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19일 화요일

‘음악’에 푹 빠진 과학자

“우리 연구실은 ‘음악을 좋아한다’ ‘악기연주를 잘한다’고 받아주지 않습니다. 수학이나 물리를 잘해야지. 하지만 입학하면 제가 말을 바꾸죠. 명색이 소리를 연구하는데 악기 하나씩은 연주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연구실의 모든 학생들에게 악기를 배우도록 하고 연말마다 연주회를 여는 과학자가 있다. 바로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성굉모(60) 교수다. 그를 찾아 뉴미디어연구실의 지하계단을 내려가자 어둠 속에서 은은한 색소폰 소리가 흘러나왔다. 흔히 볼 수 있는 공대 분위기와는 색다른 풍경이다.

‘모범생’이어서 이루지 못한 꿈

(ⓒ동아사이언스)

성 교수의 전공은 공기를 통해 전파되는 진동이 인간의 귀에 소리로 들리는 과정을 연구하는 ‘음향학’이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독일 아헨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83년 귀국해 전자공학과(현 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또 음대 겸임교수직을 맡아 악기의 물리적 구조와 소리가 나는 원리 같은 음악음향학을 20년 넘게 강의하고 있다. 이렇듯 음악을 좋아하는 그가 음대에 가지 않고 공대에 간 이유는 뭘까.

“중학시절 안익태 선생처럼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는 꿈을 가졌죠. 하지만 모범생(?)이어서 꿈을 이룰 수 없었어요.” 음악이론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던 열네 살 소년에게 음악 선생은 작곡공부를 권유했다. 하지만 생활고에 허덕이던 1960년대 부모와 교장 선생은 결사반대를 하고 나섰다. 전교 1, 2등을 하는 학생에게 과학자가 훨씬 낫다는 이유에서다. 성 교수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던 모범생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 교수는 “역사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다”며 “음향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 것을 행복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1971년 독일 아헨공대에 유학을 간 그는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세부전공으로 음향학을 선택했다. 성 교수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좋았고 감성의 영역인 소리를 물리적인 공학으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지도교수는 바이올린 연주에 수준급이어서 다른 음대 교수들과 현악4중주를 연주할 정도였다.

독일에서 지도교수와 바이올린의 음질 개선을 연구한 그는 귀국한 뒤에도 악기와 관련된 연구를 꾸준히 수행해 왔다. 특히 성 교수는 “우리나라 향가를 경성제국대 일본인 교수가 처음 해독했다는 사실은 치욕”이라며 “국악 연구를 우리가 안하면 누가 하느냐”고 반문했다. 이 때문에 성 교수는 국립국악원과 함께 국악기의 계량이나 국악기가 내는 소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음의 높낮이에 대한 표준음을 설정하기도 했다.

‘위스키’ 마시며 관람하는 연주회

(▲ 성 교수는 음악에 대한 열정이 충만한 사람들과 함께 ‘젤로소 윈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다. ⓒ동아사이언스)

“성인이 된 뒤 악기를 배우려는 사람에겐 기타나 아코디언, 색소폰을 다룰 것을 권합니다. 쉽게 배울 수 있고 어떤 장르든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죠.” 현재 성 교수가 매일같이 연습하는 악기는 색소폰이다. 색소폰은 교회나 성당에선 종교음악을 연주할 수 있고 캄캄한 무대에선 찐득한 음악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표현력이 뛰어나다고 그는 귀띔했다.

성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색소폰만 모두 6개. 소프라노 색소폰, 알토 색소폰, 테너 색소폰처럼 다양한 악기를 갖고 있다. 그의 집에는 트럼펫과 튜바, 클라리넷 등 20여개가 넘는 악기가 더 있다고 한다. 이를 반영하듯 성 교수는 프로와 수준급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모인 ‘젤로소 윈드 오케스트라’의 단장까지 맡고 있다. 그리스어로 ‘젤로스’(zelos)는 열정이란 뜻이다. 이름대로 음악에 대한 열정이 충만한 사람들이다.

“학생들이 소리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연주자가 무대에 오를 때 느끼는 가슴 떨림도 맛봐야 합니다.” 보통 음향학을 연구하는 다른 나라의 연구실은 조촐한 연주회를 갖지만 성 교수의 연구실은 제자의 가족들을 초청해 성대한 연주회를 연다. 한 해는 학교 대강당을 빌려 콘서트를 열고 또 한 해는 학교 후문에 위치한 재즈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색다른 콘서트를 갖는다.

성 교수는 “우리나라는 개인적인 취향이 있어야만 과학자가 예술을 이해할 수 있다”며 “외국에선 음악이 생활의 일부니까 어린이들도 ‘나도 클라리넷이나 트럼펫 들고 취악대에 들어가야지’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문화선진국인 유럽 각국은 마을마다 ‘윈드앙상블’(Wind Ensemble, 입으로 불어서 소리 내는 악기로 이뤄진 연주단)이 있다. 나아가 성 교수는 “유럽에서 음악이 생활인 것처럼 일반인에게 과학을 친숙하게 하려면 문과, 이과, 예체능의 구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처: 서금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뉴스등록시간 : 2007-06-19 오후 3: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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