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에 대한 명전이라면 '축구 선수' 차범근에 대해 과연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을 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질 않았다. 후추의 주류 독자층인 20대 스포츠 팬들에게 차범근이란 이름 석자는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갈 것인가? 그들이 차범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과연 어느 정도이며 얼마를 알려줘야 하는지? 암담했다. 요즘 스포츠 팬들이 필자에게 "차범근이 정말 그렇게 축구 잘 했나요?"하고 질문 한다면… 그저, 막막할 뿐이다. K-League 보다 이태리 Serie-A에 더 관심이 많은 요즘 축구 팬들에게 '당시 차범근은 지금의 바티스투타 정도의 실력과 입지를 누리고 있었다'라고 답한다면 feel이 올까나? 차범근의 명전은 '축구 선수 차범근' 또는 '생활인 차범근' 이렇게 뚜렷하게 구분을 해서 특정 주제에만 전념해야겠다는 다짐도 한때 했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후추가 아는 만큼은 전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먼저 '축구 선수 차범근'에 대한 소개를 할까 한다. 그가 '세계적인 스타 차범근'이 되기 전까지의 축구 이야기를 말이다.
'차범근이 과연 얼마나 잘했냐?'는 질문에 답하는 일처럼 고통스럽고 막막한 '도전'이 없겠지만 이렇게나마 하나씩 풀어나가 보려고 한다.
1970년대 아시아 축구판도는 전통의 강호 한국을 필두로 장신 스트라이커 크라파이와 테크닉이 좋은 몽예몽이 이끄는 버마 (현 미얀마), 그리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유럽식 축구를 구사했던 이란, 짐 메케이와 롱드로우인의 명수 리챠드가 버틴 호주, 여기에 늘 우리 한국이 껄끄럽게 생각했던 이스라엘 등이 4강 내지는 5강 체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68년 멕시코 올림픽 득점왕 가마모토가 이끌던 일본은 비록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룩했다고는 하지만 결코 당시 한국의 상대는 분명 아니었다(버마는 70년대 중반부터 쇠락 한다).
72년 경신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한 차범근은 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면서 그 해 5월 방콕에서 벌어진 제5회 아시아 축구선수권 대회에 이세연, 이회택, 김호, 박수덕, 박이천, 변호영 등 기라성같은 대선배들과 함께 출전한다. 한국은 결승에서 그 이름도 유명한 GK '헤자지'와 파르빈, 베자디, 아디비 등 초 아시아급 선수들이 버틴 이란에게 2대1로 패하며 비록 준우승에 머물긴 했지만, 차범근 개인에게 있어서는 화려한 국가대표 데뷔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소득을 올린 대회라고 볼 수 있다. 국가대표 초년병시절 차범근은 대표팀 연습 시에 바람 빠진 축구공에 공기를 넣는 등 대선배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던 막내둥이 였지만, 플레이만큼은 처음부터 막내가 아니었다. 당시로는 비교적 장신에 속하는 178센티의 신장에 폭발적인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측면돌파와 정확한 센타링은 기존의 국내 선수들과는 분명 한 차원 다른 플레이였고, 어시스트능력 또한 탁월했다. 혹자는 '대한민국 뻥축구의 원조는 차범근이다'라고도 하지만, 차범근이 보여준 '뻥축구'는 당시 이땅의 국민들의 눈에는 '삼바 축구', '토탈 사커'이상의 '신기'였다. 대표팀에 발탁된 차범근의 기량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모해 나갔고, 대표팀 코칭스탭은 물론 선배들도 차범근의 성실한 자세와 뛰어난 기량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차범근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축구의 독보적 스타로 군림했던 이회택은 자신의 아성에 정면으로 도전한 차범근이었지만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후배 차범근에게 늘 격려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차범근은 고려대학 2학년 때인 73년 5월 뮌헨월드컵 아시아 A조 예선 대 이스라엘 전에서 연장 3분 경에 수비수 김호곤이 강슛한 볼이 크로스바를 맞고 튀어나오자 기가 막힌 발리 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려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차범근 시대'의 막을 올린다. 이후부터 차범근은 아시아의 호랑이로 성장해 국내 경기뿐 아니라 수많은 국제대회에 출전하며 맹활약, 축구팬은 물론 남녀노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한국 스포츠계 최고의 영웅 자리에 오른다. 당시 학교에서든 동네 조기축구에서든 가장 볼을 잘 차는 인물들은 모조리 차범근의 백넘버인 11번을 달았고, 당시 우리축구 대표팀의 패턴이 차범근의 측면돌파에 이은 정확한 센타링을 190센티의 장신 센타포오드 김재한이 헤딩으로 많은 득점을 올리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자주 봐온 어린 아이들은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종이비행기'란 동요의 가사를 바꿔 '찼다찼다 차범근 센타링 올렸다 떴다떴다 김재한 헤딩슛 골인'이라고 부르고 다닐 정도였다.
차범근은 한국에서 매년 열리는 박 대통령컵,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지는 메르데카컵, 태국에서 벌어지는 킹스컵 등 국제대회에 출전해서 유럽과 남미팀들과의 경기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발휘해 유럽과 남미의 지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아시아권에선 폭발적인 스피드의 차범근을 마크하기란 불가능했고 아시아 어디를 가더라도 축구팬들은 한국의 차범근이 '아시아 넘버원'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국이 78년 5월재팬컵에 출전해 덴마크 출신의 세계적 스타 플레이어 지몬센이 이끄는 서독의 명문 보루시아 MG와의 경기에서 4대 3으로 패했지만 차범근의 플레이를 눈여겨본 보루시아 MG의 명감독 우도 라데크에게 경기 후 '한국의 11번은 정말 놀라운 선수다. 저 선수는 서독에 와도 충분이 통할 수 있는 플레이어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또한 차범근은 78년 박대통령컵에 동행했던 독일 프랑크푸르트팀 1군 코치 슐테 코치의 관심을 사기도 했었다. 차범근은 이미 이때부터 우리의 몫, 아니 아시아의 몫이 아니었다.
차범근이 72년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79년 서독에 진출하기 전까지 국가대표로 참가했던 주요대회는 72년 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74년 뮌헨월드컵 예선,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예선,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 78년 방콕아시안 게임 등이었다. 얼마 전 보도된 차범근의 공식 A매치 출장 기록(121경기)을 일일이 파헤칠 순 없겠지만, 필자의 'Memory Lane'을 조심스레 뒷걸음질 쳐가며 '태극마크의 차범근'이 보여준 가장 인상적인 경기 3개를 replay 해 본다.
- Retro: "The best of Chaboom 1"
(1976년 9월11일 제 6회 박 대통령컵 국제 축구대회 대 말레이시아 전 - 서울운동장)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 소친원이 이끄는 말레이시아와 첫 경기에 맞붙은 한국대표1진 화랑은 초반부터 적극적인 공격을 펼쳤으나, 이날 따라 선수들의 미스가 속출했으며 특히 수비수들의 호흡이 전혀 맞지 않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연속해서 수비수들의 엉성한 플레이로 엉겹결에 3골을 허용한다. 후반전에 전열을 가다듬은 화랑은 차범근이 슛한 골이 골대 맞고 튀어나오자 이공을 미드필더 박상인이 골대 안으로 밀어넣어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 했다. 하지만, 곧바로 말레이시아의 목타르 다하리에게 중거리슛을 허용해 스코어는 4대 1로 벌어지며 패색이 짙어진다. 말레이시아가 무서운 강팀은 아니라고 하지만 축구경기에서 3골차란 결코 쉽사리 따라붙을 수 있는 스코어가 아니었다. 남은 시간은 7분. 그러나 '기적'은, 그리고 '차범근의 전설'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어느덧 까까머리 신참에서 대표팀 대들보로 성장한 라이트윙 차범근이 수비수들을 멋지게 제치고 강슛한 볼이 골네트를 가르면서 추격에 불을 지피더니 4분 후 또다시 차범근이 두 번째 골을 터뜨려 한 순간에 서울 운동장에 모인 관중들과 시내 다방 안에서 텔레비젼을 시청하던 축구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그리고 2분 후 종료1분전 중간 지역에서 볼을 차단한 차범근이 단독으로 치고 들어가 천금과 같은 동점골을 터뜨리며 4대4동점을 만들어낸다. 차범근은 그래서 '차범근'이었다. 스탠드를 꽉 메운 관중들은 물론 한국팀 벤치 또한 흥분을 감추질 못했으며 반면에 다잡은 승리를 한 순간에 놓쳐버린 말레이시아 선수단 전원은 망연자실 했다. 이 '동화 같은 엔딩 (ending)'을 발판으로 화랑은 승승장구하며 결승까지 진출, 한국대표 2진 충무를 3대0으로 제압한 브라질의 상파울로 선발팀과 공동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수 많은 축구 팬들의 뇌리 속에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는 차범근의 모습은 바로 이 '대 말련전' 한 경기로 충분했다. 또한 이 게임은 아직까지도 한국축구사의 가장 흥분된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실 이 대회직전 차범근은 약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었다. 76년 고려대를 졸업한 차범근은 신탁은행에 적을 두게 되는데 신탁은행과 서울은행이 통합되면서 당시 감독이던 민병대씨가 자동차보험으로 옮기며 차범근도 동시에 자동차보험으로 이적하려다 문제가 발생 졸지에 무적선수가 되고 만다. 이때 축구선수가 적이 없으면 경기장에서 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당시 축구협회 회장 김윤하씨가 차범근을 축구협회소속으로 등록시켜서 박 대통령컵 대회에 출전 시켰던 것이었다.
- Retro: "The best of Chaboom 2"
(1977년 3월20일'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대 이스라엘전 -서울운동장)
당시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은 먼저 1,2,3,4조로 나누어 각 조1위 팀을 가려낸 뒤 오세아니아 지역대표등 5개팀이 홈앤드 어웨이로 승패를 가려 가장 성적이 좋은 팀 하나가 아시아 대표로 월드컵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한국은 일본, 그리고 항시 우리에게 껄끄러운 상대였던 강호 이스라엘과 같은 조에 속했다. 한 달 전인 2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린 어웨이 경기에서 김진국이 강슛한 볼이 크로스바를 맡고 골라인 안으로 들어갔으나 선심이 골인으로 인정치 않아 결국 무승부로 경기를 끝냈는데, 이스라엘 매스컴에서 조차 김진국이 슛한 볼은 골인이 분명하다고까지 보도된 바 있고 한국의 오완건 단장은 부당한 오심을 FIFA에 제소하는 등 강력한 항의를 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이스라엘과의 서울 홈 경기는 한달 전의 분풀이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당시 한국의 감독은 최정민씨였고 코치는 김정남씨였다. 당시 멤버는 GK 1번 김황호 DF 3번 김호곤, 8번 조영증, 12번 최종덕, 5번 황재만, 6번 박성화 MF 4번 조광래, 9번 이영무, 17번 박상인, 18번 김성남, FW 15번 허정무, 14번 김진국, 11번 차범근, 7번 신현호등이었다.
1차전과 마찬가지로 초반부터 적극공세를 펼친 한국은 전반 20분이 지날 무렵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11번 차범근이 수비수 두 명을 가볍게 제치며 강슛을 성공시켜 3만 여 관중들의 함성을 쏟아낸다. 전반을 성공리에 끝낸 한국은 후반 GK 김황호가 '충분히 잡을 수도 있는 볼'을 골로 허용해 1대1동점이 된다. 그러나 한국은 후반 3분 여를 남기고 오른쪽에서 최종덕이 가까운 포스트쪽으로 이동하는 차범근을 향해 롱드로우인 한 볼을 차범근이 헤딩패스로 가운데 밀어넣자 달려들던 17번 박상인이 골대 정면에서 강력한 오른발 슛으로 골네트를 가른다. 승기를 잡은 한국은 1분 뒤 다시 차범근이 센타서클 중앙에서 한 사람을 제치고 오른쪽 풀백인 자신의 고려대학 2년 후배 12번 최종덕에게 연결하자 최종덕은 볼을 한두 번 툭툭 치고 가다 골대와의 거리 30여 미터 전방에서 그대로 중거리 슛을 성공시켜 서울운동장을 꽉 메운 3만 여명의 관중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한다. 최종덕은 이후 '중거리슛의 명수'란 별명까지 얻게 되고 결국 한국은 강호 이스라엘을 3대1로 물리친다. 이 시합에서 역시 차범근은 혼자서 3골을 모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며 그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 결승전이자 사상 첫 국대 남북대결인 대 북한전을 0-0 무승부로 마친 화랑(전 국대) 선수들 중 유일하게 차범근만이 현지에서 직접 독일 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차범근의 독일 진출은 스위스에 본사를 둔 '바두즈'사의 독일 대변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서독에 도착한 차범근은 여우종 재 서독 한인회 회장의 환대를 받으며 다음날 분데스리가 최하위팀인 다름슈타트와 월봉 1만마르크(260만원)에 6개월 단기 계약을 맺고 보쿰을 상대로 데뷔전을 갖는다. 다름슈타트의 부크발트 감독의 극찬은 독일 지역 신문을 비롯 국내 언론은 대서특필, 차범근의 '탈 아시아 시대'를 예고했건만, 당시 공군 현역병이었던 차범근의 신분 문제로 급거 귀국하게 된다. 도무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며 궁금해 할 후추인들을 위해 차범근의 입대 배경 및 거취 문제를 간단히 요약해 본다. 76년 10월에 입대했던 차범근은 공군이 타군에 비해 복무 기간이 길었던 부분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공군팀 전력 강화 특별 케이스'로 선정되어 타 군과 동일한 복무기간 후 '총장 권한으로 조기 제대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서면으로 받아 놓았던 상태라서 78년 12월이면 제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의 독일 진출은 12월에 진행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 '공군팀 특별 케이스 입대 1기'가 바로 차범근이었고 2기가 장기문, 황재만과 같은 당시 국가대표 급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독일 진출을 놓고 워낙 '시끄러웠기 때문에' 공군의 그런 약속이 무산되었던 것이었다. 차범근의 독일 체류는 이렇게 해서 11일 만에 마감된다.
- Retro: "The best of Chaboom 3"
차범근은 그 다음해인 1979년 5월31일 공군에서 만기 제대 한 후 6월22일 다시 서독으로 출국을 하게 되는데 대한축구협회에서는 떠나는 축구영웅 차범근을 위해 서울 운동장에서 성대한 고별경기를 열어준다. 3만 여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차범근의 고별전은 차범근의 모교 고려대학OB와 연세대학OB의 라이벌전으로 치러졌다.당시 고려대OB에는 차범근을 비롯해 선배인 황재만, 이차만, 고재욱, 그리고 후배인 박성화, 최종덕, 김성남, 김강남등이 출전했고 연세대OB역시도 김호곤, 박종원, 홍성호, 허정무, 조광래 등 양팀 다 정말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출전했다. 결과는 박성화가 맹활약한 고려대 OB의 승리로 끝났지만, 경기를 마친 후 차범근은 고려대와 연세대 양교 응원단장과 함께 서울운동장 트랙을 한바퀴 돌면서 자신을 보러 온 3만 여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마지막 인사를 했고 운동장을 꽉 메운 수많은 축구팬들은 환호와 박수 그리고 눈물로써 차범근을 배웅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필자 역시 떠나가는 차범근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영웅을 잃는 슬픔'에 한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꺼지지 않는 차범근의 독일 신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당시 유럽 최강이었던 헝가리를 누르고 첫 월드컵을 제패하며 축구 강국으로 발돋움한 서독은, 그 무드가 이어지면서 1963년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분데스리가를 창립한다. 차범근이 진출할 당시 분데스리가는 유럽 최강의 리그였으며 세계적 선수들이 가장 뛰어보고 싶어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분데스리가를 거치면 유럽 시장 어디든 갈 수 있었을 정도로 분데스리가의 위상은 실제로 대단했다.
국내에서는 1977년경부터 MBC 문화방송에서 매주 월요일밤 10시 30분에 이철원 아나운서와 주영광 선생의 구수한 해설로 서독 분데스리가를 방송해 주었기에 축구 팬들은 그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 높은지를 대략 조금은 알 수 있었고, 골수 축구팬 이라면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 세계적 선수들의 이름 한두 명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뛰고있던 유명선수들은 다음과 같다. 바이에른 뮌헨의 폴 브라이트너, 헤네스, 칼하인츠 루메니게, 융한스. 함부르크 SV의 케빈키건, 마가트, 후루베쉬, 만프레도 칼츠. 도르트문트의 아브람직. 카이져스 라우테른의 브리겔. 샬케04의 피셔. FC쾰른의 슈마커, 쿨만, 리트바르스키, 슈투트가르트의 한스뮐러, 쌍둥이 푀르스터 형제, 보루시아 MG의 마테우스 등이었다. 정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유명한 선수들이었다.
이러한 선수들이 즐비해 있었기에 차범근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성공을 섣불리 점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오쿠데라가 이미 차범근이 서독에 진출하기 2년전인 77년에 FC쾰른에 입단해 있었다.
1978년 6월22일, 두 번째로 독일에 도착한 차범근은 몇 차례의 역경과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처음에 입단했던 다름슈타트가, 잠시 고국에 다녀온다고 해놓고 기한 내에 차범근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약위반을 들고나왔으며, 다른 팀에서도 차범근에 대한 교섭이 전혀 없었다. 차범근은 3-4주 정도 호텔에서 머무르면서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봉착하게 된다. 대변인이었던 여우종씨와 함께 당시 다름슈타트 감독이던 부흐만 감독을 슈트트가르트로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 다음날 (현 샬케 04 매니저인) 루디 앗싸워가 공격수를 찾다가 부흐만에게 전화, 차범근에 대해서 알아본 것이 계기가 되어서 다음날 3일간의 브레멘 테스트가 성사되었다.
3일간의 테스트 도중 차범근은 연습경기에 출전하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지역 신문에 호평을 받게 된다. 브레멘의 매니저 루디 앗싸워가 브레멘과의 계약을 요청해서 브레멘 크레스트 호텔에서 차범근의 협상은 시작된다. 5시간에 거쳐 진행된 협상 중 프랑크푸르트 구단 측의 슐테로 부터 급하게 연락을 받는다. 78년 박스컵 당시 차범근을 활약상을 직접 보고 관심을 가지고 있던 슐테는 신문에 난 소식을 보고 차범근에게 '브레멘과 사인하지 말고 프랑크푸르트로 내려오라'는 요구를 한다. 가능하다면 프랑크푸르트 측에서 계약을 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당시 상황으로 봐선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브레멘 측은 사실 '헐값'에 차범근을 사인하려는 움직임이었고 슐테의 연락을 받은 차범근은 곧 바로 본에 위치한 여우종 씨의 집에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새벽 프랑크푸르트로 내려간다. 10분 간의 입단 테스트 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의 명문 프랑크푸르트와 연봉 25만 마르크(7천 8백만원)와 다름슈타트에 이적료 20만 마르크를 지불해준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게 된다. 차범근이 입단한 프랑크푸르트는 FC쾰른, 함부르크SV, 카이져스라우테른과 함께 63년 분데스리가가 창설될 때 같이 출발했던 역사 깊은 명문팀이었다. 이 팀에는 74년 뮌헨월드컵 우승의 주역 그라보스키와 휄첸바인 그리고 세계 최고의 중앙 수비수중 한 명인 오스트리아의 '전기철조망' 브르노 페차이가 핵심을 이루었으며, 이외에도 동독에서 망명한 금발의 나흐트바이와 서독대표출신 니켈, 노이베르거 등을 보유한 중상위 팀이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에는 페차이와 스위스 국가대표 출신 엘스너까지 2명의 외국인 선수가 있었는데 차범근을 영입하기 위해서 엘스너를 트레이드하기도 했다.
(편집자 주: 차범근의 독일 진출 배경을 쓰기 위해서 수 많은 자료와 서적을 뒤적이며 연구했다. 그 중 85년 축구원로들에 의해 공동집필 된 '한국 축구 100년 사' 중의 차범근 독일 진출 이야기를 인용해서 후추 명전의 일부를 작성하기도 했는데 보기 좋게 낭패를 보았다. 가급적 차범근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FACT를 전달하려고 했던 후추의 기본 취지를 살려 원고 작성 후 차범근 감독의 확인 작업에서 여기저기서 빨간 줄이 그어진 것이다. 여러 명의 축구 원로들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축구 전문 서적에서도 차범근에 대한 오보가 전달된다면 과연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차범근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구한다는 말인가…?)
입단과 동시에 차범근은 한국대표 시절에 달아온 백넘버 11번을 달고 당당히 프랑크푸르트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기용되면서 특유의 폭발적인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로 분데스리가의 '차붐 돌풍'을 예고 한다. 특히 미드필더인 주장 그라보스키와 휄첸바인, 그리고 콤비를 이룬 니켈의 자로 잰 듯한 정확한 패스를 받아 많은 골을 터뜨려 데뷔 첫해인 79-80시즌 34게임중 31게임에 출장해 12골을 기록, 득점 랭킹 7위에 오르며 서독 축구계 뿐 아니라 전 유럽을 뒤흔들어 놓으면서 '갈색 폭격기'라고 불리우기 시작한다.
그 이듬해인 80년에 키커지에서는 차범근을 신년 첫 호의 표지인물로 내세웠고, 프랑스의 메이어지는 차범근을 '80년대 가장 위대한 선수'로 선정했으며, 또한 차범근은 독일의 슈테른지가 선정한 '세계 4대 상승인물'에 테레사 수녀와 함께 선정되는 등 세계적 선수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UEFA컵 결승 2차전 대 보르시아MG와의 경기에서 결정적 어시스트로 프랑크프르트가 1대0으로 승리하는데 공헌하며 UEFA컵 우승의 주역이 된다. 이 대회에서 3골을 기록한 차범근을 두고 서독의 유명한 스포츠 전문가인 티터 큐어튼은 '차범근이 서독 국적이었다면 대표팀 공격문제가 완전 해결됐을 것'이라고까지 말했을 정도였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본다. 80년대 초반 세계 축구의 메인스테이지(Main stage)는 지금 우리 축구 팬들에게 익숙한 이태리의 'Serie-A' 또는 스페인의 '프리메라 리가' 양대산맥 체제도 아닌 분데스리가 독주 체제였다. 물론 당시엔 유럽 시장과 남미 시장이 지금보다 더 확연히 구분되던 시절이었지만 유럽 최고의 축구 시장, 즉 유럽에서 볼 제일 잘 찬다는 선수들이 한결같이 몰려들던 분데스리가의 위상을 짐작조차 할 수 있을까? 베컴, 지단, 피구에 열광하는 요즘의 축구 팬들에게 당시의 차범근의 '무게'를 상상해 보라는 요구 자체가 과연 가능한 일인지 생각해 본다. 지금처럼 한국 축구의 세계적 위상이 곤두박질 치고 있을 즈음, 과연 한국 국적을 가진 축구 선수 한명이 세계 최고 수준의 무대 최정상의 자리에 버젓이 서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이야기인가…
분데스리가 진출 1년 만에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한 차범근은 80년 6월 프랑크푸르트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도착한 날 각 신문사와 방송사 사진기자들은 차범근이 비행기 트랩에서 딸 하나양을 안고 내려오는 모습부터 촬영 하는 등 지금의 박찬호가 귀국할 때 이상으로 김포공항을 뜨겁게 달구었다. 또한 화랑과 프랑크푸르트의 경기 중계방송이 있던 날 차범근의 아버지인 차금동선생과 어머니인 채규순씨를 텔레비젼 중계석까지 모셔서 인터뷰를 하는등 매스컴에서도 최고의 환대를 베풀었다. 프랑크푸르트는 한국대표 화랑과 세 차례, 그리고 할렐루야팀과 한차례의 경기를 치루면서 4연승을 했는데 화랑 시절의 짧은 스포츠형 머리스타일에서 바가지 머리스타일로 바뀐 차범근은 매 게임 절친한 후배이자 화랑의 주전 스토퍼 홍성호의 끈질긴 대인마크와 심한 허벅지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차례의 경기 중 총 3골을 터뜨리는 등 놀랄 만큼 성장한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었다.
또한 차범근을 보러 운동장에 운집한 국내 축구 팬들 중 과반수는 프랑크푸르트를 응원하며 차범근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면서 격려했다.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국내 축구팬들이 너무나 보고 싶어했던 콧수염의 그라보스키와 세계적 수비수인 브루노 페차이가 사정상 내한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차범근의 명성에 자극을 받은 국내 몇몇 선수들이 80년 초반부터 분데스리가에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기 시작하는데 연세대 출신의 박종원이 카이져스라우테른에 진출 하지만 기량부족으로 도중하차 하고 박상인(뒤스부르크), 김진국(2부리그 보름즈), 김민혜 등이 뒤이어 1부리그와 2부리그에 각각 문을 두드리긴하나 역시 분데스리가의 높은 벽을 실감하게 된다. 그나마 유일하게 허정무만이 80년 7월 네덜란드의 명문 PSV 아인트호벤 필립스에 진출하게 된다.
1981년, 그 누구보다도 화려했지만 역경이 끊이지 않았던 차범근의 축구 인생에 어쩌면 가장 큰 '시련의 시절'이 찾아온다. 이미 분데스리가에서 세계적 공격수로 인정 받은 차범근이 팀 내에서도 1억이 넘는 고액 연봉자가 되자 이때부터 동료들의 텃세가 시작되는데, 특히 자존심이 상한 브로노 페차이(얼마 전 고국 오스트리아에서 친선 아이스하키 경기 중 심장마비로 사망)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고, 분데스리가의 타팀 수비수들 역시 정상적인 수비로는 차범근 마크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는 고의적 파울이 시작되었다. 급기야는 80-81시즌에 바이엘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겔스돌프의 잔인한 반칙으로 인해 차범근은 척추뼈에 금이 가는 중상을 입고 선수생활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다. 프랑크푸르트 팀 단장인 악셀샨더씨는 매 경기 후 기자들에게 '경기를 마친 후 라카룸에서 차범근의 몸을 한번 봐라. 마치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모습이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차범근의 고난은 그라운드 밖에서도 이어진다. 국내 언론에서는 갑작스럽게 몰아 닥친 '차붐 돌풍'으로 인해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목했지만 그라운드 복귀와 재기에만 전념하던 차범근의 '비 협조적 태도'에 반기를 들다 못해 '폭발' 직전까지 가게 된다.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소위 '차범근 죽이기'는 이미 20년 전에 시작된 셈이다.
여기서 필자는 지난 8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방문 시 차범근의 손 지갑 안에 아직까지도 고이 간직되고 있던 한 통의 편지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얼마 전 '월드컵 조직위 홈페이지 사건'으로 부당하게 옷을 벗은 최창신 전 사무총장(당시 서울 신문 기자)이 81년 차범근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던 '월드베스트 올스타전'에 출전을 앞두고 있던 차범근은 P모 씨를 비롯한 국내 기자단 4명의 '초대치 않은' 독일 방문을 받게 된다. PSV 아인트호벤에서 뛰던 허정무 전 대표팀 감독의 초청으로 유럽에 도착한 기자단은 바르셀로나 올스타 경기에 대한 소식을 듣고 차범근에게 자신들에게 스페인 행 비행기 표와 체제비를 요구한다. 아주 좋게 얘기하자면 "차선수, 그래도 당신이 국민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와서 이렇게 컸는데 고국에 있는 그들에게 바르셀로나 올스타 전 경기 소식을 열려 주고 싶으니 가능하면 우리 취재비랑 체제비 좀 대 주쇼…" 이런 식의 요구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어이, 차범근이… 니가 누구 덕분에 이렇게 국민스타가 되고 떼돈을 벌게 됐는데 이젠 우리한테도 좀 협조해야지.." 당시 기자단의 정확한 접근 방식은 후추인의 상상에 맡긴다. 이에 대한 차범근의 반응은 단호했다. "당신들 비행기 표랑 체제비 끊어줄 정도로 돈을 벌지도 못 했지만 설사 벌었다고 해도 그렇게는 돈을 쓸 수가 없다." 차범근의 이 한 마디로 그에 대한 국내 언론의 '융단 폭격'은 시작된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차범근의 말을 들어본다. "독일에서 멀쩡히 게임을 뛰고 있는데 경기에도 안 나갔고 벤치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야. '감독과 불화', '미국 코스모스로 간다', '홍콩으로 간다…' 뭐, 이런 악성 루머나 퍼뜨리고 말이야." 당시 차범근에 대한 공격은 독일 신문에서도 한몫을 했다. 81 시즌 골이 터지지 않자 '고연봉 선수'에 대한 시기로 인해 동료 선수 페차이와의 갈등 등, 한마디로 차범근이 경험했던 '최악의 나날들' 이었다. 차범근은 회상한다. "내가 죽는 수 밖에 없더라고… 내가 죽어줘야 해결이 되겠더라고… 마누라는 정신병원에 갈 뻔 하고, 근데 내가 죽질 않으니… 첫 골이 터지고 나니까 독일 신문은 그런 공격이 서서히 사라지고 차차 회복이 되었지만, 금방 죽길 원했던 국내 언론은 내가 3년, 4년까지 살아 남으니까 그때서야 서서히 수그러 들더라고..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 당시 서독을 방문해서 내 생활을 보고 서독 팬들의 반응을 두 눈으로 보고 갔던 최창신 기자는 국내 언론에서 별의 별 얘기를 다 해대니까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해서 그 편지를 보낸 거고 얼마 전(98년) 보다도 훨씬 더 언론의 공격이 심했던 그때 진짜 힘들었는데 (창신이 형의) 그 편지 한 통이 정말 많은 힘이 되었지… 그 무렵 교통부 장관 하시던 정부 고위 관계자가 독일에 와서 내 생활을 다 보고 경기도 보고 가셨는데 그 뒤로 청와대에 계시는 분이 신문사 데스크들을 불러서 '내가 다 보고 왔는데 그런 식으로 기사를 쓰면 되느냐?'라고 질타를 해서 신문사 데스크들도 다 바뀌고 그랬다고 그러더라고…" 필자가 직접 본 최창신 전 사무총장의 낡고 낡은 편지에는 그런 말이 쓰여져 있었다. "자네에 대해 그 어떤 소문과 말이 나돌아도 난 자네를 믿네…" 그 한마디의 격려는 이날까지도 차범근의 지갑 속에, 아니 그의 가슴 속에 묻혀져 있다.
80-81 시즌에는 부상에 따른 그 후유증으로 28게임에 출장 8골을 기록하는데 그쳤으나, 그 이듬해인 81-82 시즌에는 31게임에 출장해서 11골을 기록 하는 등 득점 랭킹10위에 오르며 차범근의 건재를 과시했다. 82-83 시즌에 들어 더욱 완숙한 기량을 선보인 차범근은 15골을 터뜨리며 팀내 최다득점선수가 됐으나 재정난에 허덕이는 프랑크푸르트와의 재계약에 실패한다. 그는 79-83년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면서 1백 22게임에 출전해 46골을 기록했다. 프랑크푸르트를 떠난 차범근에게 같은 분데스리가팀인 슈투트가르트와 뉘렌베르크, 이태리의 나폴리, AC밀란 등의 많은 팀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으나 차범근은 83년 7월 이적료 1백 35만 마르크(4억 5백만원)에 연봉 52만 6천마르크(1억 5천만원)라는 파격적인 금액을 받고 바이엘 레버쿠젠으로 전격 이적한다. 레버쿠젠은 차범근과 '악연'이 있는 겔스돌프가 소속된 팀이다. 레베쿠전은 이미 분데스리가 베테랑이 된 차범근에게 그 무엇보다도 리더쉽을 요구하고, 그는 이적 하자마자 팀에 쉽게 적응하면서 하위팀에서 맴돌던 레버쿠젠의 공격선봉으로 나서 팀을 분데스리가 7위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83-84, 85-86 시즌에는 두 차례나 전 게임(34게임)에 출전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특히 85-86 시즌에 시즌 최다득점인 17골을 터뜨려 분데스리가 득점랭킹 4위에 오르며 다시 한번 세계적 스트라이커로써 인정 받는다. 반면에 차범근이 빠진 프랑크푸르트는 중하위권으로 떨어진다. 85년 바이엘 레버쿠젠 선수들 체력검사에서 차범근은 같은 팀 소속 19세의 선수들보다 월등한 체력을 갖고 있다고 진단 받는 등 레버쿠젠에서도 변함없이 절제된 생활과 아울러 철저한 체력관리를 해나간다.
86년은 차범근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한해가 된다. 2월20일 A급 코치자격증(모든 아마추어팀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 했고,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월드컵 무대에도 서게 된다. 한국대표는 86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숙적 일본에 2연승하며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진출을 확정 짓는데 본선을 앞두고 축구협회는 서독에 나가있는 차범근을 불러들이며 한국축구 사상 최강의 멤버를 구성한다. 사실 차범근의 월드컵 대표팀 합류는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이루어졌다. 차범근의 대표팀 합류에 찬반양론이 갈렸기 때문이다. 우선 반대하는 측은 차범근이 대표팀에 들어오면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차범근에게 쏠리게 되어 기존 선수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뿐더러 위화감을 조성해 팀웍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 축구감독이자 축구 해설위원인 박경호씨는 '차범근이 합류해도 대표팀 전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반면에 한양대 교수이자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당시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던 최은택씨와 88대표팀의 박종환감독은 '세계적 공격수인 차범근을 반드시 합류시켜야 한국이 16강에 들 수 있다'고 강력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특히 최은택씨는 축구해설을 할 때도 국내 전문가들중에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 차범근 소식을 가장 자세하고 정확하게 전해주었고, '차범근 같은 세계적 선수가 월드컵에 나가질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늘 얘기한 바 있는 축구인이었다. 이외에도 이회택감독, 김재한감독 등도 차범근 합류에 강력히 찬성했고 조광래, 허정무 등 노장선수들도 차범근을 불러와야 된다는 의견을 낸다.
이 문제로 수개월을 끈 끝에 결국 대표팀 감독인 김정남씨는 차범근 합류를 축구협회에 공식적으로 요청해 멕시코 월드컵 한달 전인 4월 차범근은 드디어 대표팀에 합류한다. 차범근이 소속되어 있는 바이엘 레버쿠젠에서도 구단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는 선수인 차범근을 위해 분데스리가에서 명성이 자자한 유명한 맛사지사인 레버쿠젠 팀 닥터 죨렉씨를 한국대표팀에 파견한다. 드디어 차범근은 월드컵 개막 한달 전 대표팀의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전지훈련 때 합류하게 되는데 김정남 감독은 8년 만에 대표팀에 복귀한 차범근에게 백넘버 11번의 유니폼을 건넨다. 그동안 대표팀에서 11번을 달고 뛰었던 변병주는 대신 19번 유니폼으로 바꿔 입게 된다. 차범근은 월드컵 본선에서 후배인 최순호와 김종부를 투톱 파트너로 맞이하며 대 아르헨티나전, 대 불가리아전, 대 이탈리아전에서 고국을 위해 헌신한다. 당시 나이 32세의 차범근은 온 국민이 기대한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으나 3게임모두 줄기찬 기동력과 노련한 경기운영으로 여러 차례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 냈다. 비록 한국이 1무 2패로 예선탈락은 했지만 86년 멕시코 월드컵은 차범근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뜻깊은 대회였으며 그 어느 때 보다도 한국축구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한 대회라고 볼 수 있다.
87-88시즌부터 차범근은 센타포드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전환하며 25게임에 출장 4골을 기록한다. 88년에는 '킥 AIDS88세계 올스타'로 선정되어 베켄바워, 미셀 플라티니, 케빈 키건, 조지 베스트 등 전설의 수퍼스타들과 함께 친선경기에도 참가할 기회를 잡게 되지만, 개인 사정 상 출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88년 4월 15일 대 카이져스 라우테른과의 경기에서 300게임 출장기록을 세운다. 또한 차범근이 이끄는 레버쿠젠은 같은 해(88년) 구단 사상 처음으로 UEFA컵 결승에 올라 1차전 어웨이 경기에서 스페인의 강호 에스파뇰에게 3대0으로 완패해 우승전망이 매우 어두웠으나, 2차전 홈 경기에서 레버쿠젠이 에스파뇰에 2대0으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차범근이 기적과 같은 3번째 골을 성공시켜 레버쿠젠이 3대0으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운다. 결국은 승부차기에서 레버쿠젠에 4대2로 승리, 구단사상 처음으로 UEFA컵을 차지한다. 이로써 차범근은 80년 프랑크푸르트시절 UEFA컵 우승을 경험한 후 다시 한번 우승의 축배를 들게 되는데, 한 선수가 두 팀에서 UEFA컵 우승을 경험한 것은 차범근이 처음이었다.
그 후 차범근은 88-89 시즌에 29게임에 출전해 3골을 기록을 하며 89년 6월 19일 은퇴할 때 까지 분데스리가 통산 308게임에 출장해 98골을 터뜨렸는데 이 기록은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외국인 선수 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이 전까지 외국인 선수 최다득점자는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 스타플레이어인 보루시아MG의 알란 시몬센이 71년-78년까지 기록했던 76골이 최다였으나,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진출 6년 6개월째 이미 81골을 터뜨려 알란 시몬센의 기록을 깨고 이후 새로운 금자탑을 세운 것이다. 은퇴 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팀을 지도할 수 있는 축구교사 자격증인 '푸스 발레러'를 취득하고 그 해 11월 10일 고국의 품으로 금의환향했다.
차범근이 10년 동안 변함없이 세계 무대 분데스리가에서 세계적 선수로서 명성을 떨치며 서독 국민들과 축구팬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피나는 훈련과 함께 술,담배,도박은 물론 오로지 축구와 가족 그리고 신앙 이외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않는 구도자적인 생활을 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간혹 교민들 사이에서 '대인관계가 안 좋다', '너무 이기적이다'라는 등의 비난도 받았으나 차범근은 이에 개의치 않고 오로지 축구만을 생각했기에 최정상의 자리까지 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차범근의 '처세술'과 '대인관계'그리고 그의 '입'은 오로지 축구장에서만 존재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축구 하나로 평가 받길 원했다. '남들에게 잘 하고 대인관계 좋게 하는 일'은 한국에서도 할 수 있었다. 그가 독일에 온 목적은 단 한가지, 분데스리가에서의 성공이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괴로움을 무릅쓰고 포기해야만 해야 하는 것이 많았다. 마늘이 잔뜩 들어간 음식을 먹고 난 후 독일 선수들이 노골적으로 표명한 이질감을 없애고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 후론 한국 음식을 거의 끊다시피 했다. 흔치 않은 한국 음식을 고집하다간 경기력에 까지 지장을 주겠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승리는 축구장 안에서의 승리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의 집념을 보고 질타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지만, 입장을 바꿔서 볼 때, 어느 외국 용병 선수가 한국에 와서 김치찌개 보기를 무슨 '돼지 꿀꿀이 죽'보듯 꺼려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스테이크 대령하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들의 반응은 불 보듯 뻔하다. '미친x, 여기가 어디라고…'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활약상과 그 의미를 짧은 지면을 통해서 설명한다는 일은 어쩌면 그 시대를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꺼지지 않는 차범근의 독일 신화'는 필자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읽었던 어느 독일 시인의 시집에 쓰여진 한 귀절로 요약된다고 믿는다..
'차붐!
나는 너를 낳아준 너의 어머니와 너의 조국 코리아를 향해 경의를 표한다…
출처: 네이버지식iN (집필자 zics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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