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12일 화요일

스크랩) 과학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여라

과학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여라

[한겨레] 생명공학 등의 발전과 함께 급변한 과학 환경이 ‘신뢰의 위기’ 만들어
시민사회의 다양한 관점을 포괄하는 사회적 합의로 불확실성 최소화해야
▣ 김동광/ 과학저술가·고려대 강사

꽤 오래전에 번역했던 <과학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과학저술가 존 호건은 저명한 과학자와 과학철학자들을 면담하면서 과학에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대발견이 가능한지 묻는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종말이라는 말은 호킹이 <시간의 역사>에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만물의 이론이 곧 완성될 것이기 때문에 “이론물리학의 끝이 보인다”고 했던 의미에서의 종말이다. 호건은 원래 영문학자였는데 문학비평이 학자마다 다르고 작품 구절 하나의 해석을 놓고 끝없는 논쟁이 벌어지는 데 염증을 느끼고 이른바 확실성을 찾아 과학으로 개종한 인물이다.
호건뿐 아니라 과학을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막연하게 과학의 확실성에 대한 환상을 품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그 토대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근대과학은 지금까지 다른 학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설명력을 제공해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인문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 여러 학문 분야들의 접근 방식과 지향점, 그리고 설명 대상의 특성 등이 저마다 다른 점을 고려할 때 이런 식의 일방적인 비교가 무의미하다는 주장도 제기될 수 있겠지만, 그런 논의는 이런 자리에서 할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자. 따라서 통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학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은 얼마간 근거를 가진다고 볼 수 있고, 과학은 불확실성과는 관계가 없거나 최소한 상당히 거리가 먼 무엇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그러한가.
오늘날 과학을 둘러싼 논쟁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확실성에 대한 통념이 무색할 지경이다. 유전자 조작 식품이 인체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배아복제의 윤리성, 원자력 에너지의 계속 사용을 둘러싼 논쟁,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논쟁, 전자태그(RFID·무선을 이용한 식별 기술)의 사회적 영향 등 우리나라에서 굵직한 사회적 이슈가 되었거나 되고 있는 논쟁들에는 예외없이 복수의 전문가 견해가 등장했고, 내로라하는 과학자들도 단일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법정에 결정을 위임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과학이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

확실성과 동의어로 간주돼온 과학이 오늘날 겪고 있는 상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과학은 확실한데, 다만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의 문제인가? 아니면 과학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와 함께 과학에 대한 인식, 나아가 과학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과학의 불확실성 문제와 관련된 주제로 1990년대 중반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확산된 담론이 ‘신뢰의 위기’다. 그 발단은 아직도 논쟁이 끝나지 않은 광우병(BSE)이었고, 영국 정부는 발병 초기에 광우병의 인체 위해 여부를 투명하게 다루지 못했다가 영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인간 광우병 파문을 불러일으켜 국민들의 심각한 불신을 초래했고, 이러한 행보는 이후 유전자 조작 식품 시판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재현됐다. 영국 상원이 지난 2000년에 발행한 보고서는 “많은 사람들이 생명공학과 정보기술의 빠른 발달에 불안해하고, 심지어는 일상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기술에 대해서까지도 신뢰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신뢰의 위기는 영국 사회와 영국의 과학 모두에 매우 중대한 문제”라고 쓰고 있다.

학계에선 이미 오래전에 제기된 주제

이 대목에서 어떤 독자는 “맞아. 문제는 대중들의 괜한 불안감이야”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보고서는 문제의 원인을 대중이나 언론이 아닌 과학 그 자체와 과학을 대표하는 과학자 사회와 정부에게 돌리고 있다. 이 보고서의 첫 번째 주제가 ‘과학과 불확실성’이며,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는 과학 모두 불확실하다”라는 전제에서 논의를 출발시키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고서는 “시스템이 복잡하고 카오스적이기 때문에 지구가 태양 궤도를 돈다는 사실처럼 우리가 지금까지 확실하다고 생각한 것에도 불확실성이 개입할 수 있으며, 유전학처럼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 분야에서는 많은 것들이 불확실한 상태이다”라고 지적한다. 이 보고서는 이러한 ‘본질적’ 불확실성의 문제 때문에 과학기술을 둘러싼 의사결정은 일부 전문가들에게 맡겨둘 수 없으며, 시민들의 다양한 관점을 참여시켜 가능한 한 불확실성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 내린다. 어느 과학자도 확실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다양한 관점을 포괄해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사실 학계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과학기술과 불확실성이라는 주제가 제기됐고, 여러 학자들이 불확실성에는 과학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일찍부터 지적했다. 예를 들어 실비오 펀토비츠와 제롬 라베츠는 오늘날 과학의 특성을 “예측불가능성, 가치의 배태” 등으로 특징지으면서 쿤의 정상과학 개념을 비틀어서 “포스트-정상과학”(post-normal science)이라는 개념을 제기한다. 요약하면, 오늘날의 과학은 불확실성을 소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측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전통적인 과학 개념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단 이들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과학을 둘러싼 상황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과학의 성격이 크게 변했음을 도처에서 실감할 수 있다. 특히 게놈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생명공학의 빠른 발전은 다른 한편으로 과학지식 생산을 본령으로 하는 과학에서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특성을 낳았다. 몇 가지만 열거해보면 국가가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선 국가 주도의 과학, 거대 자본들의 투자와 개입으로 인한 과학의 노골적인 상업화, 생물 특허로 상징되는 과학 지식의 독점화, 그리고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빠른 정보 확산 등이다.
특히 생명공학에서 본격화된 국가의 과학연구 개입은 점차 그 시기가 빨라져서 나노 기술의 경우 아직 개념조차 분명치 않은 연구 분야에 나라마다 천문학적 액수의 지원금이 경쟁적으로 쏟아부어지면서 과학의 관료화와 중앙집중화가 심각해져 과학의 자율적 발전이나 동료 평가에 의한 연구 방향 설정은 아득한 동화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생명공학과 나노 기술 등 최근에 새롭게 부상한 과학은 그 탄생부터 숱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깊이 각인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오늘날 벌어지는 대부분의 과학기술 논쟁이 가치가 배태된 논쟁임이 당연해진다. 과학의 성격이 변했기 때문에 과학에서 가치를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과학의 성격이 변했다

또한 공공성을 대표하던 국가가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거대한 이익집단으로 변하면서 과학기술을 둘러싼 논쟁에서 더 이상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이른바 ‘심판 부재’로 인한 불확실성의 가열화가 계속되고 있다. 최근 벌어지는 많은 논쟁들이 해결되지 않는 원인 중에는 우리 사회에 공공성을 대변할 수 있는 집단의 부재도 큰 몫을 한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이 결국 과학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그것은 현 과학의 수준 때문이 아니며,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불확실성을 완전히 소거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불확실성을 피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앞에서 소개했던 영국 상원의 보고서가 다양한 관점들을 포괄하도록 권고한 것도 그런 예에 해당한다. 그것이 오히려 튼튼하고 건강한 과학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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