ‘물질적 지원 금지’에 대해 “테러단체로 지목된 단체들도 각종 합법적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만큼 일괄적으로 기부나 원조 행위를 금지해선 안 된다”며 이마저도 지나친 규제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달 초 미국 캔자스주 항소법원에서는 테러에 대한 공포와 개인의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는 미국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판결이 있었다. 평소 빈 라덴을 찬양하고 “미국인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한 이란인 노동자가 9•11 1주년 직후 미국인 동료들에게 “닷새 뒤 미국 전역에 테러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미국을 비판하고 빈 라덴에 대한 지지를 밝힐 권리는 그야말로 보호된다”며 “그러나 마치 임박한 테러에 자신도 가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로써 여성 동료가 불안해서 울 정도로 만든 것은 정치적 의견 표명이 아닌 폭언에 해당한다”고 유죄 이유를 밝혔다. 재판의 초점은 ‘말의 내용이나 관점’이 아니었다. 이 이란인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 판결은 9•11 이후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테러 공포증의 민감도를 말해주는 한편, 그럼에도 정치적 의견의 표명에 그치는 한 어떤 말도 법적인 제재를 받지 않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9 11 이후 미국 정부는 이른바 ‘애국자법’을 통해 테러수사 기관에 지나친 정보 수집 권한을 줌으로써 개인의 사생활을 위협하는가 하면 아랍계 외국인에 대한 차별 강화, 테러 용의자의 변호인 접견권 불허 등으로 인권 상황을 급속히 악화시켜왔다. 이란•콩고•파키스탄 등과 더불어 미성년자까지 사형에 처하는 8개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은 사실 인권에 관한 한 선진국으로 볼 수도 없다.
브란덴버그 기준… 정부 협박한 KKK 인정
그러나 9•11 이후에도 의견과 그 표현을 처벌하는 법만은 만들지 않고 있다. 이는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처벌해야 할 표현의 범위에 대해 확고한 법적 기준을 형성해왔고, 이 기준을 넘어 법을 만들 경우 연방대법원에 의해 위헌으로 판명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중 국내에도 잘 알려진 것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기준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 대상자들에게 징집 거부를 촉구하는 우편물을 발송한 혐의로 미국 사회당 사무총장이 기소된 사건에서 홈즈 연방대법관은 “어떤 의견 표현이 행해지는 상황이나 그 성질로 보아 실질적인 해악을 가져올 것이라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발생하느냐 여부”를 처벌 기준으로 제시했다.
이 기준은 국내에서도 국가보안법 사건 변호인들에 의해 종종 인용되곤 한다. 국가보안법에 걸리면 명백한 위험을 일으키지 않는 행위도 처벌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행위조차 처벌해야 한다고 보는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이 이 기준을 받아들일 리 없다. 이들은 거의 1세기 전, 그것도 전쟁의 와중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이 그려놓은 표현의 한계선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기준은 이후 홈즈 대법관을 표현의 자유의 대명사로 만들면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보호막이 되지는 못했다. 1950년대 매카시즘에 휩쓸려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소된 이들에게 대대적인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미국 법원은 다시 표현의 자유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69년에 나온 브란덴버그 사건 판결이다. 무장한 KKK(극우 백인단체) 단원들이 모여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정부 요인에 대한 보복도 불사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집회를 다룬 이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비록 폭력이나 불법적인 수단의 사용을 옹호하는 말일지라도, 즉각적인 불법 행위를 선동해서 그런 사태가 실제로 벌어질 만한 상황이 아닌 한 금지돼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이 정도 기준에 이르면, 한총련을 비롯한 국내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은 거의 대부분 무죄로 기울 게 분명하다.
예를 들어 폭력에 의한 정부의 전복을 주장하더라도 이른 시일 안에 봉기에 나설 것을 선동하고 그런 결과가 곧 예견되지 않는 한 그런 주장은 허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사상의 자유 시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토론할 시간적 여유만 주어진다면 위험한 생각도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 충분히 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질서는 처벌의 공포만으로 지켜지지 않으며, 사회의 안전으로 가는 길은 불만과 대안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의 기회 속에 놓여 있다”라는 게 연방대법원의 철학이다.
브란덴버그 기준은 이후 베트남전 당시의 반전시위 사건을 비롯해 모든 불법 행위 선동 사건의 처벌 기준으로 확고히 유지돼오고 있으며, 수정헌법 제1조 교과서에서 첫 판례로 소개하고 있다.
미국 역사에서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과도하게 침해받아왔는지를 연구한 책 <위험한 시대>를 이달 출간한 조프리 스톤 시카고대학 로스쿨 교수는 “브란덴버그 기준이야말로 의견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기 위해 우리가 감내해야 할 최대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는 “반대쪽 의견에 대해 관용하고 자문해보는 태도를 버린다면, 우리는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싸우는 꼴이 될 것”이라면서 “미국 법원은 과거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었고, 앞으로는 안보상 필요성에 따른 표현의 자유 제한을 더욱더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9 11 테러도 ‘표현의 자유’ 꺾지 못해
미국 내에는 이런 기준을 달갑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다수 여론은 굳건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표현의 자유 침해를 감시하는 시민단체인 퍼스트어멘드먼트센터가 내놓은 올해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수정헌법 제1조의 표현의 자유 보장이 지나치다”는 대답은 조사 대상자 1002명 중 30%에 그친 반면 65%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9•11 테러의 충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2년 전 조사에서도 안보를 위해 표현의 자유를 더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은 과반을 넘지 못했다.
다시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국가보안법 존치론자들은 안보 불안 심리를 부추기느라 여념이 없고 반대편에선 법을 고쳐도 처벌할 건 다 처벌할 수 있다는 논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침해해온 권리는 무엇이고 앞으로 이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는 정작 전면에 떠오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법원을 비롯한 법조계에서는 형법 대체안의 처벌 기준이 모호하고 또 다른 남용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법이 바뀐 뒤에도 죄명만 바뀐 채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여전히 구속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기준을 찾는 적극적인 논의가 시급한 시점이다.
어쩌면 이는 민주주의의 원형을 회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도 ‘이세고리아’라는 표현의 자유 개념이 확고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이세고리아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체제의 근본적 차이는 아테네에서는 스파르타 체제를 찬양할 자유가 있지만, 스파르타에서는 스파르타 이외의 체제를 찬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2300년이 지난 시대에 살고 있다.
유럽, 아시아, 전세계 어디서나… ‘브란덴버그 기준’ 수준의 표현의 자유 보장이 미국만의 것은 아니다. 지난 1995년 국제법 전문가들이 국가 안보와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면밀히 논의한 결과 채택한 ‘요하네스버그 원칙’도 그와 비슷한 기준들을 제시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 원칙은 이후 유엔의 공인을 받았다.
이 원칙 제1조는 국가 안보의 필요성에 따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더라도 △그 표현이 심각한 위협을 줄 때 △국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제한만 가해야 하며 △그 제한은 민주적인 원칙에 부합해야 한다는 전제를 규정하고 있다. 특히 표현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선 그 표현이 △즉각적인 불법 행위 선동을 의도했고 △그런 불법 행위를 유발할 것 같으며 △그 표현과 불법 행위의 발생 가능성 사이에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세 가지 사실을 정부가 증명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이런 기준은 단지 이론적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많은 나라에서 이미 법적인 원칙으로 자리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선진국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인도 대법원은 이미 지난 1989년 제한할 수 있는 표현의 범위를 이렇게 판시했다. “표현 행위가 유발할 것으로 예상되는 위험이 시간적으로 먼 일이거나 단지 추측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그 표현과 직접적이고 근접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마치 화약통 속의 스파크처럼, 의도하는 행위를 일으킬 만한 표현이어야 한다.” 나이지리아 대법원의 1983년 판결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폭력에 의한 체제 전복 선동으로부터 우리의 공동체를 지킬 중요성이 커질수록,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 또한 더욱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야만 정부가 국민의 뜻에 책임을 지는 것이고 국민이 바라는 변화를 평화적으로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이 가입해 있는 유럽인권재판소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사건이 자주 다뤄지는데, 역시 엄격한 잣대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고 있다.
쿠르드족이 무장투쟁 등 강력한 분리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는 터키에서, 지난 1989년 정부의 쿠르드족 탄압 중단과 쿠르드족의 자유 의지에 근거한 평화적 해결 등을 주장하며 창당된 공산당이 그 강령을 이유로 해산 명령을 받았다. 공산당 지도자들이 터키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정당의 활동이 헌법적 체제를 훼손한다는 정부의 판단만으로는 결사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 특히 정당은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의 작동을 보장하는 데 본질적 역할을 하는 만큼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더욱 보호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터키 영토의 일부를 쿠르드족의 땅으로 지칭하며 쿠르드노동자당의 무장 활동을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처벌당한 언론인의 제소에 대해서도 이 재판소는 “개인의 의견을 주장했을 뿐이고 즉각 무장저항에 나서도록 설득하려 한 의도도 없는 만큼, 이 기사는 쿠르드족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언론의 자유와 정보 접근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밝혔다.
출처: 한겨레21 200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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